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 앞세웠던 대표적 강성노조에서 경영·봉사활동 적극 참여
한주동 위원장 "조직 안정 최우선…과학기술계 노조도 변해야"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원장 김흥남) 노동조합(위원장 한주동)은 한때 정부도 고개를 흔들었던 정부출연연구기관 대표 강성노조였다. 투쟁과 다툼이 일상적이었다. 그랬던 ETRI 노조가 정책노조로의 탈바꿈을 선언하고 노사관계에 있어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른바 '노사, 함께하자'다. 이같은 움직임은 결국 과거처럼 수뇌부 비판에만 집중한다고 과학계나 연구기관이 갖고 있는 근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내부의 인식 전환에 따른 것이다. 차라리 스스로 기관 경영에 참여해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해결점을 찾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목소리가 연구 현장에서 힘을 얻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요구에 가장 먼저 나선 것이 ETRI 노조다. ETRI 노조의 철학은 조직의 안정화다. 조직이 안정돼야 노조원들이 일하기 편한 환경이 구축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했던 부분이 노사 관계에서의 변화였다. 무조건적인 주장보다는 합의를 통해 이뤄내는 변화가 더 큰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은 노사가 서로를 인정하게 하는 토대가 됐다. 서로의 인정은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냈다. 2005년도에 실시됐던 노사합의를 기반으로 한 인사제도 개선이 첫 번째 변화였다. 한주동 ETRI 노조위원장은 "직원들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했다"며 "내가 얼마만큼 일을 하면 성과를 받을 수 있다라는 점을 투명하게 공개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10년에는 노사 간 공동연구과제 수행을 제안한 바 있다. 공동연구과제 수행을 바탕으로 문제점을 도출하고 개선방향을 마련해 장기적으로 ETRI가 국가 IT기술 로드맵을 책임질 수 있는 연구기관으로 도약하자는 의미에서 제안됐지만, 연구원 측의 반대에 부딪쳐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1년 뒤 노조와 연구원은 실무 준비회의를 통해 공동연구과제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일정을 조율하는데 합의했다.

ETRI 노조는 공동연구과제를 통해 ETRI 연구사업별 현황 및 성과분석, 대외적 R&D 환경 변화 분석을 통해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도출하고, 연구역량 강화 및 연구성과 제고를 위한 사업기획 체계 개선 방안을 마련했다. 노사공동연구과제 주요 의제로 ▲연구사업 현황 및 환경분석 ▲창의형·융합형 사업기획체계 개선 ▲사업기획(전략) 전문역량 육성 ▲노사공동연구과제 성과 활용 등을 설정하고 세부 아이템을 실행해 나갔다. 과제 내용 중 보다 전문성과 객관성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외부 R&D 정책 전문기관을 이용해 진행했다.

임금 및 보상체계 개선의 경우 연봉제 전환 이후 왜곡된 임금 구조의 개선과 직원 사기진작 및 동기부여를 위한 다양한 보상 방안의 마련이 주된 목표였다. 이를 위해 연구수당의 공정성 및 타당성을 검증하고 다양한 비금전적 보상방안을 도출, 기타 임금피크제와 같은 임금 구조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다양하게 도출해냈다. 임금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연구수당에 대해서는 그 배분 방식과 관련해 공정성 문제와 개선 방안을 도출, 정부의 성과 연봉제에 대비해 전체 임금의 틀을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을 연구했다. 비금전적 보상 방안 아이디어로는 교육과 휴가, 동아리 활동 지원을 포함한 다양한 복지 방안이 제기됐으며 이들에 대한 실현 가능성과 보완 방안이 함께 논의됐다.

▲ETRI 노조에서 진행 중인 주간 소식지와 설문 결과 보고서, 원장 후보 공개 질의서 등. ⓒ2013 HelloDD.com

ETRI 노조가 가장 자신있어 하고 잘하는 부분은 연구원들의 의견 수렴 부분이다. 설문조사를 통해 연구원들이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에 필요한 제도 변화는 물론, 연구원의 경영 철학을 좌지우지하는 기관장의 경영 평가 등을 진행해 직원들이 ETRI의 경영 전반에 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한 위원장은 "원장 후보 3배수가 뽑히면 공개 질의서를 보낸다. ETRI 발전 방안에 관한 질의를 한 후 답을 보내오면 직원들에게 공개한다"며 "물론 이 같은 움직임이 원장 선임에 관여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답을 통해 여론이 환기되고, 현장 분위기를 정부 측에 내세울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질의 내용도 다양하다. ▲후보자의 강점과 대외환경 개선 비전 제시 ▲ETRI 위기 돌파구 마련 ▲ETRI 기능 재정립과 연구역량 및 위상강화 ▲ETRI 중심의 국가 IT 정책 거버넌스 개편 방안 ▲안정적인 연구비 비중 확대 ▲중대형 연구사업 발굴 방안 ▲ETRI 기관 운영 독립성 및 자율성 확보 ▲올바른 조직개편 및 중점 육성 방향 등 15개 정도의 질문이 매번 원장 선임 때마다 후보자에게 전달된다. 한 위원장은 "답변을 받으면 그대로 오픈하기 때문에 성실하게 답변을 해준다"며 "답변을 안해주면 그냥 안했다고 공개한다"고 설명했다. 기관장 평가는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부분이다. 학생들이 교수들의 강의를 평가하는 방식을 생각하면 된다. 평가는 3년 동안 2번 진행된다. 기관장의 경영 전반과 신규제도 시행에 대한 문항을 통해 기관장의 성적이 매겨진다. 한 위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평가때문에 임기 중 중도 사퇴한 기관장도 있을 정도다. 그는 "악의적으로 진행하는 게 아니다. 현장에 있는 직원들이 기관장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대한 부분을 노사가 서로 알고 발전적인 방향을 이끌어내자는 게 취지다"며 "이런 부분을 통해 정부의 정책을 제대로 비판하고 대안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된 노조의 방향은 국가 발전을 토대로 한 조직 안정화와 환경 구축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노조 차원에서의 불우이웃돕기도 활발히 진행 중에 있다. 한 위원장에 따르면 ETRI 노조는 IMF 한파가 닥친 지난 1998년부터 지금까지 13년간 불우이웃돕기금 2억3600만원을 집행해 어려운 이웃을 도와왔다. 그동안 ETRI 노조는 지역의 독거노인 지원에 5400만원, 실직·결손가정에 5400만원, 결식아동 및 청소년 장학금에 4400만원, 각종 재해복구 지원금으로 2100만원 등 연평균 1800여만원씩 지원해왔다. 3년전부터는 ETRI 노사가 공동으로 ETRI에서 개발한 골도전화기 1100대(5000만원 상당)를 지역의 난청어르신에게 전달하는 '사랑의 골도전화기 지원사업'을 전개해 새로운 지역사업의 전형을 만들기도 했다. 한 위원장은 "단순히 금전을 나누는 차원을 넘어서서 함께 삶을 나눔으로써, 힘든 시기에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노동조합으로 이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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