글: 신택수 기초과학연구원(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IRIS) 실험장치부장

대덕넷은 1월 8일자부터 10여 회에 걸쳐 "2024년은 (    )의 원년이다"란 제목으로 신년기획 기고를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국내 과학기술계와 대덕연구개발특구, 그리고 과학동네 사람들이 새해 초에 꾸는 비전과 꿈을 공유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이번 필자는 신택수 기초과학연구원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실험장치부장입니다. 신 부장은 2000년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서 핵 및 입자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거대 강입자 충돌기(LHC) 아틀라스(ATLAS) 연구원으로 역할을 했습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미국 메릴랜드대학 연구원 등으로 근무했습니다. 2013년부터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에 참여해 최첨단의 희귀동위원소과학 실험을 기틀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의 가속기 구축 10여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같이 이야기 들어 보시죠.
기초과학연구원(IBS) 중이온가속기 건설은 단군이래 최대 규모 사업으로 불릴 정도로 거대 과학시설이다. 허허벌판 열악한 상황에서도 참여진들의 좌절하지 않는 노력으로 저에너지가속구간이 완성되며 첫 빔인출도 성공했다.[사진=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지난해 11월 17일 중이온가속기연구소에서 개최된 중이온가속기이용자협회 워크숍 및 총회와 연계해 진행된 이용자협회 회원 연구소 시설 투어에서 안내 인솔을 맡은 신택수 부장이 이동중 미니버스 안에서 참가자들에게 가속기 시설 장치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중이온가속기연구소]

대덕연구단지에서도 도룡동 신세계백화점과 엑스포과학공원 사이 양지바른 터에 자리잡은 기초과학연구원(IBS). 여기서 갑천을 따라 북쪽으로 차를 달려 대덕산업단지와 봉산동을 지나 자동차전용도로를 타고 터널 2개를 지나면, 세종시에 못 미쳐 오른쪽으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신동지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 오른쪽 길로 들어서서 큰 길을 따라 1킬로미터(km) 쯤 더 가면, 정면에 파란색 'RAON(라온)' 푯말이 붙은 장방형의 웅장한 회색 콘크리트 게이트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바로 장차 한국 기초과학의 한 축이자 새로운 희귀동위원소 과학의 세계적인 중심지로 키워갈 우리의 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다.

IBS 본원에서 채 20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만, 고라니가 뛰놀고 가끔 멧돼지도 출몰한다. 영락없는 산골 모습이지만 이젠 연구소 앞 부지에는 여러 기업들이 근사한 사옥들을 짓고 들어서며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라는 이름에 걸맞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재작년말 큰 길 건너편 둔곡지구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며 '첨단 2번' 버스노선이 새로 생겼다. 그전에는 버스 출퇴근은 엄두를 낼 수도 없는 곳이었다.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중이온가속기연구소의 전신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이 이곳 신동에 입주한 것이 2019년 4월 말. 대전과 세종을 잇는 꼬불꼬불 1차선 구 도로로 차를 몰아 출근한 신동 현장은 포장도 안 된 흙길을 따라 덤프트럭과 레미콘차들이 줄지어 건설현장을 드나들며 뿌연 흙먼지를 일으켰다.

노천 주차구역에 대놓은 차들이 매일 그 흙먼지를 뒤집어쓰니, 아예 세차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내비게이션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길을 벗어난 흙 땅에 차를 처박아 렉카를 부르고, 중앙선도 그어져 있지 않던 구 도로에서 과속 트럭과 정면충돌의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는 등, 다양한 모험담(?)도 쏟아지던 시절이었다.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전신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 전원이 입주했던 2019년 4월경, 라온 건설현장 사진(드론 항공촬영). 중앙의 가속기동·가속기터널 부지와 우측 상단 본부동 부지에서 건설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사진=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전신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 전원이 입주했던 2019년 4월경, 라온 건설현장 사진(드론 항공촬영). 중앙의 가속기동·가속기터널 부지와 우측 상단 본부동 부지에서 건설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사진=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주 사무공간인 본부동이 미처 건설되기 전이었기에, 앞서 완공된 2개동(초전도가속기시험동·조립동)에 자리 잡은 일부 연구자들을 제외하고 당시 권면 단장 이하 직원 90여명은 2층 건물 하나(중앙제어동)를 촘촘하게 구획을 쪼개 닭장처럼 좁은 공간에서 서로 부대끼며 새 사무실에 적응해 가야 했다. 점심은 공사현장에서 건설노동자들을 위해 운영되던 '함바집'에서 먹든지, 도시락을 싸와야 했다.

