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 인터뷰]국산항공기 아버지 '이원복 교수' …최초 국산 항공기 부활호 개발
비행 지식 전무했던 1940년대, 서울대 항공학과 만드는데 힘써

국산 1호 항공기 '부활호'를 개발한 이원복 전 건국대 교수.<사진=김지영 기자>
국산 1호 항공기 '부활호'를 개발한 이원복 전 건국대 교수.<사진=김지영 기자>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며 비행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하늘을 나는 새의 원리를 연구해 오르니톱터를 개발했고, 영국에서 태어난 조지 케일리는 1773년 글라이더를 제작했다. 1891년 독일의 엔지니어 오토 릴리엔탈도 1896년 미국의 새뮤얼 랭글리도 글라이더를 제작했으며,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인류 최초로 동력비행기를 타고 '12초' 최초 비행에 성공했다.

국산 1호 항공기는 언제 개발됐을까. 1953년 6월 대한민국 공군의 주도로 개발이 시작돼 그 해 10월 시험비행에 성공한 '부활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부활이라는 이름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휘호를 받았다. 관측·연락 및 초등훈련용으로 사용했으며, 1955년 한국항공대학교 전신인 국립항공대학이 인수해 1960년까지 연습기로 사용했다.

시험비행 대기중인 부활호(1953.10.11)<사진=이원복 교수 제공>
시험비행 대기중인 부활호(1953.10.11)<사진=이원복 교수 제공>
부활호를 개발한 이원복 전 건국대 교수는 "당시로서 최신 비행기를 만들고 싶었다. 이 비행기보다 더 좋은 비행기는 없게끔 최고의 기술을 다 집어넣었다"며 "사천에서 시험비행을 했을 때 조종사 뒤 좌석에 탔다. 당시 비행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이 전 교수는 현역에서 물러난 후에도 항공기에 대한 사랑을 이어나갔다. 고령의 나이로 미국 비행학교에서 조종면장을 취득하고 대학에서 비행기 관련 강의를 하는 등 후학 양성에 힘썼다.

올해 만 87세. 비행기 관련 이야기를 할 때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현역시절로 돌아간 듯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이원복 전 교수를 만나봤다.

◆ 현대전에서 중요한 '비행기' "우세 확보위해 개발해야했다"

1926년 서울 종로구 내자동에서 태어난 이원복 전 교수는 어릴 때부터 비행기에 관심이 많아 모형비행기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비행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학창시절 배웠던 활공기 훈련 때였다. 법학을 전공해 은행계에 종사했던 부친은 그의 취미와 관심을 존중해줬고 공과에 입학할 것은 권유했으며, 그 역시 항공기를 깊게 공부하고자 이공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그는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던 1946년 2학년이 되던 때 서울대학교가 발족됨에 따라 경성공업전문대가 서울대 공과대학에 흡수되었다. 서울대에 어떤 과를 만들어야할지 이야기가 오고가는 가운데 그는 항공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항공과를 만들어야한다고 강조했다.

"세계2차 대전 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공군이었고 항공기였다. 일본이 항복한 것도 비행기를 통한 폭격 때문이었다. 비행기가 그만큼 현대전에서 중요하니 절대 우세를 확보해야한다고 생각해 항공공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국산 1호 항공기 '부활호' 개발 총책임자 되다

공군항공수리창 창잠으로 재직 당시 복좌 글라이더의 골조구조물 제작을 마치고(1963.10)<사진=이원복 교수 제공>
공군항공수리창 창잠으로 재직 당시 복좌 글라이더의 골조구조물 제작을 마치고(1963.10)<사진=이원복 교수 제공>
대학 졸업 후 그는 공군에 들어가 비행정비 하사관 양성소에서 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1953년 그가 소령 때 부활호 개발을 담당하게 됐다.

그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전쟁에 폐하고 미국으로부터 비행기 제작이 중단돼 항공공업을 할 수 없게 됐다. 이 기회를 틈타 항공기를 시작하면 우리나라가 앞선 기술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어 만들어진 것이 부활호다.

