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국가과학과 과학자본을 좇다···런던 과학박물관

글: 홍대길 국립대구과학관 경영지원본부장
앨버토폴리스(Albertopolis)는 런던 하이드파크 남쪽에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과학과 예술의 공간으로, 과학관·박물관·대학·공연장이 모여 있다. 1851년 하이드파크에서 제1회 만국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앨버트 공의 작품이다. 그는 산업혁명을 꽃피우기 위해 과학과 예술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국 박람회에서 거둔 수익을 아낌없이 이곳에 투자한 이유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1861년 이름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모든 과업은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완성됐다.

5272석의 객석을 가진 로열 앨버트홀(1871년)은 과학과 예술을 증진하기 위해 세워졌다. 초석에 새겨진 이름은 로열 앨버트 과학예술전당이다. 로드 스튜어트가 '항해'(sailing)를, 아델이 '당신 같은 사람'(someone like you)을 불렀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1933년 미래 재앙을 몰고 올 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을 탈출해 이곳에서 유럽 평화와 자유를 호소했다. 3일 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다시 유럽에 돌아오지 않았고, 6년 뒤 그의 예언대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60여년의 역사를 지닌 런던 과학박물관의 입구.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160여년의 역사를 지닌 런던 과학박물관의 입구.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

앨버트기념탑(1872년)은 앨버트 공을 잃은 슬픔으로 평생 검은 옷을 입고 지냈던 빅토리아 여왕의 사랑이 담겨 있다. 당대 최고의 조각과 건축의 미를 뽐낸다. 임페리얼대학(1907년)은 왕립화학대학·왕립광산학교·왕립과학대학·세인트메리병원 등을 합병해 설립한 영국 최고의 이공대학이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을 비롯해 노벨과학상 수상자 14명을 배출했다. 왕립예술대학(1896년)은 영국 QS세계대학평가에서 5년 연속 디자인 분야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세계적인 박물관인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1852년), 과학박물관(1857년), 자연사박물관(1881년)이 앨버토폴리스의 방문을 환영하고 있다. 이번 행선지는 16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런던 과학박물관이다.

◆산업혁명과 융합 교육

런던 과학박물관은 무료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산업혁명 유산들이 반긴다. 증기기관들이다. 제임스 와트가 개발한 증기엔진(1788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회전 엔진이다. 매튜 볼턴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버튼과 버클을 만들 때 사용됐다. 윌리암 헤들리가 만든 퍼핑 빌리 역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증기기관차이다. 1813년경에 만들어져 1862년까지 마차가 달렸던 철로를 이어받아 달렸다. 스티븐슨 부자가 만든 로코모션(1825년)과 로켓(1829년)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1903년 번리철강회사에서 직조기를 돌렸던 거대한 증기 엔진은 지금도 피스톤을 움직이며 관람객들에게 그 힘을 자랑하고 있다.

와트의 공방은 특별한 구경거리이다. 1819년 사망했을 당시를 재현해 놓았다. 와트는 증기기관을 발명하지 않았지만, 탁월한 개선으로 마치 증기기관 발명자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의 독창성은 오히려 최초의 복사기, 회전속도를 측정하는 태코미터, 회전 엔진, 일률 단위인 마력(馬力), 거리를 측정하는 마이크로미터, 유연 수도관 등을 발명한 데 있다. 그는 평생 8000여 가지 물건을 만들어냈다. 과학박물관에서 만나는 그의 일터는 이 모든 것들의 요람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들어서면 보이는 에너지홀과 증기기관들의 모습.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가장 먼저 들어서면 보이는 에너지홀과 증기기관들의 모습.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

위대한 과학기술자의 방은 과학관의 중심을 잡는다. 프랑스 국립기술공예박물관은 화학자 라브와지에의 연구실을, 스웨덴 국립자연사박물관은 식물학자 린네의 연구실을, 독일 도이체스뮤지엄은 천체물리학자 갈릴레이의 연구실을 재현해 놓고 있다. 런던 과학박물관이 기술자 와트를 선택한 것은 산업혁명에 대한 영국의 자부심을 드러내기 위함일 것이다.

런던 과학박물관은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이전 과학관들은 호기심 창고, 자연사박물관에 머물러 있었다. 영국박물관(런던 자연사박물관의 뿌리)이 그 예이다. 박물(博物), 다시 말해 동물·식물·광물·지질·표본들을 전시하며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동물학·식물학·광물학·지질학과 같은 학문이 발전하는 토대를 만든 공이 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새로운 형태의 과학관이 필요해졌다. 기계, 측정 도구, 실험 기구, 기술 서적 등을 이용하여 기술자를 양성할 교육기관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앨버트 공은 과학과 예술을 얹고 싶었다. 기술이 발전하려면 과학이 필요하고, 상품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인간공학적 심미적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봤던 것이다. 