이렇듯 열악(?)한 상황에도 우리 사업단은 좌절하지 않았다. 사실 당시 궁지에 몰렸던 것은 중이온가속기 사업 자체였다. 부족한 예산과 인력으로 악전고투하던 사업단의 바깥에서는 성에 차지 않는 연구개발 성과와 지연된 사업일정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요란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직원들은 각자 맡은 업무를 묵묵히 열심히 소화해 냈다. 입사기, 초전도가속모듈, 실험장치, 검출장치 등 앞서 개발해 놓은 각종 장치들을 하나씩 신축 가속기동으로 옮겨 넣었고, 초전도가속기시험동에 새로 구축한 가속관·가속모듈 시험시설들도 곧바로 가동에 들어갔다. 시설건설사업부에선 공사일정 관리에 집중하는 중에도 열악한 업무환경 개선에 신경을 기울였다.

행정부서에서는 갓 부임한 권면 사업단장을 보좌해 사업계획을 실현 가능한 방안으로 바꿔가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설익은 신동 이전은, 2019년 말 중이온가속기사업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권면 사업단장이 작정하고 선택한 고육지책, 배수의 진이었다.

입주할 준비가 안 돼 열악하기 짝이 없던 건설현장이었지만, 일하는 대로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가는 현장의 모습을 직원들이 직접 보고 느끼며 각자 과업의 중요성과 그 성취감을 십분 체감케 하겠다는 권 단장의 승부수는 다행히 제대로 들어맞았다.

신동 현장이 직원들의 노력으로 하루하루 변화돼 가는 동안, 권 단장은 사업계획을 단계별로 나누고, 시간이 필요한 고에너지가속장치 연구개발을 위한 선행R&D 사업을 추가해 사업기간을 늘려 받아냈다. 이후 2021년 말 저에너지가속구간의 초전도가속장치 구축을 완성하고, 2022년 10월 첫 초전도가속장치 빔 인출에 성공, 마침내 2022년 말로 중이온가속기 1단계 사업 완료를 승인받을 수 있었다.

2022년 10월 7일, ECR이온원에서 만들어 입사기에서 주입한 중이온빔을 초전도가속모듈 5기로 가속하는 빔 인출 실험에 최초로 성공한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임직원·관계자들이 연구소 중앙제어동 주제어실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첫 줄 맨 왼쪽부터 김형진 시운전팀장, 한인식 IBS 희귀핵연구단장, 하성도 IBS 부원장, 권면 전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장, 로버트 트리블 미 브룩헤이븐국립연구소(BNL) 부소장(중이온가속기연구소 과학자문위원장), 노도영 IBS 원장, 홍승우 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장, 이재흔 과기정통부 과학벨트추진단장, 우형주 자문위원, 정연세 시스템통합부장, 김기동 연구위원, 김우강 품질관리실장, 이양호 기반기술팀장(직책·직급 당시 기준).[사진= 중이온가속기연구소]
2022년 10월 7일, ECR이온원에서 만들어 입사기에서 주입한 중이온빔을 초전도가속모듈 5기로 가속하는 빔 인출 실험에 최초로 성공한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임직원·관계자들이 연구소 중앙제어동 주제어실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첫 줄 맨 왼쪽부터 김형진 시운전팀장, 한인식 IBS 희귀핵연구단장, 하성도 IBS 부원장, 권면 전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장, 로버트 트리블 미 브룩헤이븐국립연구소(BNL) 부소장(중이온가속기연구소 과학자문위원장), 노도영 IBS 원장, 홍승우 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장, 이재흔 과기정통부 과학벨트추진단장, 우형주 자문위원, 정연세 시스템통합부장, 김기동 연구위원, 김우강 품질관리실장, 이양호 기반기술팀장(직책·직급 당시 기준).[사진= 중이온가속기연구소]