부활호 개발은 서울대 항공공학과를 처음 졸업한 이원복 회장에게 내려졌다. 갑작스러운 미션이었지만 그는 자신 있었다. 학교에서 비행관련 공부를 한 적이 있었고, 서울공과대학 시절 학생항공연맹을 만들어 항공관련 설계 및 수리 등을 해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원복 전 교수와 공군기술학교 교관 등 20여명의 사람들은 부활호 개발 전담조로 꾸려져 공군사천기지의 자재창고에서 설계와 제작을 수행했다. 자체적으로 재료를 생산할 수 없어 미군에서 자재를 끌어모았다. 실물크기로 설계도를 그려 그 위에 파이프를 놓고 용접했고, 조립식으로 뼈대를 만들고 천을 씌워 꿰매고 칠하는 등 밤낮없이 부활호에 매달렸다.

"힘들지 않았냐고? 음식 할 때 재료들을 갖춰 요리를 하듯 항공기 개발도 재료만 갖춰 설계하면 된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시간가는 줄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즐겁게 부활호를 만들었다."

이원복 교수와 20여명의 동료들은 부활호 개발 전담조로 꾸려져 공군사천기지의 자재창고에서 '부활호'설계와 제작을 수행했다.<사진=김지영 기자>
이원복 교수와 20여명의 동료들은 부활호 개발 전담조로 꾸려져 공군사천기지의 자재창고에서 '부활호'설계와 제작을 수행했다.<사진=김지영 기자>
그 결과 4개월만인 10월 10일 2인 시승 가능한 부활호 개발이 완성됐다. 길이 6.6m, 폭 12.7m, 중량 380㎏, 최대 시속 180㎞, 최저속도 67km에 이르렀다.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대한민국의 부활'이라는 뜻에서 復活이라는 휘호를 친필로 하사했다.

부활호의 초도비행은 제작 바로 다음날인 11일 오전 10시경 사천에서 이뤄졌다. 이때 부활호는 2시간동안 비행했다. 당시 조수석에 탔던 이 전 교수는 "하늘로 떠올라 사천의 전경이 펼쳐졌을 때 당시의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부활호는 관측·연락망 및 초등훈련용으로 사용했으며, 한국전쟁당시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 세력에 투항을 권유하는 전단지를 살포할 수 있게 동체 뒤쪽에 투하창이 설치됐다. 이후 1955년 한국항공대학교 전신인 국립항공대학이 인수해 연습기로 사용했지만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 창고에서 십 수 년간 잠든 부활호, 다시 부활하다

부활호가 갑자기 사라진 것은 이 전 교수에게도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미국으로 도미교육을 받느라 11개월 동안 한국에 없었다. 1955년 3월 귀국해 부활호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알게 됐다. 찾으려고 애썼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부활호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2004년 6월이다.

사건은 이러했다. 부활호는 1955년까지 공군에서 임무에 사용하다가 공군 김해기지에서 폐기처분하려던 것을 당시 대구 월배동 비상활주로 인근에 있던 한국항공대학에 제작실습용으로 기증했다. 그러나 이 학교는 1966년 폐교됐고, 같은 자리에 경상공업고등학교가 개교하게 되면서 부활호는 십 수 년간 창고에서 보관된 채 잊혔다.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이 전 교수는 한국에 돌아와 부활호가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을 듣고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했다.

그러던 2003년 말 중앙일보의 한 기자가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라이트형제가 비행기를 개발한 지 100주년 되는 해여서 국내 항공기를 선도했던 사람을 찾았던 것. 당시 그는 자취를 감춘 부활호를 찾는다는 내용을 기자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기사가 나간 후 경상공업고등학교에서 서무과장으로 근무했던 사람으로부터 경상공업고등학교 창고에 비행기가 보관되어있다는 사실을 제보 받아 이 2004년 1월 지하창고에서 전 교수는 다시 부활호를 만날 수 있게 됐다.

"지하창고에 가니 '부활'이라고 써져있는 부활호가 보였다. 외피가 거의 없는 채 뼈대만 남았고, 엔진, 프로펠러 등 주요 부품이 모두 사라져 형체를 거의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닌가. 보자마자 부활호라는 것을 알았다. 죽은 자식을 다시 만난 것처럼 정말 반가웠다."

이원복 교수는 행방불명된 부활호를 찾기 위해 수소문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2004년 1월 경상공업고 창고에 비행기가 보관돼있다는 사실을 제보받아 다시 부활호를 만날 수 있게 됐다.<사진=이원복 교수 제공>
이원복 교수는 행방불명된 부활호를 찾기 위해 수소문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2004년 1월 경상공업고 창고에 비행기가 보관돼있다는 사실을 제보받아 다시 부활호를 만날 수 있게 됐다.<사진=이원복 교수 제공>

부활호는 세상 빛을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많이 낡아있던 탓에 사람 손으로 꺼낼 수밖에 없었다.

