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원 인터뷰]최진호 단국대 석좌교수
나노과학 개념 가장 먼저 전파한 선도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2020 신년호 126호 출판

최진호 단국대 석좌교수. <사진=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최진호 단국대 석좌교수. <사진=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그는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였다. 멈추는 법이 없었다. 이따금 무언가를 응시하는 눈빛에서는 호기심의 파동이 세차게 출렁거렸다. 

73세의 현역 과학자 최진호 석좌교수의 생은 학문적 호기심에 충실했던 삶이었다. 학문은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았으나 그는 늘 지식의 결핍을 느꼈다. 갈증을 해소하기만 해도 바쁜 시간이었다.

학문 역시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학문과 학자의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은 그를 은퇴 시기가 훌쩍 지난 후에도 서울대학교 화학과에서 이화여자대학교 화학·나노과학과로, 또 단국대학교 조직재생공학연구원으로 이끌며 활발한 연구 활동을 지속하도록 했다.

최진호 석좌교수는 우리나라에 나노과학이란 개념을 가장 먼저 전파한 선도자였다. 1996년 한국 최초로 나노국제학회를 개최한 이래 화학과 세라믹스를 기반으로 하는 나노기술(NT), 바이오기술(BT), 정보기술(IT), 의공학기술(MT), 융합과학기술 분야의 연구를 세계적으로 선도해왔다. 그는 현재까지 630여 편의 논문과 16권의 저서, 국내외 등록특허 32건 등 괄목할만한 연구 업적을 내며 나노바이오소재 분야 세계적 석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가 지나온 길을 함께 반추해 봤다.
 
Q. 교수님의 근황을 먼저 여쭙고 싶습니다.

A. 단국대에서 석좌교수로 일하며 ‘지능형 나노하이브리드 물질 연구 실험실’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바쁘게 지내고 있지요. 1981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대에서 24년 근무하다 이화여대로 옮겨 70세까지 일하고, 우연한 기회로 단국대에 오게 됐습니다. 지난해 3월부터니까 거의 1년이 다 된 셈이네요. 최근에는 일본 도쿄공업대학의 특임교수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Q. 은퇴시기에 더 활발한 활동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A.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죠. 어디서든 제 역할을 해낼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고요. 가능하다면 계속 이어나가고 싶어요. 가능하겠죠?(웃음)
 
Q. 비결이 있을까요?

A. 글쎄요. 저에게 늘 학문에 대한 갈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학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는데요. 제가 대학을 다닐 때는 학생운동으로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라 많이 배우질 못했어요. 게다가 당시 우리나라 경제 수준은 1인당 국민 소득이 200달러정도였어요. 무척 가난했을 때였죠.

그러니 대학이나 대학원 상황은 어땠겠어요. 실험실이 대부분 빈방이었어요. 장비가 아무것도 없었죠. 하고 싶은 연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힘든 상황이었는데 처음엔 유학을 꿈도 못 꿨어요. 똑똑한 학생들만 가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우리나라에서 석사를 마치고 나서야 유학을 계획했는데, 마침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일본 도쿄공업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됐지요. 실험실에 가보니 선진국에 걸맞은 연구 장비들이 모두 갖춰져 있더라고요. 연구 여건이 좋았죠. 그때 그간 쌓였던 갈증을 해소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식의 결핍은 계속해서 생기더라고요. 그게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Q. 무기화학 이학박사, 재료공학 공학박사 등 박사학위만 2개인 분께서 지금까지 지식의 결핍이 있다고 하시니 아이러니입니다.

A. 석사학위 후 첫 일본 유학은 UNESCO의 1년짜리 연수장학금을 받아 떠난 거였는데, 그때 만난 은사님께 학문을 하는 마음가짐을 배웠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산업에 기여할 수 있을 만한 연구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도쿄공업대학에 갔거든요. 그런데 지도교수님이 제가 원하는 연구 주제를 주지 않고 다른 걸 계속 주시더라고요. 한 달 정도를 씨름하다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찾아갔는데, 대꾸도 안하셨어요.

“진짜 원하는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교수님이 제게 “최 군, 학문하는 사람은 학문에 경계가 있어선 안 되네. 좋아하는 것만 하고, 하고 싶지 않다고 안하면 외골수가 될 수밖에 없네. 어떠한 학문이라도 호기심을 가져야 하네”라고 조언해 주시더라고요.

그때 딱 깨달음이 왔죠. 그때 이후로 두세 달을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연구에만 집중했어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연구였는데, 교수님이 그제야 제게 잘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는 정말 밤낮 가리지 않고 실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에 3~4시간씩 자고 실험실에 나가는 일을 반복했지요.
 
Q. 그래서 이후 독일로 유학을 가셨죠? 이학박사를 받으신 것도 이색적인 이력입니다.

A. 학문을 제대로 접하고 나니 오히려 지식의 결핍을 많이 느꼈고 더 배우고 싶었습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장학생 모집 공문이 또 눈에 띄더라고요. 그래서 독일 뮌헨대학으로 가게 됐죠.