1857년 런던 과학박물관의 전신인 사우스켄싱턴박물관이 과학, 예술, 기술을 융합한 박물관으로 출발했던 것은 앨버트 공의 철학과 탁월한 선견지명에서 비롯된 일이다. 산업혁명으로 대량 생산된 영국 제품이 싸구려 이미지를 탈출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일이었다. 오늘날 과학·기술·공학·예술·수학(STEAM) 융합교육은 런던 과학박물관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 와트의 공방. 1819년 사망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제임스 와트의 공방. 1819년 사망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
런던 과학박물관의 방문자 수(1909~2019년).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런던 과학박물관의 방문자 수(1909~2019년).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

런던 과학박물관은 1851년 만국박람회의 정신적 유산, 1876년 과학기구 대여 컬렉션 전시회, 1883년 특허국박물관의 합병을 통해 성장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과학기구 대여 컬렉션 전시회는 초기 과학박물관의 전시물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각국에서 임대해온 것들은 나중에 복제해 상설화했다. 튀코 브라헤의 사분의, 마그데부르크 반구, 라부아지에 열량계 등은 당시 복제된 주요한 과학 유산들이다. 과학박물관 사이 국제적인 복제품 교류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특허국 박물관의 합병은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 '로켓' 등 산업혁명 유산들을 흡수했다.

과학박물관에 전시된 아폴로 10호 사령선은 진품이다.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과학박물관에 전시된 아폴로 10호 사령선은 진품이다.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

세계 최대의 의학 전시관으로 자부하는 웰컴 갤러리에 전시된 후크의 현미경.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세계 최대의 의학 전시관으로 자부하는 웰컴 갤러리에 전시된 후크의 현미경.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

전자를 발견한 톰슨이 사용했던 실험기구.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전자를 발견한 톰슨이 사용했던 실험기구.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

◆국가를 위한 과학

매년 340만 명이 런던 과학박물관을 찾는다. 그 인기는 산업 유산이 아닌, 다양한 과학기술 업적들에 있는 듯하다. 산업혁명은 교과서적 추억인 반면, 과학기술은 가족, 친구의 대화를 이끌어낸다. 

우주탐사관은 현대 우주탐사 역사를 보여주는 로켓, 인공위성, 우주탐사선 모형들로 채워져 있다. 과학관 연구자에게 이 전시관의 역사는 특별하다. 1957년 스푸트니크가 발사됐을 때부터 전시물을 모으고 작은 특별전을 개최해 오다, 1986년에서야 상설화됐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아폴로 10호 사령선은 진품이다. 1969년 아폴로 11호를 위해 두 달 전 사전 답사차 달에 다녀온 우주선이다. 1976년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으로부터 빌려온 이후 매년 임대계약을 연장하고 있다. 아폴로 10호 곁에는 아폴로 11호 착륙선 실물모형이 있다. 블랙애로우 로켓(1971년)은 영국 우주기술을 대표한다. 헬렌 샤먼은 1만 3000여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영국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된 여성 화학자이다. 그녀가 1991년 미르 우주정거장에 8일 동안 머물렀을 때 입었던 우주복도 전시돼 있다.

현대세계관은 지난 250여 년의 과학 역사를 다루고 있다. 알렉산더 커밍이 1766년 개발한 기압 시계는 시간과 기압을 알려주었던 귀중한 기상학 유산이다. 기상학자 루크 하워드가 1801년부터 40여 년 동안 런던 날씨를 기록하고 연구할 때 사용했다. 윌리엄 허셜이 1795년경 만들어 누이 캐롤라인에게 주었던 망원경이 있다. 캐롤라인 역시 천체 관측을 했던 천문학자로 8개의 혜성과 3개의 성운을 발견했다. 그녀가 사용한 망원경은 윌리암 허셜이 1781년 천왕성을 발견했을 때 사용했던 망원경과 같다고 한다.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이 1953년 개발한 이중나선 DNA 분자 모델이 있다. 1977년 재구성한 것으로, 원래의 금속판들을 다시 사용해 진품이나 다름없다. 전자를 발견한 J. J. 톰슨이 사용했던 실험기구는 물리학에 관심을 가진 관람객들에게 귀중한 자료이다.

