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RI 소식지 3월호, 정통주 이야기

매번 하는 얘기지만, 언제나 술 빚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자신감을 갖게 될 수 있을까. 그 옛날의 주인이나 대모의 경지에 올라, 술 빚는 일은 물론이고 술맛 감정에까지 능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 놈의 연구 그만하고 이제 양조장이나 하나 차려서 돈 좀 벌어야 하지 않겠느냐.""돈 되는 일에 매달려도 시원찮을 판에 무슨 놈의 공부냐."고 하지만, 알면 알수록 어렵고 힘든 길이 술인 것 같다.

하기야 개인적으로도 전통의 술 빚는 일에 매달린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필자는 아직 늘 조심스럽고 두렵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기에 수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전통주에 매달려 학문하는 교수가 없고, 정규교육과정으로도 채택되지 못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들어 우리 술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특히 전통 우리술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양주는 그 집안의 가풍과 내력을 읽을 수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한국전통주연구소 박록담 소장의 글을 연재한다. 술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번쯤 박소장의 글을 읽고 직접 술을 담는 재미도 느껴볼만하다.<편집자 주>

술 빚는 일은 1년 농사
예로부터'술 빚는 일은 1년 농사'라고 하여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우선, 술 빚을 재료 준비는 추수가 끝나고 빈 논이나 밭에 보리나 밀을 파종하는 일부터 시작된다고 하겠다.

전통적으로 술 빚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재료는 발효제로 이용되는 누룩인데, 누룩은 한여름에 수확한 밀이나 보리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늦가을에 파종한 밀이나 보리의 수확시기가 늦봄이거나 초여름인 것을 감안하면, 겨울부터 누룩을 만들 재료를 재배하여 봄이나 여름 들어 그 재료를 수확함으로써, 비로소 술 빚을 재료의 한 가지가 장만되는 셈이 된다.

누룩은 밀이나 보리를 탈곡한 뒤, 절구에 찧거나 맷돌에 갈아 거친 가루를 만들어 적당량의 물과 섞어 반죽한 다음, 밀이나 보리를 탈곡할 때 남는 보릿짚이나 밀짚에 묻어 한 달 가량 띄우는데, 누렇게 곰팡이가 뜬 것을 최고로 쳤다.

우리나라의 양조는 주식으로 삼는 쌀을 이용한 곡주가 주류로서, 각자의 형편에 따라 보리나 조, 수수, 기장, 옥수수 등을 이용 술을 빚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때문에 전통주는 쌀로 빚는다고 하는 것이다.

쌀은 가을에 벼가 익어갈 무렵부터 일시에 고르게 팬 논의 벼를 베어다 탈곡을 하고, 별도로 도정을 더 많이 하여 특별히 준비하였다가, 이를 가공하는데 그 방법으로 죽을 쑤거나 떡을 짓거나 고두밥을 쪄서, 먼저 길어다 둔 정화수와 누룩을 섞어 술 빚기에 사용해 왔다.

이러한 이유로 술 빚는 일은 1년 농사라고 해 왔으며, 이들 재료를 구비하는 일부터 술을 빚고 익히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1년에 걸쳐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데, 차례나 조상제사에 쓸 술이 자칫 시어지거나 더디 익거나 하여 술을 그르치게되면, 소위 '정성이 부족하다'든가'부정 탔다'고 하여 술 빚는 일의 책임을 맡은 어머니들로서는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집살이의 구실이 되곤 하였기 때문에 특히 술 빚는 일을 두렵고 힘들어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술 빚는 일의 시작은 벼 수확이 시작되는 가을부터로, 연중 가장 먼저 빚는 술은 햅쌀로 빚는'햅쌀술(신도주)'이라 하겠으며, 추석차례에 올리는 음식 가운데 가장 먼저 장만하는 음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빚는 술과 만드는 술
그런데 이렇게 조심스럽고 두렵고 힘들기도 한 술 빚기를 요즘 사람들처럼 예삿일로 여기는 때도 없는 것 같다.

쌀로 고두밥만 지을 줄 알면 모두가 술 빚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힘들지 않고 두렵지도 않게 쉽게 끝마치는데, 그 시간이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데다 일주일도 멀다 하고 양껏 마실 수가 있다고 하니, 술 빚기에 20년을 매달려온 필자로서는 그저 신통할 따름이다.

