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과학자들 감회에 젖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
후배 과학자들 "투철한 국가관과 사명감에 감동"

"후배 과학인들이 한필순 전 소장님을 이처럼 존경하고 따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의 사심없는 애국심과 일에 대한 사명감, 리더십이 후배들에게 오래도록 귀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소장님이 계셨기에 지난해 12월 UAE에 원전을 수출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자립이 가능했습니다. 당시 한국형 원전은 생각할 수도 없었는데 할 수 있다는 의지로 강하게 추진하셨고 후배들도 모두 같은 마음으로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미쳤지요."

26일 오전 10시 30분. 한국원자력연구원에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후배 과학자들과 원자력연이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자립의 대부 한필순 전 소장의 강연을 마련했다. 늦었지만 원전기술 자립에 기여한 그의 노고를 위로하고 중국에서의 귀국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한필순 전 소장을 국내에서는 한동안 만날 수 없었다.

원자력 대부였던 그가 국내 다시 돌아온건 지난 7월말이다. 그동안 중국에서 음식물재처리 관련 사업을 진행했었다. 그러나 평생 원자력에만 몰두했고 올해로 만 77세인 그가 사업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까. 여러가지 어려움이 한꺼번에 닥쳤다. 그렇지만 자존심 강한 그는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결국 국내로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지난 1월 원전 수출 축하 자리에도 마땅히 있어야 할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후배 과학자들이 그의 근황을 걱정하며 귀국을 위해 힘을 모았다. 정부 관계자에게도 한필순 전 소장의 귀국 당연성을 절절한 심정으로 전했다. 정부 관계자는 원로 과학자들의 감동어린 마음에 바로 한 전 소장의 귀국을 위해 움직였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한 전 소장은 중국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지금은 한국의 보금자리에서 원자력 후배들을 위한 새로운 활동을 모색 중이다.

◆"원자력은 국가의 미래, 대통령이 직접 관심갖고 진행해야"

삼삼오오 행사장을 찾은 원로 과학자들은 한 전소장과 뜨거운 악수와 포옹을 하며 안부를 물었다. 한 전 소장은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당시를 회상했다. 현직 후배 과학자들도 그에게 인사를 하며 존경을 표했다. 한 전 소장은 77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한국의 원자력 기술 자립의 노력'을 주제로 강연을 시작한 그는 "원자력은 국가안보와 직결한다"면서 원자력 기술 자립의 이유와 대통령별 원자력기술 자립에 대한 관심과 기여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원자력 기술 자립의 시작은 이승만 대통령때부터다. 이 대통령이 문교부를 신설하고 그 산하에 원자력과를 두고 원자력원을 개원했다. 또 우수 인력을 양성하고 제너럴 오토믹사의 트리가 마크를 도입하면서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 자립의 역사가 태동하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금의 원자력연구소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을 설립해 미국으로부터 핵무기 개발 의혹을 받으며 제재를 받기도 했다.

한 전 소장은 박 대통령과의 일화로 "개인적으로 미국 대학의 조교수 초청을 받았다. 가고 싶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무기를 만드는데 필요하다고 해 꿈을 접었다"면서 당시 개발한 무기들을 언급했다. 그는 국가를 위해 자신의 꿈도 바로 접을 수 있을 정도로 애국자였던 것. 한 전 소장은 "최근 박정희 대통령 관련 행사에 참가했는데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원폭제조를 주제로한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내용은 전혀 사실과 다른데 이를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걱정했다. 그는 또 정부관계자 조차도 책 내용을 사실로 알고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우려했다.

1982년부터 원자력연과 인연을 맺은 그는 전두환 대통령 때를 원자력기술 자립이 확고해진 시기로 들었다. 한 전소장에 따르면 이 시기는 미국과 매우 미묘한 관계가 지속됐다. 미국은 전두환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원자력연구소 폐쇄와 국방과학연구소 인원을 대폭 축소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외견상으로는 원자력연구소를 폐쇄했지만 담당 장관에게 지시해 원자력연구소 회생전략을 세우도록했다. 그래서 나온 전략이 이름을 바꿔 유지하기로 한 것. 원자력연구소 대신 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또 핵연료개발 사장으로 그를 임명하고 직접 할 수 있도록 지시하며 힘을 실어줬다.

