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연 60주년 연구자의 회고①] 김병구 박사의 뒷이야기
"한국 과학기술자 모국 방문단 참여 후 고국 발전상서 희망"
"지도교수, 고민말고 귀국하라 자네가 꼭 필요해" 조언

1959년 3월 1일 서울공대 4호관에서 개소식을 갖고 출범한 한국원자력연구원. 올해로 설립 60주년을 맞았습니다. 1인당 국민 소득 60달러도 안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이 연구용 원자로 'TRIGA Mark-Ⅱ' 도입을 결정하며 최첨단 과학인 '원자력' 기술 연구에 나섰습니다. 1984년 국내 기술로 개발한 중수로 핵연료를 월성1호기에 장전하며 핵연료 국산화를 본격화했고요. 이어 1995년 한국표준형원전(KSNP)으로 울진 3, 4호기가 건설되고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가 임계치에 이르며 우리나라는 원자력 기술자립의 이정표를 새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원자력 연구 50년만인 2009년 400억 달러 규모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 발전사업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한국은 원자력 수출국으로 원자력 기술 강국 반열에 올랐습니다.
 
원전 기술자립까지 많은 연구자들의 열정, 노력이 함께 했습니다. 필자 김병구 박사는 '기술 개발에 실패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원자력 기술자립 최전선에서 연구자로 참여했었고요. 은퇴 후에는 한국형 원전을 수출한 UAE에서 자신이 배웠던 상용 원자로 계통 설계 기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必설계기술자립의 꿈'을 다시금 펼쳤습니다. 김 박사는 최근 원자력학자로서, 연구자로서 자신의 삶을 담은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중 원자력연 출범 60주년을 맞아 원자력 기술자립 이야기 부분을 정리해 본지에 연재키로 했습니다. 함께 보시죠.<편집자 편지>    

◆ 제1차 오일 쇼크, 재미 과학기술자로 모국 방문

196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만 해도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될지 몰랐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을 졸업하고 미우주항공국(NASA)에 취직할 때만 해도 계속 미국에서 거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부부의 직계가족이 모두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극히 소소해 보이는 우연이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든다. 그중 하나가 1973년 10월에 일어난 제1차 오일쇼크다. 미국과 중동국가들 사이에 발생한 정치적 갈등은 급기야 사우디아라비아의 대 미국 석유 금수조치로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도 직격탄을 맞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력 생산의 거의 대부분을 화력 발전에 의존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전력 생산량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정부는 뭔가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 모색의 일환으로 떠오른 것이 원자력이었다. 1973년 착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 고리 원전 1호기는 이런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1974년 8월, 미국의 재미한국과학기술자협회(Korean Scientists & Engineers in America)는 한국 정부 지원으로 제1차 '한국 과학기술자 모국 방문단'을 구성했다.

방문단의 구성 취지는 한국 근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재미 과학자들을 본국으로 초청해 우리나라의 산업시설을 소개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속내는 미국에서 공부한 유능한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을 국내로 스카우트해서 첨단 기술 분야에 활용하겠다는 데 있었다. 미국 전역에서 시찰단을 모집했는데 총 300여명이 참여했다.

이 1차 방문단 속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나이가 30세, 방문단 가운데 최연소였다. 우리는 747 점보 전세 여객기를 타고 국내로 들어왔다.

국내에 들어와 산업시설들을 둘러보며 크게 놀란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산이었다. 196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11년만에 다시 고국의 산하를 보게 됐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떠날 당시 한국의 산은 온통 벌거숭이였다. 전쟁과 지나친 남획으로 대부분의 산들이 나무 한그루 없는 황폐한 민둥산이었다. 그런데 11년 만에 되돌아와 보니 울창한 수목이 고국의 산을 빼곡하게 뒤덮고 있었다. 감동적이었다.

둘째는 고리 원자력 1호기 공사 현장이었다. 그때는 토목·기계공사가 막 시작되던 시점이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고리는 원래 부산 인근의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단군 이래 최대의 건설공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푸르게 변한 고국의 강산과 역동적인 건설 현장의 활기 속에서 한국의 미래를 보았다. 그것은 하나의 희망이었다.

한국은 더 이상 내가 떠날 당시의 그 한국이 아니었다. 11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또 다른 한국이었던 것이다.

