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 벤처설립 부당이익 배임·횡령 혐의 진실 입증 법정 다툼 고충 토로
기계연 7월 1일 복직예정…"백의종군하며 명예회복 역할 찾겠다"

"붕괴되어버린 국가 원자력 산업기기 검증체계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높낮이를 거르지 않고 일하며 행복의 가치를 느끼고 싶습니다. 지금에 와서 누구를 탓하고 싶지도 않고, 원망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백의종군하는 마음으로 새 삶을 살아가렵니다."

대덕넷은 7월 1일 복직을 앞둔 송치성 박사를 만나 심경고백 인터뷰를 진행했다.<사진=김요셉 기자>
대덕넷은 7월 1일 복직을 앞둔 송치성 박사를 만나 심경고백 인터뷰를 진행했다.<사진=김요셉 기자>
원자력 산업기기 전문 과학자 송치성 박사가 배임과 횡령 혐의에 휘말렸다가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그간의 마음고생을 눈물로 쏟아냈다.

송치성 한국기계연구원 박사는 연구소에서 허가한 벤처설립으로 인해 부당이익·겸직금지 의무를 위반했다는 혐의를 무죄로 인정받고, 오는 7월 1일 연구소 복직을 앞두고 있다.

대덕넷은 한 과학자가 감사원의 수차례 감사부터 검찰조사, 투옥생활 등 나홀로 사투를 벌인 진실 입증 과정을 듣기 위해 송 박사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특히 송 박사는 원자력 산업기기 분야에서 국가적 역할을 하며 새로운 일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감사원 감사와 검찰 조사로 이어진 억울함에 울분을 토하면서도 연구소에 대한 불신과 원망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송 박사는 옥중에 있을 때 목빠지게 기다렸던 아내와의 면회시간이나 수도 없이 자살을 시도했던 어두운 기억을 떠올리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송 박사는 "그동안 연구소가 나를 키워준 점에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국가적 공동체를 위해 연구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소신을 밝혔다.

그는 복직을 앞두고 "과거 사건에 대해 집착하고 싶지 않고 누구를 원망하고 싶지도 않다"며 "그저 나의 행복, 가족, 소속된 집단, 국가의 발전 방향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짙은 소망을 말했다. 

◆ 다음은 송 박사와의 일문일답.

Q. 먼저 어떤 경력이 있고, 연구소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간단한 소개부터 듣고 싶다.
"연구소에서 연구가 잘되게 하려면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정부, 연구소, 시장의 요구 3가지를 고려해서 연구소가 운영되어야 합니다.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을 이해하고, 행정의 전문성과 정책을 공부해야 국가의 흐름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기에 두루두루 공부를 해왔습니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박사)를 졸업하고 독일 아헨(achen)공과대학에서 박사후 연수과정을 받은 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를 받았습니다. 이후 토론토 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연구소 재직시절 미국 하버드대학교 캐네디스쿨에서는 핵비확산과 에너지 정책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연구소에서는 원자력사업단장을 맡으면서 원자력기기 안전을 위한 기기검증산업을 처음으로 일으켜 연구소와 기업에서 감사패를 받기도 했습니다. 세계 원자력 안전기준을 심의 평가하는 미국 기계학회(ASME)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기술기준을 제정하는 심의위원으로 임명돼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Q. 결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는데, 어떤 혐의였나.
"연구원에서 허가한 벤처기업 창업이 화근이었습니다. 연구원 내부 시설을 나의 벤처기업을 위한 연구에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배임죄'를 적용받았죠. 결국, 감사원은 '유령회사를 차려서 연구소의 시설 장비 인력을 무단으로 사용했고, 직위를 이용해 연구소의 연구용역을 가로챘다'라는 시각으로 바라봤었습니다.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회계사가 가르쳐준 절세의 방법이었지만  일하지 않은 부인에게 창업한 기업에서 본인 대신 급여를 줬다는 이유로 '횡령죄'라는 명목을 받았습니다. 벤처창업의 제도가 허술합니다. 잘못을 따지면 다 감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금 관련해서 우리나라 법대로 다 내라고 하면 기업을 운영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회계제도를 잘 모르기도 했습니다. 결국 연구소에 손해를 가했다는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이로 인한 명예훼손은 사실이 아님을 인정받았습니다."

Q. 벤처창업의 목적은.
"연구소의 경우 Over Head(연구소 흡수액)가 있어서 기업체가 시험을 의뢰할 경우 벤처기업에서 의뢰하는 것보다 비용이 높고, 여러가지 절차가 복잡해 업무가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벤처기업 차원에서 이를 극복하고 싶었고 당시는 정부의 권장사항이기도 했습니다. 출연연의 존립목적은 기술과 장비사용을 민간인에게 확대해서 기업의 경쟁력을 증대시키는 것이고 기술확산과 중소기업의 기술지원이기도 합니다. 연구소 차원의 권유도 있었고, 저도 전문성을 바탕으로 원자력 기자재 국산화를 위한 기기검증관련 산업에 직접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비정규직을 2년이상 근무할수 없도록 노동법이 개정되었어요. 연구책임자 입장에서는 2년 동안 근무하면서 업무에 익숙해질만 하면 그들을 해고해야만 하고 근로자 입장은 고용이 불안해지고, 또한 퇴직자들을 활용할 계획도 있었지요. 이런 배경에서 벤처창업을 시도했습니다." 