한 전 소장은 "원자력은 국가의 안보와 직결된다. 대통령의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면서 "전두환 대통령이 5공화국의 비리로 많은 지탄을 받고 있지만 그가 원자력 발전에 기여한 점은 높이 평가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노태우 대통령 역시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당시 미국은 비핵화를 선언하며 한국에 우라늄 농축기술, 재처리기술, 중수기술, 원자력기술의 적대 국가 수출을 금지했다. 노 대통령은 그와의 단독면담을 요청했다. 대통령은 그에게 한국의 원자력이 가야할 방향에 대해 질문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핵무기 대신 평화적 기술로 접근해야함을 강조했다. 평화적인 원자력 기술에 국가가 총력을 기울이면 원자력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또 원자력 발전기술안에 모든 핵심기술이 다들어있다고 말하면서 원자력 기술 자립의 필요성을 강력히 피력했다. 대통령은 그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원로 과학자들, 한 전 소장의 리더십을 그리워하다

▲한 전 소장이 당시 고락을 함께 했던 과학자들의 이름을 불렀고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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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전 소장은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를 위해 3가지를 강조했다. 설계, 평가, 자본까지 100% 우리 기술로 해야한다고 . 당시 여건은 인력, 예산, 시간 모든게 부족한 것 투성이였다. 그래서 그가 내놓은 방안이 '공동설계(조인트 디자인)다. 도저히 불가능 할 것 같은 상황속에서 그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독일의 가베우 등을 경쟁시켰고 당시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웨스팅하우스 대신 가베우를 선정했다. 그러나 국내 전문가는 거의 전무한 상태. 그는 해외 거주 과학자를 대거 유치했다.

한 전 소장은 이런 과정을 소개하면서 당시 참여했던 과학자들의 이름을 한명 한명 불렀다.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연구에 몰두했던 그들. 세월이 흘러 겉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뜨거웠다. 백발이 성성한 원로 과학자들이 그의 호명에 자리에서 말없이 일어났다. 한 전 소장, 원로 과학자들 모두 감격의 침묵이 흘렀고 참석자들은 그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냈다. 한필순 전 소장은 지금은 고인이 된 김성진 장관과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와의 각별했던 인연에 가슴이 뭉클해졌는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은 한 전 소장의 얼굴은 강연 내내 빛이났다. 목소리도 시종일관 힘이 넘쳤다. 그는 원자력연에서의 강연을 맺으면서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지금은 원전 기술을 수출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앞으로가 중요하다. 지금은 기술 자립을 졸업한 것 같은 분위기다"라고 지적하면서 "난 사실 원자력에 아는게 없었지만 애국심으로 밀고 나갔다. 여러분들은 많은 경험이 있다. 문제에 대해 바른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그는 "인구와 에너지 사용 증가로 화석에너지는 한계가 있고 지구 온난화 등의 문제를 배제할 수 없다. 원자력은 이산화탄소 배출이 없는 깨끗한 에너지원으로 우리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다"고 강조하면서 "원자력은 국가에 많은 기여를 한다. 원자력이 없다면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다"고 피력했다. 한 전 소장과 원로 과학자들의 만남은 점심 시간을 넘어서도 계속됐다. 대덕클럽 사무실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이야기 꽃을 피우느라 시간이 가는 것도 잊은 듯 했다. 이들이 한 전 소장을 이처럼 따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의 사심없는 애국심과 열정적인 리더십이 그들을 매료시켰기 때문이다.

원로 과학자들은 "원자력 기술 자립은 당시 천억 과제로 우리나라 최대 과제였다. 통치권자가 직접 나섰고 이를 이끌 진정한 리더가 있었기에 그렇게 큰 과제가 성공할 수 있었다"면서 "한 소장님의 소명의식과 국가관에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고 사심없이 일에 몰두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편 한필순 전 소장은 오후 4시 30분 KAIST의 학생들에게도 원자력 기술 자립의 중요성에 대해 강연했다. 70이 훌쩍 넘은 그는 여전히 열정적인 모습으로 학생들과의 시간을 이끌어 나갔다. 학생들 역시 원자력 기술 자립 주인공의 강연에 관심을 보이며 집중했다.

▲한 전 소장은 26일 KAIST 학생들에게도 원자력기술 자립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2010 HelloDD.com

▲한 전 소장과 원로 과학자들은 이야기 꽃을 피우느라 시간이 가는 것도 잊었다. ⓒ2010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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