1959년 3월 1일 한국원자력연구소(현재 한국원자력연구원) 개소식.<사진=한국원자력연구원 50년사 중>
1959년 3월 1일 한국원자력연구소(현재 한국원자력연구원) 개소식.<사진=한국원자력연구원 50년사 중>
◆ 지도교수 "고민 말고 귀국하라 바로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해"

처음 모국 방문단에 지원했을 때 사실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 당시 나는 미국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미우주항공국(NASA)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자력과 별로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고리 건설 현장에서 본 원자력 발전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원자력 발전은 대단히 복합적인 시스템이었다. 직접적으로 우라늄 붕괴에 관여하는 핵물리는 전체 공정의 일부분이었고, 실제적으로 우라늄을 쪼개 열을 발생시키고 이 열을 이용해 증기터빈을 돌리고 전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토목, 기계, 전기를 아우르는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과정이었다.

특히 우라늄 붕괴 과정에서 고온·고압을 안정적으로 통제하려면 기계의 부식, 진동 마모, 피로 파괴 등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기술력이 관건이었다. 즉, 핵물리를 바탕으로 한 기계공학분야가 제대로 뒷받침이 되어야만 안전한 원자력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확인하고 다른 방문단원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미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후, 나는 태릉의 한국원자력연로부터 영구 귀국 초청장을 받았다. 고민이 되었다. 나는 NASA에서 화성으로 무인위성을 쏘아 보내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교인 캘리포니아 공대의 지도교수를 찾아가 상담했다. 기계과 Caughey 지도교수는 한참 동안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더니 "고민하지 말고 귀국하라"고 권했다. 우라늄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열을 안정적으로 통제하고 전기로 변환시키기 위해서는 기계공학적인 측면이 대단히 중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바로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조언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귀국을 결심했다. 하지만 아내를 설득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1975년, 바로 베트남이 공산화 되던 시점이라 더욱 결심이 어려웠다.  '내가 군대를 안 갔으니 2년만 국가를 위해 일하고 그 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지는 당신이 결정하라'고 아내를 설득해 어렵사리 1975년 귀국길에 올랐다.

지금은 영구 정지된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 조감도.<사진=한국원자력연구원 50년사 중>
지금은 영구 정지된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 조감도.<사진=한국원자력연구원 50년사 중>
◆ 원전 기술의 시작, 세 명의 거인(巨人)

뿌리 없는 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원전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나라의 원자력이 있기까지는 지난 60여년 간 수많은 인재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그 중 시대를 초월해 원자력 강국의 초석을 다진 세 거인(巨人)이 있다면 나는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과 한필순 한국원자력연구소(현재 한국원자력연구원) 소장을 꼽는다.

정치적인 평가는 관점에 따라 많이 다를 수 있지만, 원자력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이 세 사람이 없었다면 오늘의 '원자력 강국' 불가능했다.

1950년대 후반 이승만 대통령은 80대 고령의 나이에도 "우리도 Atomic Machine(원전)을 쓰는 백성이 됩시다"며 원자력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는 한국전쟁 직후로 당장 하루 세끼 먹을 것을 걱정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그는 원자력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 나라의 장래 에너지원으로 원자력의 첫 불씨를 심어준 이승만의 혜안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 원자력을 상상하기 어렵다.

1959년 신설된 서울공대 원자력공학과는 서울대 학과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입학 커트라인을 갖고 있었고 덕분에 전국 최고의 수재들을 원자력 재원으로 발굴 양성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어 원자력연를 설립하고 관련법과 정부조직도 정비했다. 당시에 원자력을 이 땅에 도입한 1세대 기술자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이 원자력 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1차 오일 쇼크를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은 고리 1호기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전력개발정책을 석유 중심에서 원자력 중심으로 바꾼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은 당시의 한반도 정세 때문에 원자력을 오직 평화적인 목적으로만 이용한다는 원칙을 세운 점이다. 70년대 중반까지도 해도 북한의 군사력은 남한을 압도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은 이미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박 대통령은 이런 국내외의 압력 속에서도 과감하게 원자력의 군사적 이용을 포기했다. 그리고 원자력의 평화적인 목적, 즉 원자력의 연구와 이용을 에너지 생산기술 분야로만 국한시켰다.