2층에는 세계 최대의 의학 전시관으로 자부하는 웰컴 갤러리가 있다. 3,000제곱미터 면적에 3000개가 넘는 의료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200년이 된 왁스 해부모형, 최초의 청진기,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 예방에 사용했던 란셋, 세계 최초의 MRI 스캐너, 응급자전거 등 역사적인 것들이 많다. 리모델링에 2400만 파운드(약 36억 원)를 썼다. 입구에는 영국 출신 조각가 마크퀸이 디자인한 3.5m의 거대한 '자의식 유전자'(Self-Conscious Gene)라는 작품이 있다. 온몸에 문신을 한 캐나다 공연예술가 릭 제네스트를 조각한 것이다. 퀸은 2007년 팔이 없고 다리가 유난히 짧게 기형인 예술가 앨리슨 래퍼가 임신한 모습을 트래펄가 광장에 전시해 화제를 모았다. 싱가포르 가든스바이 더 베이에는 갓난아이가 공중에 떠 있는 '플래닛'(Planet)이라는 그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현대세계관에 전시된 DNA 이중나선 분자 모델.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현대세계관에 전시된 DNA 이중나선 분자 모델. <사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공>
지하 1층에는 유아들을 위한 어린이과학관 ‘가든’이 있다. 물, 빛, 소리, 구조를 배우고 놀 수 있는 곳이다. 가전제품의 비밀을 보여주는 전시관은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어 좋다. 생활 속 과학기술 제품들의 역사와 원리를 소개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예를 들어 진공청소기, 냉장고, 세탁기, 수세식 변기의 원리를 알아볼 수 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발전해 온 자물쇠와 열쇠의 원리를 살펴보고 체험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과학기술사를 중심으로 전시하려는 런던 과학박물관의 고집은 3층, 4층 전시관에도 이어지고 있다. 3층에는 시계공 박물관, 수학 갤러리, 정보시대, 대기과학 등이, 4층에는 항공기들이 전시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많은 과학관이 체험이 중요하다며 핸즈온 과학센터로 가는 길을 런던 과학박물관은 애써 외면하며 소극적이다. 내세우는 주장은 '국가를 위한 과학'이다. 과학기술 유산을 보존하고, 이를 통해 과학기술의 역사, 과학의 원리, 과학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겠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로 런던 과학박물관은 과학기술사 연구에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 결과 과학사를 위한 왕립학회(1947년)에서 중요한 연구업적을 쌓았다. 과학박물관 큐레이터들의 노력이다.

◆시대적인 요구와 과학자본

과학박물관이 고집스럽게 과학기술 유산을 지키려고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인 흐름이 있다. 과학 소통에 대한 요구이다. 2층에 전시된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코너는 이를 반영하고 있다. '무엇이 인간을 침팬지보다 현명하게 하는가' '무엇이 나를 옆 사람과 다르게 만드는가' '분노, 두려움, 혐오, 행복, 슬픔, 놀람과 같은 6가지 감정은 무엇이 만들어내는 것일까' '나비 날개의 다양한 패턴은 무엇이 만들어내는 것일까' 유전자를 통해 그 질문을 풀고 있다.

원더랩도 과학박물관 속 과학센터라고 할 수 있다. 과학쇼를 하고, 다양한 체험 전시물들로 어린이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지하 1층 가든이 유아들을 위한 곳이라면, 이곳은 초등생을 위한 공간이다. 또한 별도의 이용료를 받는 VR 체험 코너도 있다. 놀라운 것은 보수적인 과학박물관이 게임을 개발했다는 사실이다. '토탈 다크니스'(Total Darkness)라는 온라인 스토리텔링 게임이다. 7~13세 어린이 대상 비형식 과학학습을 위해 만들었다. TV, 조명, 와이파이가 사라지고, 배터리가 닳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와 같은 호기심과 창의성이 필요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런던 과학박물관은 비형식 과학교육의 전도사로 나서고 있다. 대중을 위한 과학강의, 대중의 과학이해(PUS)를 처음 시작했던 영국 과학문화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2018년 개설한 과학참여아카데미가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어린이들의 과학에 관심과 포부는 10세에서 14세까지가 가장 높다. 16세 이후에는 낮아진다. 이러한 결과는 왜 나오는 것일까? 9,000명이 넘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가족의 습관, 자본과 같은 환경적인 요인이 과학에 대한 관심과 포부에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과학자본(science capital)이 많을수록 16세 이후 과학을 공부할 가능성이 컸다. 반면 불우한 환경(학교·가정·지역) 때문에 과학자본이 적으면 STEM 분야의 전공을 선택할 가능성이 작다는 것이 연구의 주장이다. 여기서 과학자본이란 과학 관련 자격, 지식, 이해, 흥미, 소양(literacy), 사회적인 연결 등을 의미한다.

런던 과학박물관은 과학자본을 주목했다. 자본 분배에서 사회적 불평등, 계급화된 가족 습관이 어린이의 과학 포부와 잠재적 미래의 불평등을 만들어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 과학참여아카데미이다. 박물관 전문가, 교사, STEM 교육자들에게 과학자본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비형식 과학학습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에너지기업인 BP가 후원하고, 킹스칼리지런던,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이 런던 과학박물관과 함께 개발했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과학 소양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던가. 과학 지식을 알고 모름에 따라 얼마나 편 갈랐던가. 이제는 과학자본이란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과학관은 모두에게 개방되어야 한다. 최소 국립과학관만은 청소년들에게 무료로 개방되어야 한다. 과학자본의 차이로 인한 불평등을 극복해야 한다. 국립도서관, 국립박물관과 더불어 누구나 과학을 접할 수 있도록 과학관의 문을 무료로 열어야 한다. 문화 민주주의를 추구해온 런던 과학박물관이 160여 년 역사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이다.

◆저자 소개 - 홍대길 국립대구과학관 경영지원본부장

서울대학교 천문학과를 졸업한 후 서강대학교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디자인학(과학전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과학동아> 기자, <디지털타임스> 경제과학부장, 동아사이언스 본부장 겸 과학문화연구센터 소장을 지냈으며, 국립대구과학관에서 미래 과학자와 시민들을 위한 과학관 운영과 과학소통에 힘쓰고 있다.


※ 해당 기고 글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발간하는 월간 <과학과기술> 1월호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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