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학노 제30대 한국원자력학회장

김학노 전 한국원자력학회장.
김학노 전 한국원자력학회장.
인류는 발전을 거듭하며 농경사회를 지나 산업사회, 그리고 정보화사회를 거쳤다. 지금은 세계화를 통한 국제협업을 경제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믿고 확산시켜 왔다. 미국, 독일, 일본 등 선진국은 노동집약형 제조설비를 중국, 베트남 등으로 이전해 경제성과 경쟁력을 강화시켰고, 중국은 세계 공장 국가로 성장하면서 이른바 G2로  국격을 상승시켰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인해 개인과 개인, 지역과 지역, 국가와 국가가 봉쇄되고 단절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이르렀다. 스페인 독감(1918)의 경우 거의 1억명에 이르는 피해가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봉쇄, 단절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홍콩독감(1968), 신종플루(2009), 메르스(2015) 등에도 특정국가, 특정지역에서 발생해 자유로운 지역간, 국가간 이동은 제한되지 않았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어느 한 나라에 특정되지도 않고 세계 모든 지역에서, 특히 인간의 왕래가 빈번한 지역일수록 확산속도가 빨라 최악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국경폐쇄에 따른 여행업, 항공업의 위축과 도산, 부품공급 지연에 따른 생산 공장의 가동 중단 등 거의 모든 산업구조의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자유 무역에 의존하였던 산업계일수록 더욱 큰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상황을 접하다 보니 많은 산업체에서 중국이나 다른 나라로 이전하였던 제조설비들을 본국으로 복귀시키려는 조짐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코로나19의 방역의 선진 모범 국가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 사람의 국민이라도 살려 내겠다고 애쓴 의료진의 헌신, 국민의 성숙한 동참 의식, 잘 갖춰진 의료체계, 국가의 리더십이 보여준 성과라고 생각한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그러나 코로나19가 모든 의료체계를 장악한 지금, 그와 무관한 질병으로 병원을 찾던 국민들이 이 판데믹 시대에도 어려움 없이 진단과 치료를 받고 있을지 우려된다.

정확하고 정밀한 진단, 암이나 난치성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의료진들이 많이 활용하는 도구 중 하나가 방사선이다. 이 방사선은 방사성동위원소에서 얻을 수 있는데 방사성동위원소는 석유처럼 자연에서 채취하는게 아니다. 자연에 있는 원소를 양성자나 중성자와 반응시켜 얻을 수 밖에 없다.

양전자를 방출하는 동위원소를 이용해 단층영상을 얻어 진단하는 PET 장치에는 불소 동위원소인 F-18이 사용된다. 평면 영상에 단층 영상까지 제공하는 의료기기로, 암 진단과 치료 결과 분석, 심장기능 검사, 뇌혈관 질환 진단, 신약 개발 등에서 활발히 활용되고 있는 감마카메라나 일광자단층촬영장치(SPECT)에는 테크니슘/몰리브데늄 동위원소인 Tc-99m/Mo-99가, 갑상선암 치료용으로는 요오드 동위원소인 I-131이 대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국내 의료용 동위원소의 30.5%(2017년 기준)을 차지하는 F-18은 양성자와 반응시켜 만들 수 있다. F-18은 반감기(양이 반으로 줄어드는데 걸리는 시간)가 110분으로 몹시 짧아 병원들이 자체적으로 생산해 사용하며 국내 자급율은 거의 100%에 이른다. 특히 정부의 권역별 '사이클로트론' 구축사업에 힘입어 국내 대부분의 대형 병원에는 F-18를 생산할 수 있는 '사이클로트론'이 설치되어 있다.

반면에 생산에 중성자가 반드시 필요한 Tc-99m/Mo-99, I-131 등 방사성동위원소도 반감기가 6시간/2.75일, 8일로 짧다. 때문에 생산 후 재빨리 공급할 수 있도록 수요처와 공급처의 연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중성자를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에는 '하나로'와 같은 연구용원자로가 있다. 특히 국내 의료용 동위원소 수요의 13.2%(2017년 기준)를 차지하는 Tc-99m/Mo-99는 남아공의 SAFARI-1, 호주의 OPAL, 네덜란드의 HFR, 캐나다의 NRU 등 몇몇 특정국가의 연구로에서만 생산해 세계 각국에 공급하고 있다. 2008년에는 캐나다의 NRU 연구로가 가동을 중지하는 바람에 Tc-99m/Mo-99을 이용해 왔던 전 세계 의료 시장에 커다란 혼란과 충격을 안겨준 바 있다.

우리나라는 '하나로'를 가동해 I-131 수요의 70% 이상을 공급해 왔다. 또 Tc-99m/Mo-99의 국내 수요는 물론이고 해외 수출을 위해 부산 기장에 이를 전담 생산할 수 있는 '기장로'의 건설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로'는 장기간 정지되며 I-131의 국내 생산이 중단됐다. 이 여파는 의료분야를 넘어 관련 산업 전 분야로 퍼지고 있다. 연간 약 10만Ci 수준의 Tc-99m/Mo-99 생산이 가능하도록 계획한 '기장로' 건설 사업은 경주 지진을 반면교사로 삼은 인허가 절차 변경, 사업 지체에 따른 물가 상승 등으로 인한 추가 예산확보 등으로 일정이 지연됐다.

정부는 최근에 코로나19 이후 산업성장을 위해 '한국형 뉴딜' 정책을 수립한 바 있다. 코로나19로 사람과 상품의 이동이 제한되고, 자국 우선주의가 강화된다면 환자들에게 필요한 동위원소 공급 마저 위태로워 질 수 있다. 환자들의 진단과 치료에 엄청난 위기가 올 수 밖에 없다.

우선 '하나로'의 조속한 재가동으로 I-131의 국내 수요를 일부라도 충당해야 한다. 또 건설허가를 받고도 예산 문제로 건설 공정을 착수하지 못하고 있는 '기장로' 건설사업을 '한국형 뉴딜' 사업의 하나로 지원해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킴과 동시에 코로나19 이후 우리가 마주하게 될 세계 무역질서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이 두 가지가 조속히 해결된다면, 아시아 지역의 의료용 동위원소 시장을 장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국가간 봉쇄 상황이 재발되더라도 우리 국민이 암이나 희귀질환의 진단과 치료에서 소외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번 판데믹 사태에서도 느꼈듯이 잘 갖추어진 의료체계와 성숙한 국민 의식이 있다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극복할 수 있다. 이에 더해 국가의 빠른 판단력과 준비태세가 필요할 것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세 박자가 잘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해본다. 특히 '기장로'에서 생산하게 될 방사성동위원소를 활용한 제품화 연구와 기업 지원을 위해 부산 기장에 설치할 '동위원소 활용연구센터'와 보조를 맞추고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도 '기장로' 사업에 대한 후속 조치가 절실한 상황이다.

◆ 김학노 전 한국원자력학회장은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학, 석사 후 KAIST에서 원자력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원자력연구원 하나로이용기술개발부장, 정책연구부장, SMART개발본부장, 전략사업부원장을 지냈으며 2017년 9월부터 1년간 제30대 한국원자력학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원자력연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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