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수 박사 대덕특구 방문···日 연구자 '자발적 민주화' 사례 전달
22일 ETRI 국제회의실서 '리켄 과학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특강
리켄 '평연구원회의' 등 연구 문화 언급 "과학자, 결코 혼자 못산다"

22일 김유수 리켄 박사가 대덕연구단지를 찾아 '리켄의 과학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주제로 특강을 가졌다.<사진=박은희 기자>
22일 김유수 리켄 박사가 대덕연구단지를 찾아 '리켄의 과학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주제로 특강을 가졌다.<사진=박은희 기자>
"일본의 과학기술 경쟁력이요? 과학자들이 스스로 창피함을 안다는 것입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연구에 창피함을 느껴야 합니다. 창피함을 느낀다면 더욱 노력하고, 창피함을 느끼지 못하면 사기꾼으로 전락합니다."

"리켄 100년 역사 속에는 커뮤니케이션 장치가 있습니다. 성별·나이·직책 등을 따지지 않고 연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연구실 모든 직원이 매주 금요일 저녁 파티를 즐기며 소통하는 문화 등이 기본입니다. 연구자들의 연대감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합치고 있죠."

일본 이화학연구소(리켄, RIKEN)에서 연구원으로서 가장 높은 직책인 종신연구원을 맡고 있는 김유수 박사. 일본에서 과학자로 22년 동안 경험한 그가 꼽은 리켄의 연구 자율화 열쇠는 '창피함'과 '연대'다.

김유수 박사는 22일 오후 3시 대덕연구단지 ETRI 국제회의실에서 '리켄의 과학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주제로 일본 과학기술 문화에 대해 소개했다. 이날 ETRI 연구자를 비롯해 산·학·연 과학기술계 관계자 80여명이 현장을 찾았다.

그는 리켄 연구자들이 자발적 민주화를 만들어낸 '평연구자회의'를 소개했다.

리켄의 의사결정기구는 ▲이사회(간부급) ▲과학자회의(주임연구원급) ▲평연구원회의(일반연구원을 비롯해 주임연구원·PI 포함) 등 3가지다. 주목할 기구는 평연구원회의다. 이는 리켄의 조직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조직으로 공식적인 권한도 없지만 힘은 막강하다. 이들은 스스로 목소리를 내며 연구 환경을 합리적으로 개선하는 기구다.

지난 2013년 평연구원회의 의장이었던 김유수 박사는 "주임연구원급을 비롯해 PI, 일반 연구원들이 평연구원회의를 만들었다. 과학자회의와 견제·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라며 "기구에 권한이 없어도 환경개선, 위탁연구, 자문 등의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지난 2014년 벌어진 'STAP 세포 조작 사건' 발생 당시 평연구원회의에서도 일부 역할을 했다. 당시 일본 국민은 연구적 주제에서 벗어나 예능적 주제에 관심이 쏠렸다. 리켄 본부에서 징계위원회를 구성하고 연구부정재발방지위원회를 가동했다. 평연구원회의 대표자가 위원으로 활동했다. 연구부정을 학술적인 입장에서 밝혀내며 국민의 관심을 예능에서 과학으로 돌렸다.

김 박사는 "연구부정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연구부정을 갖도록 만드는 마음은 막을 수 있겠다는 결론이었다"라며 "연구원들 스스로 환경을 개선하며 막강한 힘을 만들어 오고 있다. 이는 연구 자율화의 열쇠"라고 말했다.

김 박사는 평연구원회의 사례 소개를 이어갔다. 지난 2009년 일본의 자민당이 물러나고 민주당이 집권할 당시 정부는 리켄의 4가지 연구 항목의 예산을 삭감키로 했다. 그중 하나는 '슈퍼컴퓨터' 부문으로 성능이 세계 1위를 달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국회의원은 리켄 연구자들에게 "슈퍼컴퓨터 성능이 꼭 세계 1위여야만 하는가? 2위 하면 안되는가?"라고 말하며 예산을 줄이려고 했지만 리켄 연구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평연구원회의는 시민들의 입장을 모아 국회에 제안하는 '퍼블릭 코멘트' 제도를 운용했다. 일본 국민에게 SNS 등으로 슈퍼컴퓨터 중요성을 알리고 공감대를 확보했다. 그 결과 90% 이상이 슈퍼컴퓨터 연구를 지속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였고 예산 삭감은 취소됐다.

그는 "리켄의 과학자들은 조직 간의 '연대'로 살아간다"라며 "결국 과학자들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서로 연대할 수밖에 없다. 과학자들이 연대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리켄과 산업기술종합연구소(AIST)와의 공동연구 사례도 언급했다.

지난 2016년 12월 양기관은 정부로부터 '일본의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라'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리켄과 응용과학을 연구하는 산업기술종합연구소는 미션 자체가 서로 달랐다.

김 박사에 따르면 일반적인 공동연구 과정은 '연구자가 잘하는 연구 모색'→'융합 가능한 연구자 발굴'→'공동 미션 설계'→'공동연구'→'미래 문제해결' 등의 순서다.

미션이 다른 양기관이 공동연구를 위해 선택한 방법은 일반적인 과정의 역순이다. '미래 문제해결'에 초점을 맞췄다. 다가오는 2050년 일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를 먼저 고민했다. 이후 일본의 미래 문제 해결을 위해 융합 연구자를 찾고 각 연구자의 주무기를 모색했다.

