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착취재②]한국 과학자들 열성에 미·독 엔지니어 감동

한필순 전 소장과 기자일행의 첫날 만남은 저녁 늦은 시간에야 끝났다. 그는 다음날 오전 7시에 다시 만날것을 기약하면서 잠시의 헤어짐도 아쉬운듯 발걸음을 옮겼다. 눈발이 몹시도 거센 어두운 거리를 홀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이튿날 아침, 기자일행을 방문한 그는 "잘 잤느냐"는 인사와 함께 우리의 아침을 챙겨주겠다며 앞장선다. 그리곤 어제에 이어 원자력 자립을 위한 과학자들의 눈부신 활동에 대해 술술 풀어냈다.
 

▲더 나은 조건 포기하고 원자력연구소를 선택한 원전기술 자립주역들<사진 왼쪽부터> 김병구 박사, 김시환 박사, 박종균 박사, 이병령 박사, 장문희 박사. ⓒ2010HelloDD.com

원자력 시장 냉전기와 맞아 떨어진 '공동설계(조인트디자인)'

"대통령이 ADD를 방문했다가 에너지연구소(원자력연구소)에 15분간 들릴예정이니 보고서를 준비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소장 대신 내가 보고를 하기로 했는데 고민이 많았죠. 15분안에 설명해서 원자력연구소의 필요성을 대통령에게 알려야 했으니까요."

한필순 전 소장은 관통자개발과 중수로 핵연료 성공 이 두가지를 설명했다. 대통령이 중수로 핵연료 사업에 적극 관심을 나타냈고 시간은 15분을 훌쩍 넘겼다. 설명을 듣고 난 대통령은 한전에서 맡고 있던 경수로 핵연료 개발까지 원자력연구소에서 맡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모든 원자력 연구가 한 곳으로 집중되게 된 결정적 순간이다.

당초 한전의 경수로 핵연료 개발 계획서에는 외국인이 설계하고 외국 자본이 50%이상 들어와야 하며 평가도 외국인이 해야한다는 조건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핵연료 사장까지 겸하게 된 한 소장은 설계, 자본, 평가 모든걸 우리힘으로 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원자력 연구 인력, 비용, 시간 모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경수로 핵연료 설계를 위해서는 최소한 100명이상이 필요한데 우리나라 연구진은 국내·외를 포함해도 2~3명뿐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그는 3일간의 장고 끝에 '공동설계(Joint Design)'안을 내놨다.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에 참여할 외국 기업들의 '공동설계'에 대한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그가 제안한 공동 설계의 의미는 '설계기술은 설계과정에서 배우고 곧바로 입찰 회사 책임하에 공동으로 설계에 착수한다. 하지만 설계 훈련비는 주지 않는다'는 것. 외국 회사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자칫 한국에 핵심기술을 몽땅 넘겨줘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79년 미국 스리마일 섬에서 일어난 원전사고로 원자력 시장은 침체기에 빠져있었습니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원자력 선진국들도 판로가 막혀 한국의 원전 사업을 절대 간과 할 수 없는 시기였죠.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요." 84년 한국의 경수로 핵연료 사업 입찰에 응한 회사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컴버스천엔지니어링, 엑슨 뉴클리어, 독일의 카베유, 프랑스의 프라쥐마 등 5개 회사. 국내 평가위원들의 평가결과 기술이전, 기술수준, 경제성을 고려해 독일의 카베유로 결정됐다. 세계 1위 기술을 자랑하던 웨스팅하우스가 탈락하면서 그를 모함하는 투서가 청와대에 들어가기도 했다.

더 좋은 조건 마다하고 달려와 준 과학자들
 

▲독일 카베우사와 경수로 핵연료 공동설계를 위한 기술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2010 HelloDD.com

"경수로 핵연료 설계 사업을 위해 비용도 문제였지만 인력부족이 가장 컸습니다. 그때 미국의 컴버스천엔지니어링 사에서 설계를 하던 김시환 박사가 적임자였는데 다른 곳에서도 더 좋은 조건으로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우린 그런 조건을 내세울 수 없는 상황이라 김 박사에게 매일 전화하며 그의 애국심에 호소했습니다.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을 위해 꼭 와줘야 한다고."

결국 김시환 박사는 더 좋은 조건들을 마다하고 원자력연구소로 오겠다고 답변했다. 그가 오면서 장문희 박사 등 10여명도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 한 전 소장은 김시환 박사와 같이 근무하던 박종균 박사에게도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며 많은 이들이 같은 마음이었다고 회상했다.

"박 박사가 잠시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연구소에 들렀더라고요. 그에게 미션을 줬습니다. 미국의 원자력 연구 인력, 비용, 현재 상황등을 자료로 정리해 달라고 했는데 박 박사가 잠도 안자고 풀어줬죠. 그래서 연구인력, 훈련비 등의 개념을 세울 수 있게 됐습니다."

'85년 8월초 김시환 박사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진 30여명이 공동설계를 위해 카베유가 있는 독일 에어랑겐으로 떠났다. 이들중 3~4명만을 제외하고는 핵연료를 설계한 경험이 없었지만 대부분 미국 유명대학의 박사급으로 무장한 소수정예의 인원이었다. 한 전 소장은 그들의 열정, 애국심을 믿었다.

"카베유 사 직원들은 오후 5시면 퇴근했고 서로 의사소통이 안돼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우리 과학자들은 카베유 직원들이 퇴근한 이후 낮에 배운 설계기술을 복습하느라 밤 늦도록 회사에 남아있는 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문이 잠겨 담장을 넘어가다 경비원에게 들켜 주의를 받기도 했고요."

