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보신'만 남은 대덕, 벼랑 끝 '출연연'

불평불만 대신 내부 성찰과 변화 주도하자는 움직임 확산
"출연연 출신 연구자는 채용하지 않을 예정이다. 출연연 물(수동적, 관료적, 사업화 마인드 제로)을 빼는데 3년 걸리더라. 매일이 치열한 기업에게 3년은 치명적이다."

기업인이 출연연 인력을 보는 시각이다. '돈 먹는 하마'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을 보는 국민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연구개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은 수년전부터 제기됐다. 선진국 기술을 그대로 따라하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적 연구에서 퍼스트 무버형(First Mover)으로 전환해야 한다, 국민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과학기술 개발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자율차,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등 첨단 기술이 삶속으로 속속들어오면서 국민은 과학계의 역할로 사회와의 소통을 강조했다.

그럴때마다 연구자들은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았다고 불평불만이 만연했다.

'예산만 주고 가만히 놔둬라'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겠다'며 국민세금의 의미를 무색하게 했다. 제대로된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외부 탓이라고 불평을 내놨다.

제도 문제도 단골로 등장했다. 1996년 도입된 PBS(연구과제중심제도)가 원인이다. 단기 성과 중심의 평가로 국가연구기관인 출연연이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됐다. 과제를 수주하지 못하면 인건비조차 확보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정부 관료의 과도한 간섭과 규제로 연구자들은 더욱 움츠러들게 됐다는 것이다.

20년이 그렇게 흐르면서 출연연의 주인은 연구자와 국민이 아닌 정부관료가 됐고, 예산권을 부처에서 쥐고 있으니 출연연은 할 수 있는게 없다는 핑계가 반복됐다. 

일부 맞는 말도 있겠다. 하지만 '나만 아니면 괜찮다'는 지독한 이기주의가 팽배했던 것은 아닐까. 연구자, 출연연이 해야 할 본연의 역할보다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며 안온한 일상에 젖어든 것은 아닐런지. 가마솥에서 서서히 익어가는 개구리처럼 말이다.

문제는 다 같이 공멸하는 줄 모르고 여전히 개인의 '보신'에 전전긍긍하는 점이다.

4년전 꽃다운 학생들이 차가운 물속에서 스러져갔다. 출연연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연구성과를 자랑하던 출연연 어디에서도 적용 기술이 있다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걸 왜 우리가 해야 하냐는 막말도 있었다. 시간이 흐른 후 정부차원에서 몇몇 기술이 적용되기도 했지만 실험실 수준의 성과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유난히 더웠던 올 여름, 유치원생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부주의로 폭염의 통학차량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현재 수준의 기술로 해결 방안은 넘친다는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하지만 대덕의 출연연은 이번에도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출연연 필요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몇몇 과학자들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지만 과제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할 수 없다'는 변명아닌 변명을 내놨다. 누군가 정부를 움직이고 제도를 바꿔야 한다면서.

지난 4일 판교에서 4차 산업의 핵심으로 꼽히는 자율차 '제로셔틀'이 시범운행을 시작했다. 대덕의 출연연은 기술을 보유하고도 도로주행법 등 제도를 탓하며 차일피일 시간만 허비하고 말았다.

대덕은 1973년 연구학원도시, 과학기술의 메카로 출발했다. 출연연의 성과는 한국 산업계에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민간연구 역량이 커지면서 출연연은 다른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언제까지 과거의 성적표를 들고 제도, 환경만 탓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얼마전 대덕을 다녀간 도시생태계 전문가의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대덕은 소통 슬럼가, 유령도시 같다."

다행히 내부적 성찰과 변화를 도모하자는 출연연 연구자 중심의 목소리가 조금씩 모아지고 있다. 출연연의 역할과 존재론이 벼랑끝에 몰렸다는 위기감이 커지면서 내부로부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공감을 얻고 있다. 중견연구자, 신진연구자들이 속속 참여하며 다양한 실천 방안을 마련 중이다.

'그걸 왜 내가 해야하나' '나는 아직 피해 없다' '과연 될까' 등 지켜보는 연구자도 여전하지만 변화의 물꼬는 큰 흐름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벼랑끝 출연연이 국민이 찾는 연구기관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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