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박용기/한국표준과학연구원 초빙연구원

입춘이 지나도 계절이 거꾸로 가려는 듯 추위가 유난히 오래 가는 겨울이다. 어쩌면 2월은 들판이나 숲 속의 나무와 풀들에게 가장 힘든 시기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속되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언젠가 다가올 봄날에 찾아올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나무와 풀들은 삶을 이어가고 있다. 2월에 남겨진 자연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을 가슴으로 느껴보고 싶어 겨울 숲으로 가 2월을 살아가고 있는 풀과 나무들을 만나 보았다.

2월의 숲-1/가막살나무_PENTAX K-1, 18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400 s, ISO100
2월의 숲-1/가막살나무_PENTAX K-1, 18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400 s, ISO100
2월의 숲에서 곱게 나이든 가막살나무 열매 위에 따사로운 햇살이 한웅큼 뿌려지면, 마술처럼 붉은 열매들은 생기를 얻고 멀리 어딘가에서 오고 있을 봄 이야기를 시작한다. 

2월의 숲/ 박용기

삶이 겨울처럼 춥게 느껴질 때면
2월의 숲으로 간다

모든 것이 숨을 죽이고
침묵의 숨소리만
마른 나무 가지 사이를 맴돌고
마른 풀 위엔
죽음의 그림자 덮여 있는 숲 속의 오후

하지만 가만히 숲에 서서
오후의 햇살을 가슴에 담고
조용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겨울 나무 끝에 매달린 삶의 흔적들이
하나씩 이야기를 시작한다

추위 속에서도 맨몸으로
생명의 기운을 녹여내며
마지막 시간을 견디고 있는
마르고 퇴색한 아그배나무 열매들

지난 날들의 기억들을
고이 접어 만든 부케를 들고
꽃 피던 시절보다도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있는 나무수국

찬 바람 속에서도 따사로움을 잃지 않는
오후의 햇살 한 웅큼으로도
루비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는
늙은 가막살나무 열매들

삶은 언제라도
보석처럼 가치 있고 아름답다고
조용히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겨울 나무들의 이야기 속에
어느새 추위는 사라지고
2월의 숲에서는
생명의 온기가 가득히
온 몸에 전해 온다

삶이 겨울처럼 춥게 느껴질 때면
2월의 숲으로 가
추운 가슴에 생명의 온기를 채워온다

2월의 숲-2/아그배나무_PENTAX K-1, 18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320 s, ISO100
2월의 숲-2/아그배나무_PENTAX K-1, 18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320 s, ISO100
2월의 숲에서는 추위 속에서도 맨몸으로 생명의 기운을 녹여내며 마지막 시간을 견디고 있는 마르고 퇴색한 아그배나무 열매들도 만날 수 있다.

2월의 숲-3/나무수국_PENTAX K-1, 18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160 s, ISO100
2월의 숲-3/나무수국_PENTAX K-1, 18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160 s, ISO100
지난 날들의 기억들을 고이 접어 만든 부케를 들고 꽃 피던 시절보다도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있는 나무수국의 이야기를 듣는 일도 2월의 숲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2월의 삶-1/마른 부추꽃의 비상_PENTAX K-1,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7.1, 1/200 s, ISO100, 다중촬영
2월의 삶-1/마른 부추꽃의 비상_PENTAX K-1,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7.1, 1/200 s, ISO100, 다중촬영
아직 한겨울 추위가 한창인 2월이지만, 마른 부추꽃 송이 위에 비스듬이 비치는 늦은 오후의 햇살은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따뜻한 봄이 올 거라고 희망의 말을 전한다. 어딘가에 뿌려졌을 까만 씨들 속에서 봄이 오면 연록의 부추싹들이 돋아날 것이다. 아직도 겨울 바람은 차지만 마른 꽃은 새로운 삶을 위하여 남은 씨앗을 떨구려 비상을 꿈꾼다. 마치 얼음판 위에서 멋진 점프를 시도하는 피겨스케이트 선수처럼.

2월의 삶-2/목련의 겨울꽃_PENTAX K-1, 18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320 s, ISO100
2월의 삶-2/목련의 겨울꽃_PENTAX K-1, 18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320 s, ISO100
하얗게 눈이 내린 2월의 아침이면 봄을 기다리는 목련의 겨울눈 위에 탐스러운 눈꽃이 피어난다. 그래도 저만치 숲 속에서는 봄이 오고 있다고 느껴져서일까? 아침 햇볕 속에 핀 눈꽃은 포근하게만 느껴진다. 2월의 눈은 그래서 희망이다. 하지만 2월의 눈은 소중한 걸 얻기 위해서는 기다림도 필요하다는 것을 일러준다.

2월의 삶-2/단풍나무_PENTAX K-1, 18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200 s, ISO100
2월의 삶-2/단풍나무_PENTAX K-1, 18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200 s, ISO100
가을의 모습 그대로 박제된 단풍나무 위에 2월의 눈이 포근한 솜 이불처럼 덮이면, 추위 속에서도 따사로운 아침 햇빛은 어느새 눈 밭 저 건너편 숲 속 나무들 사이 사이에 봄 기운이 담긴 작은 등불을 켜기 시작한다. 봄을 기다리며 견디어 온 긴 추위의 끝도 이제 그리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신호등처럼. 벌써 2월도 중순을 넘어서고 있다.

2월의 삶-3/겨울나무 가지와 고드름_PENTAX K-1, 18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320 s, ISO100
2월의 삶-3/겨울나무 가지와 고드름_PENTAX K-1, 18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320 s, ISO100
얼마 전 내린 2월의 눈이 겨울 나무 가지 끝에 고드름을 만들어 놓았다. 겨울이면 초가지붕 끝에 길다랗게 주렁주렁 열렸던 고드름을 따서 놀던 어릴 적 추억이 아련히 가슴 속에 스며들었다. 가는 2월이 아쉬워서일까? 겨울 나무 끝에 매달린 고드름이 눈물처럼 흘러 내린다.

유난히 짧은 달이 참 빨리도 지나가는 것 같아 무언가 부산하다. 아직 봄을 맞을 준비가 덜 되었는데 벌써 봄은 겨울 나무 가지 끝에서 이렇게 겨울을 녹여내고 있다. 아마 우리 마음 속 겨울도 이렇게 녹아 흘러 내려야 새 봄의 싹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오세영 시인의 시처럼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없다. 오늘은 매화 가지 끝을 살펴보러 나가야겠다.

2월/ 오세영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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