그 해 사업단 체제를 마감하고 출범한 우리 중이온가속기연구소는, 중이온가속기 라온의 초기 구상과 개념설계를 주도했던 홍승우 교수를 초대 연구소장으로 맞아, 그 지휘 아래 그간 노력의 성과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지난해 2023년 3월 국내 최초로 희귀동위원소 생성에 성공하고, 5월 저에너지가속구간 전체의 빔 인출과 KoBRA라 부르는 실험장치를 이용한 희귀동위원소 생성까지 성공시켜, 마침내 저에너지 실험장치로 우주 원소 기원을 탐구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2023년 12월 12일, 사업단의 신동 이전 채 5년이 지나지 않은 이 날, 중이온가속기연구소는 IBS 웹페이지(indico.ibs.re.kr)를 통해 '2024 Call for Proposals of Low-Energy Beam at RAON (2024년 라온 저에너지 빔 활용 연구제안서 공모)'를 고지했다. 

국내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중이온가속기 라온의 저에너지가속장치를 통해 가속된 약 20MeV/u(핵자당 2천만전자볼트) 빔에너지·최대 40㎂(40마이크로암페어) 빔전류의 네온(Ne)・아르곤(Ar)빔과 저에너지 실험장치를 활용한 연구제안서와, 사이클로트론 가속기의 최대 10㎾ 양성자빔이 만드는 희귀동위원소를 활용한 연구제안서를 2024년 1월 19일 기한으로 공모했다.

이를 통해 IBS 희귀핵연구단을 비롯한 국내 유수 연구기관 소속 중이온가속기 활용연구자들로부터 핵물리학 22편, 의생명과학 4편, 육종연구 1편, 반도체 검증연구 1편, 신물질연구 2편 등 총 30편의 연구제안서를 받아볼 수 있었다. 짧은 공모기간에도 예상보다 2배 가까운 연구제안서들이 몰리며 중이온가속기 라온에 대한 연구자들의 높은 기대를 실감할 수 있었다.
 
2024년 새해도 어느덧 2월에 접어들었다. 오늘도 우리 중이온가속기연구소의 연구자들은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 중 하나의 과업은 세계 유수의 희귀동위원소 활용 과학자들을 우리 라온의 프로그램자문위원회(PAC)로 위촉하는 일이다.

오는 3월 중으로 이 분들을 우리 연구소로 초청, 첫 PAC를 개최하여 30건의 연구제안서들을 심의하기 위함이다. PAC에서 엄정한 심사를 통해 채택된 연구제안서들을 취합, 해당 제안서를 낸 연구자들과 협의하여, 오는 5월 비로소 코브라(KoBRA, 되튐분광장치) 실험장치 등을 통한 활용연구를 최초로 시작하게 될 전망이다.

2024년은 '중이온가속기 라온 활용 연구의 원년'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설계하고 우리 기업들이 제작한 중이온가속기 라온으로 희귀동위원소빔을 만들어, 미국·일본·독일·스위스 같은 가속기 선진국들에서나 가능했던 최첨단 희귀동위원소과학 실험을 우리 땅 우리 시설에서 시작할 날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중이온가속기연구소에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고에너지가속장치의 선행 R&D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RIBF, 미국 미시간주립대의 FRIB과 맞먹는 세계 최고 수준의 중이온가속기, 세계 최초로 두 가지 희귀동위원소 생성방식을 결합한 중이온가속기 라온을 온전히 완성해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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