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국비유학생 1호…원자력硏 설립·첫 원자로 건설 주도
그를 만난 李대통령 첫마디 "우리도 원자폭탄 만들수 있겠나"

"자네가 원자력을 공부했다지? 우리나라도 원자폭탄을 만들수 있겠나?" 6·25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7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은 한 젊은 과학자를 불러 우리나라가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지를 물었다.

원자력 불모지였던 우리나라는 대통령의 이 같은 질문이 있었던 다음해인 1958년 원자력법을 제정하고, 1959년에는 현재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전신인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다.

한국 원자력 발전의 초석을 마련한 윤세원 박사(전 선문대 총장)가 16일 오후 10시 폐렴으로 강동경희한방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91세. 고인은 원자력 국비 유학생 1호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조교수로 일하다 1956년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ANL) 부설 국제원자력학교에서 1년간 유학했다. 이 학교는 냉전 시대 소련이 드브나원자력연구소에서 공산권 과학기술자들을 훈련시킨데 맞서 미국이 세운 교육기관이다.

'핵의 평화적 이용'을 기치로 비공산권 국가 과학자들에게 원자로 기술을 가르쳤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자력 인재 양성을 위해 이곳에 여러 명의 과학자들을 파견했는데 고인이 1기생이다. 1957년 1월 미국에서 돌아와 연구 중이던 그를 찾은 사람은 이 대통령이었다.

원자력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이 대통령은 그해 말 윤 전 총장을 당시 문교부 초대 원자력과장으로 발탁했다. 윤 전 총장은 1958년 원자력법 제정, 1959년 원자력원과 한국원자력연구원 전신인 원자력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

연구용 원자로 선정, 구매, 예산 확보 등도 도맡았다. 원자력법 통과를 설득하다 활동비가 떨어지자 서울 서대문의 집과 경기도 용인의 고향 땅까지 팔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한국원자력연구소 원자로부장이던 1959년, 고인과 이승만 대통령의 일화도 유명하다. 이 대통령이 "우리나라도 원자탄을 만들 수 있느냐. 연구소를 지을 장소는 진해도 좋고 더 나은 곳이 필요하면 찾아보라"고 했다는 사실이 윤 박사의 비망록을 통해 알려졌다.

원자력과장 시절 원자력 유학생 비용 지원을 놓고 경무대 비서실과 벌인 논쟁은 지금도 회자된다. 미국 10개월 과정 유학생 한 명에 들어가는 비용이 총 6000달러에 달했으나 당시 달러 부족에 시달렸던 비서실은 윤 전 총장의 기안을 매번 거부했다. 그러자 그는 비서실을 찾아가 "원자력 우수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유학"이라고 설득했고 그 뒤 4년간 8차례에 걸쳐 150여명의 인재가 미국 원자력 유학길에 올랐다.

고인은 1959년 한국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인 트리가마크Ⅱ를 미국에서 도입하는데도 앞장섰다. 원자력계 한 원로는 "윤 박사는 '화력, 수력 발전으론 전기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원자력이 대안'이라 말하곤 했다"며 "물리학 전공자들이 자기 분야밖에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윤 박사는 동위원소를 의료·공학 분야에 활용하는 계획을 세우는 데도 탁월했다"고 전했다. 한편 고인은 1972년 경희대에서 이학박사를 받은 뒤 한국물리학회 회장, 경희대 부총장,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80년대 후반 통일교 창시자인 고(故) 문선명 총재를 만나 선문대 부지 매입, 대학 인허가 등 설립을 주도했으며 1, 2대 총장을 맡았다.

국민훈장 동백장과 무궁화장 등을 받았으며 1991년부터 물리학 분야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유족으로는 자녀 일선(LIG넥스원 연구위원), 호선(호선공간도예 원장), 문선(참좋은교회 목사), 관선(아마텍 대표), 혜선(YWCA 이사), 기선 씨(경희대 교수)가 있다. 이강현 전 동아대 교수, 오준호 KAIST 대외부총장, 최유창 LIG넥스원 이사, 이중정 연세대 교수 등이 사위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02-3010-2631)에 마련됐다. 발인은 20일 오전 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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