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연구 팀웍·연구 연속성·글로벌 네트워크 강화 '필수'
"고속성장 뒷받침한 응용기술, 이제는 기초연구 할 분위기 적극 조성해야"

사례 #1
"기초연구를 열심히 하다가 응용연구로 끝내 갈아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응용연구가 연구비를 받기 더 쉽거든요. 하고 싶은 연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연구비 확보가 쉽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연구원 창업가 A씨)

사례 #2
"연구는 3년 만에 성과 내야 합니다. 연구 제안을 할 때 특허·사업화가 언제 되는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출연연 연구원 B씨)

사례 #3
"유망한 분야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안되죠. 연구비나 연구 인력이 그 쪽으로 다 몰리거든요. 연구철새가 대부분이라 함께 연구할 인재가 너무 없어요."(KAIST C 교수)

7일부터 새로운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이 탄생한다. 생리의학상, 화학상, 물리학상이 순서대로 발표될 예정이다. 특히 올해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자의 수상 소식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세계적인 학술정보 전문기업인 톰슨로이터에서 발표한 노벨상 예상 수상자 명단에 한국인 과학자 2명의 이름이 올랐기 때문이다. 톰슨로이터의 적중률은 20% 수준이라고 하지만 유력 후보에 이름이 오른 이상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나라 과학계는 지금까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한국의 고속 성장의 뒤에는 눈부신 과학발전이 있었다.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시작된 이후 불과 50여년 만에 가장 못사는 나라에서 세계적 과학기술 강국으로 등극하게 됐다. 반도체와 조선, 자동차 등 다양한 과학산업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한국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단시간 내 산업강국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됐지만 아직까지 노벨과학상은 요원한 실정이다. 노벨과학상이 과학기술의 분명한 척도를 나타내는 지표는 아니지만 노벨상만이 갖는 상징성은 과학기술 강국을 지향하는 국가가 꼭 쟁취해야 할 대상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연구현장 과학기술인들은 한국의 과학기술이 국가 생존을 위한 경제 성장 실용주의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탈피해 기초·원천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진정한 과학 강국으로 도약할 시점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현장 연구자들은 노벨과학상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패배주의에 빠진 한국 과학기술계의 아픈 현실을 곱씹으면서도 대한민국 과학자가 진정한 기초과학의 상징인 노벨과학상을 거머쥐기 위한 필수요건들을 하루 빨리 갖춰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 제품은 알아도 한국 과학은 모른다

현장에서는 한국에서 노벨과학상이 나오지 않는 여러 원인 중 하나로 취약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꼽고 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계가 국제적인 지적교류 활동 자체가 뜸하기 때문에 천명이 넘는 유럽권 중심의 노벨과학상 수상 심사위원들에게 한국 과학이 인식이 되지 않으니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기조차 힘들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 R&D 사업은 대부분 정부 주도로 연구 사업이 진행되다보니 연구 환경이 민간 영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자유롭게 운영되는 선진국에 비해 주도적으로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거나 새로운 외부의 자극을 받는데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현장 연구자들은 외국 학술대회나 심포지엄, 포럼 등에 참석하며 글로벌 네트워킹을 활발하게 하는 연구원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해외 활동이 쉽지 않다고 토로한다.

출연연의 한 연구원은 "외국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한 절차가 너무 까다롭고 어려워 그냥 가지 않고 있다""외국에 한 번 다녀오기 위해서는 작성해야 할 서류의 양이 엄청나고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비용부터 시작해 규제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또 다른 P 연구원은 "국내외 연구를 활발히 진행해 연구비를 많이 받고 또 많이 사용하면 때로는 범죄자가 된 듯한 기분도 든다"며 관련 규제나 감사에 대한 부담감이 크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한국 기업의 제품이 글로벌 경쟁력을 가지고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정작 한국의 과학 기술은 네트워크를 구성하기가 쉽지 않고 또 해외로 나갈 기회조차 잡는 것이 어려운 실정. 과학자들은 활발한 국제 교류와 네트워크가 이뤄지는 연구환경은 노벨과학상을 받기 위한 인프라 내지는 문화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런 가운데 얼마 전 KISTEP(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이 발표한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의 요인을 분석한 보고서를 주목할 만 하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해외 선진국들의 경우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에 대한 민간 영역에서의 기초연구 지원 프로젝트가 활성화 돼 있으며, 수상자 배출 비결은 세계적 우수 인재의 발굴과 활용,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 구축, 다양한 분야가 참여하는 융합적 연구, 기초연구를 중시하는 철학인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민간재단 중 미국의 하워드휴즈 의학연구소의 대표적 모험연구 지원사업 'Investigator program'의 수혜자 325명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가 17명에 달한 사례가 과학계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다. 노벨상을 수상한 14명의 평균 지원기간은 23.9년이었으며, 혁신적이고 모험적 연구를 장기적으로 연장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수상자 배출의 비결인 것으로 나타났다.

