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할 수 있는 거 알지!"…영원한 ADD인 故 김동수 본부장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육상무기 분야 최고 권위자

우리나라 육상무기 분야 최고 권위자로 세계적 최고 수준의 명품인 K-9를 탄생 시킨 주역 故 김동수 본부장. ADD(국방과학연구소) 제 5본부장과 국방녹색기술 연구기획 위원장을 맡아 지상, 무인화 기술 연구개발, 국방과학 연구소 선진화 수립 등 중책을 수행하던 중 누적된 과로로 지난 8월 23일 55세의 나이로 순직, 가족과 지인, 동료와 선·후배를 안타깝게 했다.

순직 직전까지 국방과학연구소의 열악한 연구기반 개선을 위해 휴일도 반납한 채 선진화 방안을 마련하는 등 과학기술로 자주국방을 실현하겠다던 고인의 의지가 알려지면서 주위가 숙연해졌다. 열정적인 업무추진과 도전의식, 솔선수범 등 자신에게는 강하면서 후배 동료들에게는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 영원한 ADD인으로 기억되는 숭고했던 그의 삶을 재조명 해 보았다.

'작은 탱크'로 불렸던 운동 마니아

"김 본부장과는 춘천고등학교 1학년 4반 13번, 14번으로 처음 만나 우정이 시작됐습니다. 운동을 좋아해 주말마다 축구를 했는데 친구는 작은 키에도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로 운동장을 누벼 '작은탱크'라는 별명을 지어줬습니다."

故 김동수 본부장과 춘천고등학교 동기동창인 김용선 연구원은 김 본부장을 회상하면서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김 본부장과 까까머리 시절을 함께한 그는 "밤새워 미래를 이야기 하고 영화 '닥터 지바고'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아름다운 시간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문학가를 꿈 꾸었던 친구는 감성이 풍부했던 것 같다"고 기억했다.

태릉골 육군사관학교 생도시절에는 키가 작은 신체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육사 축구선수로 발탁됐다. 김 본부장의 축구 실력은 이곳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서 축구와 럭비분야에서 육사가 단독 우승하는데 크게 기여함은 물론 현재는 유명 감독이 된 당시 차범근 선수와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김 본부장의 뛰어난 철벽 수비로 곤란을 겪은 차범근 선수가 "김 생도가 있는 곳으로는 절대 공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것. 김 본부장은 지칠줄 모르는 체력으로 상대방의 약점을 활용해 두뇌플레이를 펼쳐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학과 공부에도 뛰어났던 그는 생도시절 학과 최우수자에게 주어지는 별 휘장을 수여했으며 졸업때는 투철한 충성심과 우수한 학과 성적으로 강재구 소령의 살신성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재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생도 시절의 故 김동수 본부장. ⓒ2009 HelloDD.com

항상 공부하며 후배들에게도 많은 도움줬던 따뜻한 선배

故 김동수 본부장은 현역시절인 1980년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데 이어 미국 해군대학원 운영분석학 석사, 캘리포니아대학교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육상무기 분야 최고 권위자였다. 미해군대학원 교수시절에는 미해군대학원 연구실에 남아 공부하는 한국 학생장교들을 찾아다니면서 야식을 사주고 격려했다. 당시 미해군대학원 연구실에 남아 공부했던 학생장교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해서도 항상 앞서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업무 종료 후 인근 충남대와 충북대에서 강의를 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앞장섰다. 동료와 후배들이 학위 논문 작성에 어려움을 겪을때면 기꺼이 도움을 주기도 했다. 특히 연구원들과 격의 없는 만남을 가졌으며 풍부한 칭찬과 감화를 통해 연구원들이 비전을 공유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열린 마음으로 연구원들의 지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노력했다.

이렇게 김 본부장은 친화적 리더십과 군인 특유의 결단력, 강력한 실천으로 서로 배타적일 것 같은 민주주의형 리더십과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매우 적절하게 융화시켜 보여주어 따르는 후배들이 유난히 많았다. 최근에는 진실한 종교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 신학대학에 다닐 정도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

그를 기억하는 남석현 연구원은 "남이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단정짓기보다는 다름은 인정할 줄 아는 분이었다"면서 "형처럼, 친구처럼 언제든 만나고 싶은 분이었은데 이제는 다시 뵐 수 없다는게 가슴 아프다"고 말하며 안타까워했다.

열정…손가락 절단되어 이식수술 후에도 직접 삽들고 콘크리트 배양 작업

故 김동수 본부장이 ADD와 인연을 시작한 것은 1991년. 육상무기 분야 최고 권위자로 미국 해군대학원에서 강의하던 중 1991년 귀국, 국방과학연구소에 선임연구원으로 파견돼 K-9 자주포 체계개발을 담당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가 10여년 동안 혼신의 노력을 다해 탄생시킨 K-9은 사거리, 발사속도, 기동성, 생존성, 탄약적재, 사격 후 진지전환 등 자주포가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우리나라 10대 명품 무기로 꼽히며, 대한민국 무기개발사를 다시 쓰게 한 20세기말 최고의 걸작이다. 북한의 170mm 자주포, 미국의 팔라딘 자주포보다 사거리가 길고 발사 속도가 빠르다. K-9의 최고 사거리는 60㎞이나 보통은 45㎞ 정도로 발사된다.

