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싸우는 의료진⑯]김서랑 간호사관학교 소위 인터뷰
75명의 신임 간호장교, 38일간 고군분투···"감사함으로 임했다"
"국민에게 받은 응원과 격려 보답하는 것이 우리들의 남은 숙제"

(왼쪽부터)신은경 소위, 이선영 소위가 대구국군병원 음압 병동에 투입되기 전 찍은 사진. <사진=김서랑 소위 제공>
(왼쪽부터)신은경 소위, 이선영 소위가 대구국군병원 음압 병동에 투입되기 전 찍은 사진. <사진=김서랑 소위 제공>
지난 3월 4일 대전에 위치한 육군간호사관학교의 신임 간호장교 75명이 대구국군병원으로 향했다. 간호장교들의 나이는 대략 20대 초반에서 중반. 그렇게 사회초년생인 간호장교들은 당초 9일로 예정돼 있던 임관식도 일주일가량 앞당겨 치룬 뒤, 코로나로 뒤덮인 대구행을 감행했다.

당시 김서랑 소위는 "사실상의 발령이 맞지만 우리는 첫 임무지(임무를 받아 근무하는 곳)가 바뀌었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으로 다같이 긍정적인 마음으로 대구로 향했다"고 회상했다.    

소중한 딸을 위험 현장에 보내는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김 소위의 어머니는 담담히 "다녀오라"는 말을 남겼단다. 김 소위는 "어머님께서 괜찮은 척하셨지만 알고 보니 저에게 연락도 섣불리 못할 정도로 힘들어 하셨다"고 했다.

현장에 도착한 첫 날, 병동 개소가 안 된 상태였기에 김 소위는 병동 세팅을 위해 밤낮없이 바닥에 테이핑 작업을 했다. 김 소위에 따르면 현장의 모든 사람이 코로나는 처음이었기에 많이 혼란스러워 했지만 감염관리 지침 포스터를 벽에 부착하는 등 다같이 힘을 모아 사소한 일부터 시작해 병동을 개설했다.

당시 대구국군병원에는 코로나19 감염환자만 대략 200명 가량 입원 중이었다. 75명의 간호장교들은 기본적인 감염관리 교육을 사관학교 재학 시절 이미 배운 터라, 긴급 상황이기에 바로 실무에 투입됐다.

간호사 국가고시 합격 후 간호사 면허도 발급 받기 전 감행된 일이기에 중증환자를 밀접히 돌보거나 주사를 놓는 의료행위들은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김 소위는 직접적인 치료 행위가 아니더라도 청소나 식사 보조 하나만이라도 도와드리자는 심정으로 현장에 임했다. 

이선영 소위가 퇴원 환자 간호를 위해 준비물을 챙겨 음압 병동으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김서랑 소위 제공>
이선영 소위가 퇴원 환자 간호를 위해 준비물을 챙겨 음압 병동으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김서랑 소위 제공>

(왼쪽)한 간호장교가 음압 병동 투입 전 손 소독을 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한 간호장교가 음압 병동 내 격리의료폐기물을 처리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서랑 소위 제공>
(왼쪽)한 간호장교가 음압 병동 투입 전 손 소독을 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한 간호장교가 음압 병동 내 격리의료폐기물을 처리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서랑 소위 제공>
김 소위를 포함한 75명의 간호장교들은 일정 시간에 환자들에게 병실 내부로 식사를 넣어주거나, 음압 병실 소독과 음압 유지가 잘 되고 있는지에 대한 검사, 환자들에게 먹는 약 배분 등의 업무들을 추진했다.

김 소위는 "매일 2교대로 근무하면서도 아무도 우리가 왜 이러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며 "우리는 한 배를 탔다는 마음에 동질감도 들고 힘도 많이 됐다"고 말했다.

한 70대 남성 환자의 퇴원일이 김 소위에게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날은 마냥 기쁜 날은 아니었다. 김 소위는 "답답한 병실을 벗어나 퇴원하는 환자분에게 축하드린다고 전하니 '퇴원하고서가 더 걱정'이라는 환자분의 대답이 돌아왔다"며 "단순히 병이 낫고 걸리고의 문제가 아닌, 퇴원하고서 본인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주변 인식이나 생계적 문제를 안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많은 기분이 오갔다"고 말했다.

◆ 종이학 천마리에 '눈물'···"어디든 불러준다면 또다시 가겠다"

국군간호사관학교 후배 생도들이 국군대구병원에서 코로나19 임무 수행 중인 선배 간호장교들에게 보낸 응원의 메세지가 가득하다. <사진=김서랑 소위 제공>
국군간호사관학교 후배 생도들이 국군대구병원에서 코로나19 임무 수행 중인 선배 간호장교들에게 보낸 응원의 메세지가 가득하다. <사진=김서랑 소위 제공>
코로나와 최전선에서 싸우는 의료진들에 대한 응원은 그야말로 감동의 물결이었다. 초등학생들의 간식과 편지부터, 생계가 위태로운 자영업자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온정의 손길을 내밀었다.

김 소위는 "너무나도 벅찬 응원을 많이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시민 한 분이 종이학 천마리가 담긴 박스를 보냈었다"며 "쪽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이렇게나마 건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어 눈물이 났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김서랑 소위. <사진=김서랑 소위 제공>
김서랑 소위. <사진=김서랑 소위 제공>
김 소위는 자신의 삶이 대구를 다녀온 전과 후로 나뉜다고 정의냈다. 김 소위는 "간호장교라는 직업이 부대나 군병원에서 군인 치료를 주로 하지만, 사실상 명백한 임무는 전시상황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것"이라며 "그렇지만 전쟁이라는 게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일이기에 저 스스로의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했고 국민 입장에선 더더욱 그랬을 것"이라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는 "국가재난 사태에 군의료가 앞장서면서 '내가 이런 일을 하기 위해 간호장교가 됐구나', '간호장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면서 "국민에게 믿음과 군의료의 필요성을 심어주고 저 스스로 간호장교란 직업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고 밝혔다. 

간호사라는 직업이 노고만큼의 사회적 평가를 못 받는 게 현실인 가운데 김 소위는 "간호사라는 직업이 전문적인 고유 영역에서 수행되는 정식 의료인임에도 불구하고 병원 내 다른 업종과 비교되는 사례가 많다"며 "하는 만큼 물질적 보상도 많이 못 받는다는 말도 많지만 그것보단 간호사를 보는 사회적 인식이나 제도가 나아졌으면 한다. 간호사가 다른 이름으로 많이 불리는데, 간호사라고만 정확히 불려도 우리에게 힘이 많이 될 것 같다"고 희망했다. 

올해는 WHO(세계보건기구)가 '세계 간호사의 날'로 처음 지정한 해이다. 김 소위는 의료인으로서 인정받는 문화와 간호사로 일하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소원했다. 충분히 힘들고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이지만 나름의 자부심과 행복을 느꼈으면 한다는 마음에서다.

김 소위는 마지막으로 다시 재난 상황이 찾아온다면 이번과 같이 방역 최전선에 설 것이냐는 물음에 이처럼 대답했다.

"대구를 다녀오고 단연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어디든 불러 주신다면 바로 가겠습니다. 이번에 국민들로부터 받은 응원과 격려, 감사함을 간호사로서, 군인으로서 그들에게 보답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들에게 남은 숙제입니다."

(왼쪽부터)김희주 소위, 김세희 소위가 음압 병동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사진=김서랑 소위 제공>
(왼쪽부터)김희주 소위, 김세희 소위가 음압 병동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사진=김서랑 소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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