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태영 프라운호퍼 세라믹 응용기술 연구소 IKTS 박사

감기약을 복용하며 전투 하듯 업무 마무리했는데···
칭찬 대신 돌아온 건 직장 동료들의 싸늘한 시선
"퇴근시간, 병가 등 규정 준수하는 업무 스타일이
장기적으로 효율성을 높이는 방식일 수 있다는 교훈"

한태영 프라운호퍼 세라믹 응용기술 연구소 IKTS 박사는 독일 드레스덴 공과대학교 2014년 비파괴평가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007년도 10월부터 프라운호퍼 세라믹응용기술연구소에서 시니어 매니저로 그리고, 한국-프라운호퍼 과학기술협력센터(Korea-Fraunhofer Center for Science and Technology)와 한독 공급망 기술협력센터(Germany-Korea Technology Cooperation Center for Global Value Chain) 센터장으로 근무 중입니다. 이곳에서 한국과 독일 간 연구개발 사업과 기술이전 사업 등을 총괄적으로 기획하고 코디네이팅을 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 박사는 그간의 업무를 통해 한국과 독일 간 현저히 다른 연구 업무 문화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경험과 노하우를 쌓았습니다. 그는 이번 정기 기고를 통해 한국 과학기술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직접 체험한 독일의 생생한 연구 현장의 에피소드와 고찰을 공유할 예정입니다. 앞으로 다양한 연구소 관련  테마에 대해서 연재할 계획입니다.
 
한태영 프라운호퍼 세라믹 응용기술 연구소 IKTS 박사. [사진=한태영 박사 제공]
필자는 2007년 10월부터 독일의 공공연구기관 중에 한 곳인 프라운호퍼 연구소에서 재직 중이다. 어느 덧 17년차가 되어서 연구소 내에서 필자보다 고참인 동료보다 신참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그동안 수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었으며, 그 중의 일부를 공유하여 한국에서 독일과 연구 협력을 계획하고 있거나 진행하고 있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독일로 오기 전에 한국에서 중소기업과 대기업에서 각각 2년과 7년 8개월 간 근무를 했었기에 필자는 한국식 업무방식에 나름대로 훈련이 잘 되어 있었던 상태였다. 직장 생활 중에 박사학위 진학에 목표를 세웠었고, 원했던 미국 대학교로 입학 허가를 받았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운명이 필자에게 일어났었고, 독일어를 전혀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행을 포기하며 독일 연구소로 오게 되었다. 이직이 결정될 시기에 큰 아이가 만 2살이었고 둘째가 출산을 두달 여 남겨 두었는데, 가족 회의를 통해서 우선 필자만 혼자서 독일로 넘어가고 둘째가 백일 정도 지나면 독일로 함께 이주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연구소에서 업무는 6개월 간의 '시험채용 기간직(독일어:Probe Zeit)'이라는 계약 형태로 시작되었다. 노동법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독일에서 이 계약은 표준적으로 채택되는 형태인데, 6개월 간 업무를 해본 후에 고용주와 피고용인 쌍방 간 합의에 따라서 정규 계약으로 넘어갈 수 있는 안전장치에 해당된다.

연구소는 구 동독 지역인 작센주 드레스덴시에 소재해 있다. 다시 말해서, 독일 중에서도 보수성이 강하고 외국인에 대한 보이지 않는 벽이 구 서독 지역보다 매우 높은 곳이다. 맡겨진 임무는 5명의 실원으로 구성된 실험실을 관리하는 것이었고, 전원이 독일인이었다. (현재 그중 세 명은 퇴직을 하였고, 한 명은 이직을 했고, 남은 한 명과 필자만 남아 있다) 

문화적으로 큰 어색함을 떨칠 수는 없었지만 필자는 연구소 내 동료들과 빠른 시간 내에 친밀해지기를 바랬고 그들의 업무 문화 속에 흡수되어 가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바쁜 와중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전과 오후 시간에 짧게 갖는 티타임에도 참석을 하고, 회사 자율식당에도 함께 가서 정말 맛없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연기도 많이 했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하니, 시간이 지나면서 친해지는 동료가 늘어가기 시작했고, 필자의 독일 직장 생활은 그렇게 순탄하게 나아가는듯 보였었다.

가족과 지인이 없는 6개월 간 대부분의 시간을 필자는 한국 방식으로, 다시 말해서 업무의 목적이 주어진 기한 내에 무조건 마쳐져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을 갖고서 모든 에너지를 업무에 쏟아 부었다. 이 기간 중에 심하게 감기에 걸린 적도 있었지만, 한국에서 준비해 온 감기약을 복용하며 출근했었고, 당시에 필자에게 병가란 현실과 동떨어진 인사제도에 불과했었다. 시계추처럼 출퇴근하고 주어진 인사제도 내에서 부담감없이 일하는 동료들과는 다르게, 가장 늦게 퇴근하고 주말(필자의 연구소는 주말과 휴일에는 연구소에서 근무를 하려면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중에도 집에서 일을 했었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고 필자는 연구소장에게 그간 업무한 내용을 정리한 보고서를 올렸다. 연구소장의 평가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고, 예상한대로 정규직으로 전환 받게 되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가족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 3주간의 휴가를 내었다.

마침내 연구소로 복귀했다. 평상 시와 다름없이 오전과 오후 시간 티타임에 찾아가니 필자를 대하는 동료들의 태도가 매우 차가웠고 심지어 어떤 동료들은 필자를 피하기까지 했다. 분위기는 몇일이 지나도 변함이 없었고, 필자는 가장 친한 동료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것인지 사정사정하며 물어봤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연구소장이 주관하는 각종 회의자리에서 소장이 필자의 업무 보고서를 언급하면서 "더도말고 덜도말고 이정도로만 하면 된다"고 언급하였는데, 이것을 좋게 받아들일 동료는 연구소 내에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친했던 동료들이 냉정한 어조로 필자에게 말한 한 문장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이룬 성스러운 노동의 현장을 너라는 한 사람이 무분별하게 무너트리려 한다." 

상황을 돌리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음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동료들에게는 직장의 일과 가정사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고 가족과의 약속이나 계획이 직장 업무로 인해서 방해 받는 것을 허용할 수 없는 사회적 합의가 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필자의 업무는 철저히 독일식으로 변화되었다. 어색했지만 그들과 비슷하게 인사제도 내에서 업무를 하는데 집중하였다. 비록 목표한 당일 업무 분량이 남았어도, 필요하면 일감을 집으로 가져갈지라도 과감하게 퇴근을 하였다. 또한 아프면 병원에서 병가진단서를 받아서 출근을 하지 않고 동료들이 전수해준대로 집에서 회복하는데 집중하였다.

하지만, 동료들에게 신뢰를 주고 관계를 회복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안타깝게도 일부 나이가 많았던 동료들은 그 앙금을 다 회복하지 못하고 퇴직을 했다.

독일식의 업무 방식은 필자에게 업무의 시급성 기준과 그에 따른 계획 수립 방식을 배우게 해주었다. 이러한 변화는 곧 업무 스트레스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게끔 해줘 일의 효율성을 높이는 원인이 되었다. 모든 사안을 바로바로 처리하는 한국만의 업무 방식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공공의 적으로 화려하게 신고식을 치룬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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