석사까지 공학을 전공하며 스스로 기초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공대에서는 ‘어떻게 하면 이 물질을 저렴하게 만들 수 있을까’를 배운다면 자연대학에서는 ‘왜 그런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 배우거든요. 저도 답을 찾고 싶었기에 독일에서는 화학으로 전공을 바꿔 공부를 시작했어요.

전공이 바뀌었으니 더 열심히 해야 했고, 연구소에서 매일 밤 12시에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했습니다. 굉장히 힘들었지만 그만큼 즐거웠어요. 교수님과도 친밀했죠. 그 분도 거의 매일 새벽부터 실험실에 오셨는데 그 시간에 나와 있는 사람이 저 밖에 없었어요. 1대 1로 지도를 받은 셈이니 저에겐 행운이었죠. 2년 반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Q. 국내에 나노과학이라는 개념을 처음 전파하셨습니다.

A. 나노과학은 화학자들이 알고는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던 분야였어요. 저는 나노기술이 앞으로 중요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 1990년대 초반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고, 1996년에 나노 관련 학회로는 처음으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했습니다.

관련 연구가 본격화된 건 2000년대 무렵부터입니다. 2000년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국가나노기술계획(NNI)을 발표하면서 전 세계 나노 열풍이 불었지요. 제가 나노하이브리드라는 용어를 만들어 1998년에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용어가 과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기 시작했고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Q. 연구 활동을 해오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였나요?

A. 나노과학기법을 이용한 초전도 물질을 개발해 1998년 사이언스지에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논문 중에서 그 논문이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외국기관이나 인력의 도움 없이 순수 한국인 연구자들로만 팀을 이뤄 국내 연구 환경에서 완성한 논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2차원 구조를 갖는 나노물질을 유전자 전달체로 개발한 연구성과가 세계 최대 재료학회인 ‘Material Research Society’에서 ‘세계 8대 innovative research’에 선정되었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Q.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석학으로서 지금의 과학기술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A. 글쎄요. 우리나라가 노벨상을 못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기초학문에서 혁신적인 연구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의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지만, 이를 지원해주는 정부의 정책도 매우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노벨상이 발표되는 10월에만 반짝 기초과학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는 조금 지나면 다 잊어버려요. 게다가 최근 우리나라 연구개발이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기초학문은 더 힘든 환경이 될 수도 있어요. 이런 것들이 노벨상 수상을 지연시키는 요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되도록 민초의 과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환경을 갖춰 나갔으면 좋겠어요. IBS를 필두로 한 대형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예산을 나누어 쓰고 있는 민초 과학자들이 있거든요. 그들을 위한 정책적 지원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젊은 과학자들에게도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A.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연구를 하다가 힘들면 그만두고 적당한 곳으로 취직하려는 학생들이 많아요. 저는 그럴 때 마다 끝까지 매달리라고 해요. 목표를 달성하라고요.

이런 말을 하면 저보고 속된 말로 ‘꼰대’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요즘 학생들은 견뎌내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적당히 하고 적당히 사회에 순응하려고 하는 게 안타까워요. 최후의 승자가 되길 바랍니다. 최후의 승자는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Q. 견뎌낼 힘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A. 연구하는 데 두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돼요.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소속기관이 있고, 또 그 연구 분야를 아우르는 커뮤니티가 있습니다. 그 소속이나 커뮤니티를 위해 무언가 기여해야겠다는 의식이 있어야 해요. 화학이라면 화학 커뮤니티겠죠. 나를 위해서도 일을 하지만 학문 분야의 발전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게 학자의 본분이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애국심이에요. 내가 하는 연구는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인지 생각해야 해요.

간혹 외국에 쉽게 기술이전을 하는 걸 보면 안타까워요. 60~70년대에 공부했던 우리 세대 과학자들은 국가를 위해서 연구하고, 그게 국가의 자산이 될 수 있도록 기술 보호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학문의 후속세대들에게 자신이 속한 과학기술 커뮤니티와 국가를 위해 헌신 한다는 자세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Q. 한림원의 역할에 대해 고견 부탁드립니다.

A. 국민들에게 과학 지식을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우선 과학 지식과 정보가 각계각층에 골고루 공유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어야겠지요.

정치의 경우도 대중들이 정치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자신의 의견을 우리 사회에 표출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진보, 중도, 보수층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도 자신의 의견을 표출한 결과이지요. 현재 우리 정치가 타협하는 것을 잘 못하고 있는데, 그건 아직 미성숙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학 지식의 공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이 과학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많이 알아야 합니다. 현재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나라의 정보과학 지식은 지나치게 젊은 층 위주로 편중되어 있거든요. 일례로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은 고속버스표 조차도 잘 살 수가 없어요. 대부분의 노인들은 창구에 직접 가서 사거나 젊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거든요. 이게 지식의 불균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림원이 계속 대국민 과학기술 교육과 홍보를 통해 그런 격차를 줄여나갈 수 있도록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최진호 단국대 석좌교수 약력

고체무기화학과 세라믹스를 기반으로 하는 융합과학기술 분야를 선도했으며 1996년 한국 최초 나노국제학회 개최 등 관련 분야에서만 63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대한민국학술원, 세라믹분야세계학술원 등 종신 및 석학회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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