따라서 요즘사람에게서'술 만든다'거나'술 먹는다'고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필자는 그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 이유를 찾고자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생겨난 곳이 양조장이라는 곳, 그러니까 술 공장이라는 곳이 등장하면서부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옛 사람들은 술을 빚는다고 하여'양조', '양온', '법온'이라는 말을 써 왔는데, 우리 고유의 술 빚기가 자유스럽지 못하게 된 후부터, 그래 봐야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부터가되겠지만, 그때부터 술을'만든다'하고 술을'먹는다'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술은 사람이 만들 수 없는 것인데도'술을 만들었다'고 하는 거짓말이 그러한 추론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자문화권인 동양에서는 술을 주정이라고 하고 외래어로는 알코올이라고 하는데, 주정이든 알코올이든 그원료는 당이다. 미생물(효모)의 대사 작용에 의해 당이 알코올로 환원되는 것이므로, 사람은 아무리 귀신을 속이는 재주를 가졌다 한들 당을 가지고 알코올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술을 만들었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전지 전능한 신이거나 순전히 거짓말쟁이이다.

그러니까 집에서 손수 누룩을 디뎌서 띄우고, 쌀로 고두밥이나 떡을 해서 술을 빚었을 때에는, 어머니들이 연중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면서 그렇다고 그만 둘 수도 없었던 일이 술 빚는 일이었다고 하는 것을 듣곤 했는데, 양조장이라는 곳이 생기면서부터는 과거 집에서 빚을 때는 열흘도 짧다 하고 한 달, 석 달 씩 익혀야만 했던 술이 열흘이 멀다 하고 일주일이면 나오고, 농번기나 추수시기에는 3일이면 한정 없이 마실 수 있는 양의 제조가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재미있는 사실은, 어떠한 이유에서였든지 그렇게 제조된 술들이 맛이 없고 싱겁거나 쓰고, 독하기만 하여 갖가지 조미료와 향신료를 사용하여 소비자들의 기호에 부합된, 보다 정확하게는 소비자들의 입맛을 선도해 가는 술이 본격적으로 상품화되면서 술을 만든다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술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빚어진 주정(술, 알코올)에 갖가지 맛을 내는 첨가물을 사용하여 맛을 부여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술에 맛을 내기 위해 조미를 하면서부터는 그것이'만든 술'이 되었고, '먹는 술'이 되었다는 결론에 달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조미주들을 우리는'전통주'또는 '우리 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전통주를 마시고 나면 '두통'과 '메스꺼움'이 뒤따르고, 특히 술 마신 다음날까지 '심한 구취'에 시달려서 다시는 안 마시고 싶다"는 것이 애주가들의 중론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전통주를 멀리하고 대신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와인이며 위스키, 브랜디를 사다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양주 수입국가 세계 1위를 다투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은'술은 빚는다'고 말해 왔다. 이와 비슷한 표현들을 예로 들기는 어렵지 않다. 가령, 옷과 집은 짓는다 하고, 장과 김치는 담근다 한다.

조상들의 예리한 관찰력과 지혜
한편, 수백 가지에 이르는 떡은 만든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송편만큼은 빚는다고 한다.

'짓는다'와'담근다'는 말 외의 '만든다'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그것이 무엇이든 재료나 원료의 성질이 바뀌지 않고 그 원형을 고스란히유지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즉, 집은 나무로 재료로 하여 가공하고 다듬어서 만드는데 집이 완성되더라도 나무의 성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된장이나 김치도 마찬가지로 메주와 배추 무 등 그 성질이 바뀌어져서 된장이 되고 김치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담근다고 하는 것이다. 떡도 쌀을 여러 형태로 가공한 후 익힌 것일 뿐, 주성분인 전분이 다른 물질로 바뀐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송편만큼은 빚는다고 한다. 그 이유가 모양을 내었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송편은 다른 떡과는 달리 소가 들어가기 때문에 설사 그것을 익혀서 멸균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치더라도 공기 중의 곰팡이 등 미생물에 의해 쉬이 쉬어지는 까닭에 송편이 부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솔잎 속에 들어있는 살균, 방부효과를 나타내는 성분을 빌려오게 된것이다.

때문에'송병'하던 것이 송편이 되었는데,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미생물이 하게 되므로, 송편만큼은 빚는다는 표현을 써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조상들의 자연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과 지혜를 깨닫게 되거니와, 술도 효모균이 만들기 때문에 사람인 자신이 만든다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으로선 기껏해야 효모라는 미생물이 술을 잘 만들 수 있도록 좋은 상태의 재료공급과 능률적인 환경을 제공해주는 역할에 그치는 것이므로, 겸손하게 빚는다고 하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리라.

이렇게 술 빚는 일 하나를 두고 생각해 보더라도, 첨단의 과학화, 정보화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 현대인들이 문맹으로까지 생각되었던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의 사고보다 못한, 부끄럽지만 아직 자연의 섭리는커녕 사리분별도 못하고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글∙사진 _ 박록담 | 한국전통주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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