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기술연구회 2010년부터 석·박사 채용…근로자 파견 성격
모집 공고에 '정년보장·정규직'…실제론 승진·임금인상 없는 비정규직

#1. 사람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무실 청소, 짐나르기는 물론 심지어는 화장실 청소까지 하고 있습니다. 말이 연구지 매우 열악한 환경에 내몰고 권한도 없이 책임만 지우고 결과에 대해 욕설까지 하는 상황입니다. 처음 연구 계획서 내용과 다른 일이지만 업체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며 나몰라라 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을 위해 연구개발에 힘이 되려고 왔는데, 일은 그냥 일반 노동자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싼 값에 모든 일을 다 시키고 시간이 지나면 보내버리는 형식입니다. 문제는 현재 상태로는 기업지원연구직은 싫으면 나가고 아니면 참고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A 출연연 소속)

#2.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연구 방향에 대한 기준이 없습니다. 기업지원연구자에 너무 의존하는 한편, 지원은 없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출연연이 연구자와 같이 지원하는 형태가 돼야 기업이 요구하는 것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자들이 실제로 기업의 연구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단순 업무에 활용되는 것도 회사가 기업지원연구원을 활용한 연구개발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척박한 상황에서 연구자만 달랑 파견하면 연구개발이 잘 될리 있겠습니까. 이를 정부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B 출연연 소속)

#3. 기업 지원 취소를 원해 수 차례 얘기했지만, 연구원에서 절차를 진행해 주지 않습니다. 복귀하면 월급도 줄고 연구원 내에서도 힘들게 생활해야 한다고 회유하며 차라리 참고 지내라고 합니다. 이게 제대로 된 시스템 내에서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파견법 보호조차 못 받아 노동의 권리를 내세울 곳도 없습니다.(C 출연연 소속)

출연연들이 석·박사급 우수인력을 채용해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사업이 사실상 인력파견업에 머무르고 있고 채용된 석·박사 인력들이 비정규직 '기업 떠돌이'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채용과정에서 정년 보장과 정규직 등 조건을 내걸었지만 산업기술연구회 및 출연연이 이를 지키지 않았고, 방치했다는 것.

문제가 되고 있는 기업지원연구직은 지난 2010년 9월 탄생된 직종으로 출연연이 연구 인력을 직접 선발·채용해 장기 지원 함으로써 중소기업의 기술혁신 능력 및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도입한 제도다. 지원기간은 3년 이내로 하되 참여 기업과 협의해 연장이 가능토록하고, 지원 기간 동안의 인건비는 정부와 기업이 반반씩 부담하는 조건이다. 여기에 스톡옵션과 개발성과 등의 인센티브도 부여하는 것으로 설계됐다.

장기적으로 볼 때 출연연 정규직 전환 등의 당근책을 제시함으로써 기업지원연구직에 보다 우수한 사람들이 많이 공모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의도는 2년도 채 지나기전에 어긋나기 시작했다. 해당 사업비가 축소됨과 동시에, 기업지원연구인력들의 임금 인상은 물론 평가를 통한 직급 승진과 각종 복지혜택 대상에서 제외됐다. 정부가 당초 약속한 정규직으로의 전환은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이 돼버린 것이다.

출연연과 기업이 맺는 '기업지원계약서'에는 '기업이 3년간 기업지원연구원을 50% 급여 부담 조건으로 지원받고, 다시 3년을 연장 계약(급여의 70% 부담)하는 경우에 계약 종료 후부터 정규직원으로 채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정부지원 없이 5000∼6000만원의 연봉을 부담하면서 석·박사 인력을 채용할 중소기업은 없는 실정이다.

출연연 역시 부담이 되긴 마찬가지다. T/O가 없는 상황에서 이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줄 수는 없는 입장이다. 말 그대로 기업지원연구자들은 출연연의 미운오리새끼로 전락해 버린 셈이됐다.

2011년 9월 기업지원연구원으로 E 연구원에 채용된 박사학위 소지자 A 씨는 "법률 분야에 익숙하지 않은 이공계 석·박사들 입장에서는 채용 공고의 '출연연 소속', '정년 보장', '사업정규직' 등 용어를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었다"며 "지금와서 당장 1년 후에라도 기업이 지원받지 않기로 결정하면 어찌되는지 막막할 따름"이라고 하소연했다.

현재 이들의 신분은 사업정규직으로 사업이 지속되는 한 신분이 보장된다. 그러나 기본 임무가 기업을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6개월 이상 기업 지원을 하지 못하는 등 사유가 발생될 경우 면직 당할 수 있다. 이미 1명의 해고자가 나온 상황이다.

해고된 K 연구원 L 박사는 당시 계약한 3년의 시일이 다가오자 6개월 안에 기업과 매칭을 하기 위해 혼자 뛰어다녔고,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을 원하는 3개의 기업을 찾아냈다. 연구원과 연구회에 보고하고 매칭이 되기를 기다렸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기업과 매칭이 안됐다는 연락 뿐이었다. 그 결과 L 박사는 해당 연구원으로부터 해고 조치됐다.

L 박사 측은 "3개의 기업을 찾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회 측 기업 매칭 일정과 맞지 않기 때문에 성사가 안됐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며 "이런 식으로 계속 진행된다면 억울한 희생자가 계속 나올 수 있다"고 토로했다.

산업기술연구회 기업지원연구직 권익수호연대 대표 장대근 박사(ETRI 소속 기업지원연구자)는 "이는 책임회피를 넘어 공공기관에 만연해 있는 도덕 불감증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며 "법을 잘 모르는 이공계 지원자들 입장에서는 정년이 보장되는 정규직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기업지원연구직들의 정규직 전환은 앞으로도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2015년까지 이뤄지는 비정규직-정규직 전환 정책에 기업지원연구원들을 일반 계약직과 동일하게 취급해 대상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 대표는 "출연연 내부 연구개발과 관련된 일반 계약직과 동일선상에서 동일 조건으로 정규직 전환 대상에 포함시킬 경우 기업지원연구원들의 정규직 전환은 거의 불가능하다"며 "ETRI의 경우 총 41명의 기업지원 인력 중 2.9명 만이 전환 될 수 있다. 국가 정책의 대상이 아닌 '채용 조건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다"고 강조했다.

기업지원연구자들이 중소기업에 파견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파견법에 대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 역시 문제다.

정부가 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파견법이 아닌 산업기술혁신촉진법에 파견의 근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파견법은 2년 이상 파견을 받고도 정규직으로 채용하지 않으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는 등 파견의 종류, 절차, 벌칙 등을 자세히 열거하고 있지만 산업기술혁신촉진법은 '파견할 수 있다'는 정도의 규정만 두고 있다.

장 대표는 "현재 기업지원연구원들은 파견법이 정한 비정규직 파견근로자 보호조치 등에서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상태다"며 "출연연의 무관심과 파견 기업의 부당요구 및 횡포로 기업지원연구원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다. 이는 출연연 내부 정규직의 중소기업 파견 지원자가 없는 주된 이유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산업기술연구회 측은 "부당해고를 한 적도 없고, 임금 인상 및 승진 등은 절차대로 진행해왔다"고 반박했다.

연구회 관계자는 "임금 인상의 경우 매년 공무원 인상률 만큼 올렸으며, 급여의 경우 출연금 평균보다 높은 상황이다"며 "또한 승진도 제도 시작한 지 3년 째인 올해부터 시행한 상태며, 정규직 전환 문제는 출연연마다 인사권자가 다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좋은 방향으로 논의 중에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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