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KAIST 연구실 앞에서 노제…제자와 동료 등 100여 명 참석

"이 겨레로 하여금 과학입국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게." 이 세상을 떠나는 마당에도 과학입국이란 명예인지 멍에(?)인지 모를 말을 듣고 가는 사람이 있다. 살아생전에도 연구개발 외길을 걷고 많은 인재를 양성하다가 스스로 삶과 이별한 고 박태관 KAIST 교수 이야기이다.

12일 오전 6시. KAIST 생명공학과 앞 잔디밭.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아직은 다소 차가운 봄기운을 헤치고 분향소 앞으로 모여들었다. 박 교수의 노제를 지내기 위한 것. 모인 사람들은 동료 교수와 제자 등 모두 100여 명.

노제는 고인의 약력 소개로 시작해 같은 생명공학과 조철오 교수와 제자 대표 이수현 박사의 조사로 이어졌다. 조사 가운데 고인의 과학자로서의 성실함과 제자들에 대한 보살핌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다.

노제의 마지막 순서로 영정이 평소 사용하던 실험실과 교수실을 들러 작별을 하는 과정에서 일부 제자들은 발을 구르며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실험실에는 학생들이 각종 웹사이트와 DB에 접근할 수 있도록 박 교수 명의의 아이디와 패스워드가 화이트보드에 적혀있고, 박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는 등 그의 흔적이 그대로 였다.

전날 대전시 을지대학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많은 교수들이 참석해 애도를 표했다. A 교수는 "박 교수는 매우 호방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하며 "단순 연구비 관련이라기 보다는 최근 학내 사태에 대한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고 갔다"고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B 교수는 "이 사회가 박교수 같은 사람을 키워내려면 또 얼마나 많은 투자가 있어야 할지 모른다"며 "세계적 석학을 죽음으로 몰고간 과학 행정과 지원 시스템의 개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음은 이날 노제에서 낭독된 조사 전문.
 

◆ 교수 대표 조철오 교수의 조사

나보다 연부역강한 그대가 언젠가 내 무덤에 술 한 잔 따라 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오호 통재라, 아깝고 불쌍하고 그리고 슬프다. 내가 그대의 마지막 가는 길에 눈물을 뿌리다니 박 교수, 여기는 당신의 꿈과 정력을 불태우던 실험실 앞. 그대를 사랑했던 가족 친지 동료 학생 다 모였다. 왜 아무 말이 없는게야? 그 재치, 그리고 뇌쇄적 미소는 다 어디에 두고 훌쩍 가 버린거야? 돌아가신 박태관 교수는 생체조직공학, 약물전달학, 유전자치료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쌓아온 세계적 석학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를 읽은 슬픔 속에서도 그가 남긴 훈훈한 인간의 향기, 면도날 같은 논리, 복잡한 개념을 쉽게 조명할 줄 아는 탁월한 슬기를 회상해 보며 우리 잠시 그를 잃었다는 슬픔을 잊게 됩니다. 박 교수! 그렇게 힘들었나? 그새 얼마나 많은 번민의 날을 지새웠소. 미안하다 그러나 그대가 생각하고 또 생각한 그 길을 누가 뭐라 하겠나. 잘가게 박 교수. 오늘은 날도 화창하네. 그대는 가도 현숙한 아내와 총명한 아들 딸이 있네. 우리도 힘 닿는대로 그들을 돕겠네. 또 그대의 뒤에는 그대의 학문을 잇겠다는 후학이 있네. 그들의 행운을 빌어주게. 나그네가 여인숙을 떠나듯이 인생을 하직한다고 한 키케로의 말과 같이 사흘 전 인생을 하직한 그대여! 그대의 그 총명 그 정력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고 카이스트 앞길을 열어주게. 그리하여 이 겨레로 하여금 과학입국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게. 잘가게 박태관 박사!!!

◆ 제자 대표 이수현 박사의 조사

박태관 교수님은 KAIST의 훌륭한 과학자이자 교육자이셨습니다. 박태관 교수님이 스승으로서 얼마나 훌륭하셨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학교도, 사회도, 신문기사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그 가르침을 받은 저희 학생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학생은 박태관 교수님께서 자신을 조각해 주셨다고, 더 나은 사람으로 완성시켜 주셨다 하였습니다. 다른 학생은 자신이 교수님의 제자였던 것을 평생 자랑스러워 하겠다 하였습니다. 또 다른 학생은 교수님께서 학문적 스승의 모습뿐 아니라 가슴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주셨다 하였습니다. 박태관 교수님을 자신의 또 한 분의 아버지로 모시고 싶다고 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한편 교수님의 학문적, 인간적, 사회적인 면모 모두가 자신의 귀감이 되었기에 교수님을 인생의 모델로 평생 기억할 것이라 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훌륭한 분을 모시고 학문을 배울 수 있어서 진심으로 행복했습니다. 우리가 박태관 교수님으로부터 지도받은 것은 연구가 아니라 인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에게 있어서 박태관 교수님은 열정을 가진 과학자인 동시에 인간애를 아는 교육자였기 때문입니다. 학문의 열정이란 무엇이고 몰두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것인지 몸소 보여주셨고, 지금은 눈물이 나도록 그리운, 교수님의 인정과 의리로 부족한 우리를 품어주셨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선생님께 받기만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아픔을 더 깊이 이해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오해와 모순이 가득 찬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위로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박태관 교수님, 오늘 이렇게 교수님을 보내지만 교수님은 저희들 마음속에 영원한 멘토로 남아 저희를 이끌어 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교수님을 여전히 최고라고 생각하는 50여명의 제자를 대표하여 이수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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