이런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독일 엔지니어들도 깜작 놀라만큼 빠른 시간에 기술을 익혔다. 더 나아가 'HOW'를 넘어 'WHY'의 개념까지 정리하면서 독일의 과학자들이 오히려 배워야겠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必 설계기술 자립' 만세 삼창, 그만둘 각오로 CE사에 항의

한필순 전 소장이 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가장 주력한 것은 한국형 경수로 개발. 모든 것이 부족한 당시 상황에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의 원전기술 자립의지는 확고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한 소장의 간곡한 설득으로 박정기 한전 사장도 한국형 경수로 계통설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연구 인력, 자금 등 모든게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소장은 이번에도 '공동설계'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몇몇 회사가 응찰했으나 미국의 컨버스천엔지니어링(CE)로 결정됐다.

드디어 '86년 12월 14일. 한국형 원자로 계통설계를 위한 1진 44명이 사업책임자 김병구 박사, 인솔책임자 이병령 박사를 중심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 CE사가 있는 미국 코넷티컷 주 윈저 시로 출발하는 날이다.

한필순 전 소장은 김병구 박사를 일으켜 세운 뒤 '必 설계기술 자립'이라고 쓴 액자를 들고 연구원들에게 기술 독립을 하겠다는 정신으로 만세삼창을 외쳤다. 김병구 박사는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련없이 포기하고 한국행을 결정했었다.

"한국형 경수로 탄생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으니 실패하면 아예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기면 식민지가 되듯이 우리가 원자력 기술 자립을 하지 못하면 밤낮 외국 기술에 의존하는 식민지가 됩니다. 우리가 기술독립국이 되기 위해서는 기필코 이번에 원자로 계통설계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만세삼창을 하자고 했더니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연구원들이 함께 만세를 외치면서 가슴이 찡해졌는지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한국형 원자로가 성공하느냐 못하느냐가 이들에게 달려 있었기때문에 모두들 책임감이 막중했죠. 죽을 각오로 반드시 성공해야 했으니까요."

이들은 미국 CE사에 도착해 밤낮없이 계통설계 기술을 익히기에 전념했다. 그러나 CE사는 처음 약속과 달리 이들에게 핵심 업무 대신 허드렛일만 맡겼다.

"고민끝에 이병령 박사가 부인에게 전화를 해 상의를 했답니다. 지금 CE사가 핵심업무는 전혀 우리에게 맡기지 않아 내가 항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잘못되면 연구소를 그만둬야 할 수도 있다고. 그랬더니 이 박사 부인께서 '걱정하지 말고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하라'고 말했고 이 박사가 그만 둘 각오로 CE에 강력히 항의를 했습니다."

CE는 이 박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후 핵심기술 전수는 물론 우리 연구진이 중요 업무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했다. 과학자들은 'Know How'를 넘어 'Know Why'까지 알아내기 위해 CE직원이 모두 퇴근한 늦은 밤까지도 사무실을 떠날 줄 몰랐다. 또 CE의 엔지니어 중 자신의 설계 파트너를 자주 집으로 초대해 개인적 친밀관계를 만들어 자료를 얻기도 했다. 이런 노력으로 3년만에 한국형 원자로 계통설계가 완성됐다.
 

▲미국 컴버스천엔지니어링 사로 떠나기전 한 소장과 과학자들은 '必설계기술 자립'을 위해 만세삼창을 부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2010 HelloDD.com

원자력 자립 위해 자리 내놓은 장관

"원전기술 자립이 있기까지 과학자들의 역할도 컸지만 당시 과기처와 동자부 등 관련 장관,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정오 과기처 장관, 서봉수 동자부 장관 또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김성진 과기처 장관은 원자력에 관한 일은 무조건 지원해 주었습니다."

故 김성진 장관은 육사와 서울대 졸업 후 사관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또 미국 일리노이 대학과 플로리다 대학에서 물리학과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국방과학연구소 소장과 과기처 장관을 지냈던 인물.

"5공 당시 미국과 불편한 관계였는데 김 장관이 한·미관계 정상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미국의 압력으로 국방과학연구소 인력 감원시 악역을 맡아 안좋은 소리를 많이 듣기도 했지만 그분의 마음을 저는 압니다."

김 장관은 제6대 과기처 장관으로 부임하면서 한 소장의 원자력 기술 자립 활동에 대해 누구보다 적극 지원했다. 85년경 미국은 우리나라에 핵 재처리 금지를 요구했다. 우리는 미국과의 미묘한 관계로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한 소장은 김 장관에게 혼합핵연료의 필요성에 대해 꼼꼼하게 설명했다.

"혼합핵연료(MOX)는 경수로 핵연료로 재사용되므로 재처리는 꼭 해야 한다고 설명했더니 장관께서 '알았다'며 더이상 아무말 안하셨습니다. 원자력 기술 자립의 필요성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에게 내리막 길은 반드시 있으니 잘 하길 바란다는 조언을 하셨죠. 그리고 미국측 관계자와의 만남을 취소하고 대신 장관 자리를 사임했습니다. 형님같은 분이었는데…."

한 전 소장은 눈자위가 붉어지며 말끝을 흐렸다. 한필순 소장을 에너지연구소 대덕분소로 발령낸 이정오 5대 과기처 장관.

처음에는 국제적 정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원자력연구소 폐쇄를 지시했었다. 그러나 그는 한 소장을 대덕으로 발령낸 후 아무도 모르게 대전을 자주 찾았다. 원자력연구소를 다시 세우기 위해 한 소장과 단둘이 만나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입안했다. 그리고 그 계획서를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유도했다.

이 외에도 한 소장은 경제비서관과 동력자원부 장관을 지낸 이봉서 전 장관도 원자력기술자립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며 안부를 부탁했다. 중국 위해 = 대덕넷 길애경 기자(kilpaper@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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