구형인 K-55 자주포의 최고 사거리는 36㎞이다. K-9 자주포의 개발로 한국군 사단의 작전 종심을 45km로 확장할 수 있게 됐다. 故 김동수 본부장은 K-9을 연구개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개발이 완료되자 곧바로 터키수출단장을 맡아 2001년까지 10억달러 수출계약을 성사시켜 국내 독자기술로 개발한 무기체계를 외국에 수출까지 하는 공로를 세웠다.

그의 일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는 일화는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 그 중에서도 1992년 5월 K-9 개발 이전에 군이 운용하던 K-55 자주포 군시험에 참가했을 당시 구조물의 진동 여건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승차했다가 더위로 열어놓았던 포탑문의 걸쇠가 풀리면서 손가락이 절단되어 이식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김 본부장은 그 상황에서도 사용군과의 업무 조율을 강행했다.

또 데이터 측정을 위한 강성 콘크리트 구조물이 급히 필요했는데 더위와 상처의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구원들을 격려하며 직접 삽을 들고 작업에 참여했던 일은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故 김동수 본부장이 10여년 혼신의 노력으로 탄생시킨 K-9 자주포. ⓒ2009 HelloDD.com

탁월한 리더십으로 국방분야 녹색기술 주도하며 기초자료 확보에도 기여

故 김동수 본부장이 ADD 5본부 본부장으로 부임했던 시기는 연구소 차원의 정체성과 관련해 내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던 시기였다. 주위에서는 그간의 무기체계 위주의 시스템 개발 연구개발에서 탈피해 핵심기술 연구개발을 통한 세계적 경쟁력확보를 위한 질적인 도약을 요구하고 있었고 연구소에 대한 일부 부정적인 시각을 일소하고 국방연구개발 환경의 변화에 따른 연구개발을 위한 집중적인 환경 조성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정일 연구원은 "故 김동수 본부장은 한 본부의 본부장으로서 뿐 만 아니라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의 한 사람으로서 끊임없는 고민을 통해 본부와 연구소의 확고한 미래비전을 제시하고자 노력했으며 탁월한 리더십으로 녹색기술의 터전을 마련했다"고 말하며 그리워했다.

그는 연구원들과 밤낮으로 함께 하면서 5본부의 '탈석유 정책기획 조사연구'를 시작으로 연이어 단기간에 국방분야 녹색기술에 대한 연구동향을 분석한 일종의 백서성격인 '국방 녹색성장 기술개발'보고서 작성을 주도, 성공적으로 완료시켰다. 이로써 ADD가 국방분야 녹색기술 기획을 주도하는 실질적 계기를 만들고 기술개발을 위한 기초자료를 선도적으로 확보했다. 또한 국방 녹색기술 연구기획 TFT장으로 활동 하면서 회의를 주관하고 연구기획서를 면밀히 검토해 국방 녹색기술 조사분석 및 세부 실행과제를 발굴했다.

그는 탁월한 대내외업무 수행능력을 발휘해 국방녹색성장이라는 연구소 주요정책이 신속하게 추진될 수 있는 대내외적 여건을 조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외에도 국방녹색성장에 관한 대외적 공감대 형성을 위한 숨은 노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09년 3월 청와대 녹색성장위원회 및 비서실 요원 100여명을 대상으로 한 강의 지원을 시작으로 육군본부, 기무사, 교육사, 방진회, 국방부 등 국방분야 유관기관을 대상으로 한 기술특강에 직·간접으로 수행했다.

서 연구원은 "탁월한 언변과 청중을 사로잡는 강한 흡인력으로 국방녹색성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 추진전략에 대한 공감대를 적극 형성했다"면서 "이를 토대로 국방과학연구소가 국방녹색성장을 명실상부하게 주도하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강력하게 인지시켰다"고 회고했다. 이어 서 연구원은 "국방녹색성장은 겨우 걸음마를 내딛고 있는 상황이라 그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지만 우리의 노력속에 그는 항상 살아있다"면서 "지금도 그가 '너 할 수 있는거 알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배가 항구에 다다를 수 있어!'라고 말하며 어깨를 두드려 줄것 같다"고 말하며 가슴 뭉클해 했다.

故 김동수 본부장. 그가 떠난지 한달이 조금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ADD인으로 동료들 가슴 깊이 남아있다. 동료들은 그가 미처 이루지 못한 많은 일들을 진행하면서 여전히 그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 다시한번 그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이었던 삶에 경의를 표하며 명복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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