부활호는 대한민국 공군 내부에서 회수와 복원이 이뤄졌다. 부활호의 동체는 재사용 가능한 것으로 판단되어 날개와 착륙장치를 다시 만들었다. 부활호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도면이 없어 이 전 교수가 많은 부분을 조언했다. 부활호 복원도 개발기간과 같은 4개월 동안 이뤄지도록 했다.

부활호는 4개월 만에 다시 부활했다. 2004년 10월 22일 복원기념행사에서 부활호는 지상 활주를 했다. 2008년 10월에는 등록문화재 411호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경상테크노파크의 주도로 개량복원사업이 시작되어 2011년 6월에 2기가 제작되어 시험비행을 완료하였다. 부활호는 공군사관학교와 전국 박물관 등에 전시돼있다.

◆ 60대, 비행자격증위해 미국으로...못 다한 꿈 이루다

올해 만 87세인 그는 여전히 항공기에 대한 사랑을 이어나가고 있다. 후세에는 배터리로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개발되길 바라고 있다. <사진=김지영 기자>
올해 만 87세인 그는 여전히 항공기에 대한 사랑을 이어나가고 있다. 후세에는 배터리로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개발되길 바라고 있다. <사진=김지영 기자>
그는 1966년 군에서 나와 자동차업계와 대한항공, 건국대 교수 등으로 활약하며 항공산업 기반을 다지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노력했다. 또 미국 실험항공기협회의 한국 지부장을 지내며 비행기 기술자문을 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대한항공 관리이사로 있으면서 미국의 헬리콥터를 들여와 로켓기관총과 미사일 등을 장착해 전투기를 만들어 육군에 납품했다. 이를 본 이스라엘이 우리나라 전투기를 수입할 의향을 밝혀 개발비를 받고 30대의 전투기를 판매하기도 했다.

또 1979년 중국과 미국이 국교를 맺으려고 할 당시 비행기들이 머무르고 수리할 수 있는 공간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전 교수가 주도해 김해에 항공기 수리 기반을 마련했다. 이에 김해 대한항공 정비사업본부는 자체 항공기뿐 아니라 미군용기와 공군이 운용하는 군용기도 일부 정비대행하는 등 현재도 사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60세가 되어 은퇴한 후에도 그의 항공기 사랑은 끝이 없었다. 그는 오랜 염원이었던 비행조종자격증을 따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함께 공부했던 학생들은 평균 20~30대였지만 그는 나이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지갑에 소중하게 넣어둔 92년도 취득 미국 조종면장을 보여주면서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때라 방학 때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등 자격증 취득에 일 년 반 정도 걸렸다"며 "젊은 학 생들만 있어서 최고령 학생이었다. 조종면장은 운이 좋게 한 번에 합격했다"고 말했다.

이원복 교수는 65세에 미국 자가용 비행기 조종사 면장 취득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자격증을 1년 반만에 따냈다. 사진은 시해라 비행학교장과 함께 찍은 것.<사진=이원복 교수 제공>
이원복 교수는 65세에 미국 자가용 비행기 조종사 면장 취득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자격증을 1년 반만에 따냈다. 사진은 시해라 비행학교장과 함께 찍은 것.<사진=이원복 교수 제공>

올해 만 87세이지만 그는 아직도 꿈이 있다. 배터리로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개발하는 것이다. 그는 "배터리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만드는 것처럼 비행기도 배터리로 만들면 휘발유도 많이 안 들지 않을까"라며 "비행기 겉모양을 만드는 것은 쉽다. 좋은 재료들이 많으니 우리나라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전 교수의 모습을 보고 자란 덕분인지 그의 아들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 중이다. 하지만 그는 과거와 달리 항공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열정을 줄 수 있는 환경이 많이 마련되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고 전한다.

"내가 항공에 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학창시절 직접 비행기를 만져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내가 하고 싶은 꿈을 찾을 수 있었던 점에서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자극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이 꿈을 찾을 수 있는 다양한 자극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원복 교수의 아들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비행과 우주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사진=이원복 교수 제공>
이원복 교수의 아들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비행과 우주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사진=이원복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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