Q. 감사원 감사와 검찰조사, 재판 과정은 어땠나.
"감사원과 검찰 모두 작심을 한 것 같았습니다. 4개월동안 검찰조사와 연구소에 3차례에 걸친 감사원 감사를 받았고, 샅샅히 파헤쳐서 나오는 것이 없으니 5년 전 거래했던 부동산 거래내역서, 처갓집 사돈의 팔촌 통장내역서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이미 구속이 되면 권투로 치면 게임에서 한쪽은 묶어놓고 일방적으로 공격해서 싸우는 것이랑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판에서 자기방어를 하면서 항변할 수 있는 분위기조차도 실질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냥 죄인입니다. 구속이 되면 어떤 것도 입증할 수 없습니다. 변호사 조차도 전문기술적인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감옥에 있는데 일단 배임죄를 인정하고 빨리 나가서 억울한 것을 항소하라고 말했습니다. 공공기관은 무한의 자본과 무한대의 시간이 구축돼 있는 반면 개인은 유한자본과 유한시간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3년이라는 시간과 자본이 소비되면서 체력적, 정신적, 금전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저도 억울하지만,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보다 억울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Q. 진실 공방 과정에서 개인적 어려움은.
"집안이 무너졌다는 생각에 교도소에서 개인의 수건으로 자살을 시도했었습니다. 교도소에서 불시에 방에 들이닥쳐 소지품을 검사하는 특별조사원이 있는데 이들을 교도소에서는  까마귀들이라고 해요. 이들이 자살하려는 나를 발견하고 바로 제재당했죠. 하루에도 수십번씩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 뿐만 아니라 늙은 노부모와 부인도 자살 시도를 수없이 했습니다. 심지어 부인 동생이 집에 찾아와 아내의 자살을 감시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정도로 힘들고 아팠습니다. 하지만 무죄판결 이후 가족에 대한 감사함을 깊이 느꼈습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했지만, 가족은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내 부인은 항상 나를 걱정하며 심적 고통을 함께 나눴습니다. 가족은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앞으로 명예회복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송 박사는 가족 이야기를 하는 내내 눈물을 훔쳤다.) 개인과 기관은 싸움이 옳고 그르고의 판정이 아니라 개인은 100% 불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Q. 감사원 감사나 검찰 수사 기간 동안 주변의 도움이나 반응은.
"'부모가 늙어 자기 앞가림을 하지 못한다면 자식조차도 부모를 무시한다'라는 말의 뜻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연구소에서 나와 함께 형제·친구처럼 지내왔던 연구원들 조차도 내 전화를 받지 않았죠. 오히려 외면하며 이상한 소문이 들렸습니다. 도움은 고사하고 과거의 사실조차도 진실을 은폐하려고 할때 이 세상에 공공기관으로서 과연 정의가 존재하는가에 대해 회의가 들었지요. 지금은 사람들을 쉽게 믿을 수 없는 상처를 갖고 있지만 동료들 혹은 기관을 원망할 마음은 없습니다. 시장의 논리처럼 니즈가 있으면 비즈니스가 생기고, 그 속의 자생적 질서에서 나오는 신뢰만을 믿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그저 규약과 계약에 충실할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울때 전임교수로 임용해준 서울대학교와 원자력계 근무하던 선배들에게 오히려 제가 근무했던 연구소보다 더욱 감사한 마음입니다."

Q. 복직을 앞두고 있는데 복직을 위한 준비는.
"송치성이 연구소에 복직하면 보복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해요. 이번 일로 인해 그동안 불편했던 사람들의 염려 때문에 만들어진 소문으로 생각되는데 저는 그런 일에 더 이상 신경 쓸 여유도 없어요. 나도 인간이기에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하면 너무나 억울하고 견디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잊고자 합니다. 미국에서 연구소에 필요한 정책부분을 위해 공부했어요. 당시 하버드와 MIT에 와있는 세계 각국의 우수인재들과 세계 최고의 교수들과 같이 밤낮없이 공부했던 저의 전문성을 활용해서 저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기여할 부분이 있다면 기꺼히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비록 억울할 망정 과거에 집착해서 도대체 얻을게 뭐 있겠습니까?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 필요가 분명히 있지만 그 조차도 본인의 힘으로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제 입장은 어떻게 하면 거부감 없이 조직에 잘 적응해서 이전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있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과거 사건에 대해 집착하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과거의 경험과 아픔을 교훈 삼아 미래에 대해 준비를 할 것입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저 나의 행복, 가족, 소속된 집단의 발전 방향을 위해 노력하고 싶습니다. 붕괴돼버린 국가 원자력 산업기기 검증체계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원자력 기기산업의 전문성을 발휘해 국가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또한,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일하고 싶습니다. 나 자신이 무엇이 잘못됐는지 생각하고 싶고, 백의종군하는 마음으로 행복의 가치를 추구하고 싶습니다. 비록 무능하지만 이번 저의 사건은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정부 구조의 문제이고 과학기술계 리더들의 능력부재를 탓할 일이지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겁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가장 슬픈 순간은 감옥에 있을 때가 아니라 나와서 느끼는 소외감이 더욱 절망적이었습니다. 나는 남들을 기억하는데 남들은 나를 기억해주지 않을 때와 남들은 즐거워하는데 나는 그들과 같이 즐거움을 공유하지 못할 때의 슬픔이었습니다. 이 또한 연구원들의 성향과 연구소의 행정체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신뢰를 지키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는 걸 직접 경험한 이상 어떤 기대보다는 시장과 공동체의 순리를 따르고 가족을 사랑하며 살고싶습니다. 내가 필요한 곳이라면 기꺼히 도움이 되고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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