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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경제]물 흐르는 곳 어디서나 전기 만든다

3월 호 '데이터 경제로 간다' 출판
인터뷰어 : 임정욱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센터장
인터뷰이 : 박혜린 이노마드 대표
박혜린 이노마드 대표. <사진=나라경제 제공>박혜린 이노마드 대표. <사진=나라경제 제공>

"인도에서 전기도 안 들어오는 가난한 마을에 가서 어떤 집에 묵은 적이 있어요. 7살짜리 아이에게 디지털카메라를 보여주니 너무 좋아합니다. 태어나서 처음 본 신기한 물건인 거죠. 그래서 아이에게 그 카메라를 주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전기가 없어서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한 젊은이의 인생을 바꾸는 깨달음은 이런 순간에 찾아온다. 2006년 인도를 여행하던 20대 초반의 박혜린 씨는 아주 적은 양의 전기에너지라도 이런 마을의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이후 14년간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꿈을 좇는 긴 여정이 시작됐다.

2009년 해양조류발전 플랜트업체인 정맥산업개발에 들어가 진도에서 조류발전플랜트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천신만고 끝에 바다에 조류발전기를 설치해냈고, 그 발전기가 만들어낸 전기로 한밤중에 환하게 불이 켜지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을 했다. 하지만 주민과 지자체의 동의를 받는 문제와 각종 규제로 인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쉽지 않았다. 크게 좌절했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직접 도전해보기로 했다.
2014년 이노마드라는 스타트업 창업에 나선 것이다.

◆ 휴대용 수력발전기로 미국 캠핑시장 공략

필자가 박 대표를 처음 만난 것도 2014년 한 스타트업 행사에서였다. 이노마드는 소형 수력발전기를 이용해 전기에너지를 생산하겠다는 당찬 꿈을 가진 스타트업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고객을, 시장을 찾을 수 있을까. 박 대표는 스타트업답게 접근했다. 우선 설익은 제품을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공개해 물어보는 방식이다. 서울시를 설득해서 청계천의 흐르는 물에 이노마드의 수력발전기를 설치했다. 그리고 생산된 전기로 시민들의 스마트폰을 충전해주는 스마트 충전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국내외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놀랍게도 거의 20만명이 다녀갈 정도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CNN에 소개된 덕분에 또 다른 기회를 얻게 됐죠."

CNN 보도를 보고 미국 보스턴의 유명 스타트업 육성프로그램인 매스챌린지(MassChallenge)의 대표가 연락해온 것이다. 그는 이노마드에 미국의 캠핑시장을 겨냥한 수력발전기 제품을 만들어볼 것을 권유했다.

"청계천에서의 경험을 통해 표준화된 산업용 수력발전 제품은 설치환경의 차이 때문에 만들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캠핑장에 전기 인프라가 없는 곳이 많고 휴대형 디젤발전기는 소음과 매연 때문에 금지된 곳이 많았습니다. 강, 계곡, 호수 등 물이 많은 미국의 캠핑장을 겨냥해 친환경 소형 수력발전기를 만들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방향을 잡고 개발에 뛰어들어 2016년 물병 모양의 휴대용 수력발전기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를 통해 선주문을 받아 양산을 시작했고 '이노마드 우노'라는 이름의 제품으로 발전시켰다. 600g 정도의 이 제품을 가지고 강, 계곡 등에서 프로펠러 모양의 수력발전 터빈을 이용해 전기를 만들어 스마트폰을 충전하거나 휴대용 랜턴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한 대에 280달러나 하는 이 제품은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2만대 가까이 팔리는 성과를 올렸다.

제조업 경험이 없는 젊은 팀으로 구성된 하드웨어 스타트업은 종종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의 프로토타입으로 킥스타터나 와디즈 등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서 거액을 조달한 회사도 막상 제품 생산에 차질을 빚어 제때 배송을 못하거나 아예 완제품을 못 내기도 한다. 또 제품을 내놓고도 품질 문제로 항의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노마드는 어떻게 이런 문제를 극복했는지 물어봤다. "사실 제품 생산 과정을 거치면서 조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제품을 개발하던 당시 팀의 평균연령이 30세였는데 지금은 저를 제외하고 제일 막내가 45세입니다."

◆ 스마트 물관리 시스템 개발 등 한 단계 도약 준비

무슨 일이 생긴 걸까. 2016년 제품 개발 초기에 금형설계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험이 많은 시니어 엔지니어를 모시게 됐고 조직에 갈등이 생겼다. 젊은 창업 멤버와 나중에 들어온 시니어 멤버들 간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박 대표는 결국 이노마드의 미래를 위해 시니어팀을 선택했다. 이제 36세의 박 대표를 제외하고 13명의 이노마드 멤버는 모두40~50대의 '아저씨'들로 구성돼 있다. 한국의 기업문화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조합이다. 하지만 안정적으로 제품을 개발·생산할 팀을 확보하기 위해 박 대표는 이런 어려운 결정을 했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은 '어린 여자 아래서 일하는 것이 창피하지 않냐'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 대표는 젊은 여성 대표로서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다양한 행사에서 제품을 홍보하고 글로벌 회사들과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글로벌 아웃도어 브랜드인 파타고니아와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개인이 전기를 생산할 수 있고, 100% 재사용 가능한 플라스틱을 쓴 제품이라는 환경적·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전 세계의 파타고니아 매장을 통해 판매될 예정입니다." 또 지난 1월에는
세계 최대의 아웃도어 전시회인 ‘ISPO 뮌헨 2020’에서 올해의 브랜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제 이노마드는 지금까지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단계 도약을 준비 중이다. 새로운 제품 발표, 지자체와의 협업, 교육프로그램 제공 등 다양하다. 우선 스마트 물관리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작은 수력발전기를 만드는 기술을 바탕으로 샤워기나 수도꼭지 등에 소형센서를 부착해서 외부동력 없이 실시간으로 물 사용량과 수질 등을 측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제품이다. "앞으로는 물 사용량도 규제 대상이 될 겁니다. 그런데 내가 쓰는 물 사용량을 실시간으로 알게 되면 20~30%의 절약효과가 생긴다고 합니다." 이 제품은 올 상반기 안에 국내 호텔욕실에 적용될 예정이다.

또 '탄소 없는 마을' 사업을 진행하는 경남 하동군과 계약을 체결하고 신재생에너지 생산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노마드는 하동에서 섬진강 등의 수력에너지를 이용해 스마트팜에서 친환경 농작물을 생산하고 전기스쿠터 충전스테이션 등을 운영할 예정이다. 또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 에너지 교육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미세먼지, 기후변화 등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문제에 능동적·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다음 세대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지속 가능 에너지를 교육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이런 성과에도 박 대표에게는 마음의 짐이 있다. 전기의 혜택을 못 받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에너지 해법을 내겠다는 꿈을 아직 이뤄내지 못한 것이다. "개발도상국에 진출해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수력발전 제품을 만드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선 좋은 제품을 만들어 회사의 기반을 다지고자 했습니다. 그동안 쌓인 역량으로 단계적으로 그 꿈을 이루는 것을 준비해보려고 합니다." 박 대표가 학생시절 만난 인도 아이에게 편리하고 값싼 수력발전기를 선물해줄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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