오늘날 남북 간의 번영과 고립, 밝음과 어두움의 갈림도 당시 박 대통령과 김일성의 원자력 정책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전자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추구한데 반해 후자는 군사적 목적에만 치중한 것이 오늘의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현재 남한과 북한은 민주화와 경제개발, 외교력과 국민 생활수준에서 서로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3대 세습 정권인 북한은 2018년 자체 개발한 핵무기와 미사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으며 '비핵화'를 통한 핵무기의 완전 포기와 경제개발의 기로에 서서 미국과 벼랑 끝 협상을 벌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필순 소장이다. 1980년대 초 한필순과 원자력의 만남은 핵연료와 원자로 계통의 핵심 원전기술자립과 원전 국산화의 효시를 이루어낸다. 그 결과 오늘날 국내에 25기의 원전이 가동 중에 있고 해외에 연구용 원자로와 발전용 원전의 수출까지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한필순 전 원자력연 소장은 국내 원전 핵연료와 원전 기술 자립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사진=대덕넷 DB>
한필순 전 원자력연 소장은 국내 원전 핵연료와 원전 기술 자립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사진=대덕넷 DB>
인간적인 측면에서 한필순은 기술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움직여서 자신의 능력을 120퍼센트 발휘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1979년 박 대통령이 서거하고 제5공화국이 태동하면서 한국 원자력은 존폐의 위기로 내몰린다.

그 여파로 연구자들이 원자력연를 떠날 준비를 하던 시절, 그의 진솔함에 이끌려 마음을 고쳐먹은 연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연구원에 남은 연구자들과 함께 그는 작은 사업부터 큰 사업까지 많은 프로젝트들을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중수형 핵연료 국산화를 필두로 경수형 핵연료 설계·제작 사업, 경수형 원자로 계통설계 사업 등 그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프로젝트들은 별로 없었다.

한 소장은 평소 입버릇처럼 "원자력은 나라의 통치자가 관심을 가져야 살아난다"고 말했다. 그의 노력으로 누가 봐도 불가능했던 프로젝트들이 거짓말처럼 풀려 나갔다. 원자력 연구기관인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상용원전 건설사업의 핵심기술에 깊이 참여하게 된 것도 그의 노력과 이를 인정한 최고 통수권자의 믿음과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2년 동안 연구원이 핵연료와 원자로 계통설계사업을 주관했던 덕에 우수한 인재들이 확보되었고, 이들을 통한 기술의 축적으로 우리나라의 원전기술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초기 외국의 원자로를 그대로 모방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직접 신형 원자로를 설계할 수 있는 단계까지 도약하게 되었다. 90년대 말 연구원이 주관하던 원전 계통설계사업이 국영산업체로 이관됨으로써 산업체는 대형 원전의 상용화를 좀 더 효율적으로 이룩할 수 있었고, 연구원은 국가연구개발기관이라는 본연의 업무에 더욱 충실할 수 있었다.

이렇게 원전의 핵심 기술인 원자로 계통설계기술과 핵연료 설계기술을 갖추었기에 새로운 신형 연구로나 차세대 첨단 발전로의 설계 건설 사업을 국내 주도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후 계속해서 10여기의 원전들을 국내 기술 주도로 주어진 공기와 예산에 맞춰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한전의 대형 사업 관리 능력과 원자력연의 기술력이 결합됨으로써 이루어낼 수 있었던 쾌거였다.

<다음 편에서는 '필(必)설계기술자립'과 윈저(Windsor)의 한인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김병구 박사.<사진=대덕넷 DB>
김병구 박사.<사진=대덕넷 DB>
김병구 박사는 해방 직전 서울에서 태어났다. 배 만드는 기술자가 되고 싶어 서울공대 조선공학과에 입학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마쳤다. 미우주항공국(NASA) Jet Propulsion Lab에서 화성 탐사선(Viking Project) 테스트 엔지니어로 3년간 근무했다.
1974년 정부의 '재미과학기술자 모국 방문단' 참여 계기로 귀국해서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영광(한빛)3·4호기 원자로설계 사업 책임자로 한국형 원전 국산화 기술자립에 기여했다. 2002년부터 7년간 IAEA(국제원자력기구) 기술협력국장으로 일했다. 2009년 UAE(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출로 신설된 아부다비 칼리파(Khalifa) 국립대학 원자력 공학과에 교수로 초빙돼 아랍 학생들을 가르쳤다. 2013년부터 사우디 정부 산하 원자력/신재생에너지청(K.A.CARE)에서 원자력 자문관으로 5년간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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