차두원 KISTEP 정책기획실장은 "정부 기초연구 정책의 보완재 역할을 수행하는 민간의 지원은 유연성, 비관료적인 체계, 장기적인 지원 등으로 인해 최첨단 연구를 하는 연구자들에게 선호되고 있다""현재까지 우리나라에는 미국과 같은 민간재단의 지원이 부재하므로 향후 민간 기업 및 재단의 기초연구 확대 장려를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기관이 가질 수밖에 없는 연구의 폐쇄성을 보완하고 민간연구소나 기업, 재단 등의 후원이 좀 더 활발해져야 글로벌 네트워크를 견고히 하고 세계에서 한국의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목소리가 많다.

노벨상 받을만한 연구누구와 해야하나?

우수한 인재, 그리고 기초 연구를 함께 진행할 우수 연구인력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게 나왔다. 정부 주도로 이뤄지는 연구가 모두 응용연구에 집중되다보니 정작 기초 연구를 진행하는 인력은 찾기가 쉽지 않다고 연구자들은 하소연 하고 있다.

한 연구원은 "기초 연구를 진행하다 연구비 지원 등의 이유로 응용 연구 분야로 전향할 정도였다""우리나라 연구현장은 기초 연구를 하려는 사람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또 한 연구원은 "현장에는 쉬운 연구만 하려는 경향이 너무 팽배해 있다""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피하려는 요즘 분위기 때문에 특히 기초 연구 분야는 함께 연구할 연구원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젊은 연구원들 사이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대학을 졸업하는 시기부터 논문 실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연구원은 "5년에 논문 하나 나오는 연구를 해서는 졸업도 쉽게 할 수 없고 졸업을 한 뒤 포스닥이나 취업에 있어서도 누적 논문 실적이 중요하기 때문에 기초 연구를 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아쉬워했다.

최근 톰슨로이터로부터 노벨화학상 유력 후보자로 지목된 유룡 KAIST 교수는 "기초 연구를 함께 진행하기 위한 인재가 턱없이 부족하다""우수한 인재들이 기초 연구 분야에 보다 많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부분도 상당 부문 보완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유룡 교수는 "노벨상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학자 스스로 연구에 임하는 자세와 열정"이라고 전제한 뒤 "연구를 진행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른 과학자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과학자들이 논문이 나오지 않더라도 앞으로 어떤 큰 일을 할 수 있는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실적·단기 성과 위주 분위기가 발목 잡는다

실제로 많은 과학자들이 논문 실적이나 단기 성과에 쫓기다보니 따라가는 연구만 해야 한다고 안타까워 했다.

대덕의 한 연구원은 현 과학기술 정책 자체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출연연 연구자들은 전공이라는 것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라며 "이런 분위기에서 한 연구를 꾸준히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새로운 연구를 해야 연구비를 받을 수 있다"고 꼬집었다. 노벨상이 나오기 위해서는 10, 20년 연구해야 하는데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KAIST 한 교수는 "일본에서 한 교수를 만난 적이 있는데 이미 국내에서는 낡은 기술이라고 치부되는 것을 계속 연구하고 있었다""길어도 3년 안에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하는 우리와는 너무 달랐다"고 푸념했다.

유룡 교수는 이런 분위기를 '철새연구'라고 꼬집으며 "그래핀이 유망하다고 하면 평가를 잘 받기 위해서 모든 연구가 그 방향으로 집중된다""연구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자기 주제를 만들어야 하는데 업적이 없으면 안되는 환경이 문제"라고 말했다.

연구비 지원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한 연구원은 "노벨상은 국가에서 기다려줘야 한다""미국이나 일본은 집중투자하는 분야 외에도 연구비를 꾸준히 준다. 1, 2, 3년이 아니라 2030년 투자해야 노벨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출연연 P 책임연구원은 "연구비를 줄 때 사업화 언제 하냐고 묻는 경우가 많다""3년 안에 연구비로 어떤 성과가 나오느냐, 특허나 기술이전은 왜 안되냐를 묻는데 노벨상은 나오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과학계 한 원로는 "실적이 나오거나 사업화가 되지 않고 한 가지 연구만 꾸준히 하더라도 존경 받을 수 있어야 한다""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기초가 흔들리면 응용연구도 발전할 수 없다"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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