그결과 2050년 일본의 미래 문제는 '지구온난화'와 '노령화'로 압축됐다. 전세계 인구가 늘어나는 가운데 일본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또 지난 1978년부터 매일 빙하의 면적을 측정하며 해수면 분포를 예측한 결과 지구온난화로 인해 2050년에는 일본 일부가 잠긴다는 분석때문이다.

김 박사는 "공동연구 설계와 제안의 트렌드가 변화하고 있다. 당장 일본의 미래에 닥칠 위기를 예측하며 연구 과제를 설계하고 있다"라며 "과학이 서바이벌을 위한 과학이 됐다. 문제해결을 위한 과학이다"고 말했다.

◆ 리켄은 어떻게 '과학자의 낙원'이 됐는가?

"리켄 연구자들에게는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암묵적 찬성이다'라는 마인드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이들이 자발적 민주화를 만들어낸 원동력입니다. 연구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목소리 내고 있습니다. 연구 자율화의 열쇠입니다." 

김유수 박사가 리켄 연구자들이 연구 자율화를 갖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다.<사진=박은희 기자>
김유수 박사가 리켄 연구자들이 연구 자율화를 갖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다.<사진=박은희 기자>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일본에 과학기술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1917년 '재단법인 이화학연구소'가 세워진다.

리켄은 일본 출신으로 미국에서 과학자·사업가로 성공한 다카미네 죠키치(高峰讓吉)에 의해 설립된다.

이후 1921년 리켄의 3대 소장 오코치 마사토시(大河内正敏)가 취임해 25년간 소장직을 재임했다. 그는 주임연구원 제도를 실시하며 연구체제 개혁에 착수했다.

김유수 박사에 따르면 '자유와 평등'으로 조직 활성화에 성공했지만 리켄의 재정난은 심각했다. 리켄을 먹여 살리기 위해 기술이전에 의한 제품개발이 필요했던 것.

마침 스즈키 주임연구실에서 비타민A를 추출하는 기술개발에 성공했다. 4개월 만에 '리켄 비타민'이라는 이름으로 상업화에 대성공을 이뤘다.

김 박사는 "자유와 평등으로 하고 싶은 연구를 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돈이 부족했다. 돈을 위해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라며 "리켄 비타민 상업화 이후 기업 63개, 공장 121개 등을 세우는 등 '리켄 재벌'로 탈바꿈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연구소가 기초연구를 하고 상용화해 돈을 버는 이상적인 선순환을 만들어냈다"라며 "인재가 모여들고 연구자들에게 자유로운 연구가 보장되는 낙원이라는 별칭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이날 김유수 박사는 강연 이후 참석자들과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다. 플로어에서 리켄의 연구실 평가 시스템에 대해 묻자 그는 "주임연구실 평가는 7년에 한 번 이뤄진다. 논문을 많이 썼다는 정량적 평가가 아닌 연구의 가치를 평가한다"라며 "정량적 평가를 위해 데이터를 제출하는 경우는 없다"고 답변했다.

또 일본이 노벨상을 수상한 경쟁력에 대한 질문에 그는 "연구자 스스로가 창피함을 안다는 것"이라며 "선수들끼리는 보면 알 수 있다. 창피함을 느끼면 더욱 열심히 하고 창피함을 못 느끼면 이를 가지고 사기 치려고 한다. 창피함을 아는 것이 경쟁력의 요소"라고 응답했다.

이어 그는 "환경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은 환경이 만든다. 리켄이 환경을 만들었고 다시 연구자들이 환경을 만들고 있다"라며 "아직까지도 리켄 연구자들은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이를 위해 결국 과학자들의 연대가 가장 중요하다"고 피력했다.

◆ "'창피함' 단어에 가슴 철렁···연구자 삶 되돌아보는 시간"

특강 이후에도 참석자들과 '토크 콘서트' 자리도 마련됐다. 참가자들은 허심탄회한 대화에서 다양한 소감을 밝혔다. 

특강에 참석한 박한표 대전문화연대 대표는 "연구자들이 '창피함'을 느껴야 한다는 말이 충격적이었다. 스스로 거울을 가지고 자신에게도 부끄럽지 않도록 애를 써야 함을 느꼈다"라며 "리켄 연구자들이 평연구원회의를 만들어 서로 소통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소회했다.

이어 그는 "연구자들이 미래 사회를 상상하고 그때 발생할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기초과학 연구자라도 사회와 인류에 기여하는 연구를 하는 모습이 뜻깊다"라며 "우리의 일반적인 삶에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고 덧붙였다.

지명훈 동아일보 대전충청취재본부 부장은 "과학자란 무엇이고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에 대해 질문을 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라며 "창피함을 알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점에서 많은 자극이 됐다"고 언급했다.

박석주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정책본부 전문위원은 "강연을 통해 연구자들이 연대하며 같이, 제대로 할 수 있는 생태계의 중요성을 절감했다"라며 "생태계 형성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정재숙 ETRI 박사는 "리켄과 국내 연구소의 연구환경이 비슷하게 열악하다는 것을 알았다"라며 "결국 중요한 것은 연구자의 자존심과 명예다. 이를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순석 ETRI 커뮤니케이션전략부 부장은 "'연구자의 창피함' 단어를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라며 "대덕연구단지 내에서 연대를 강화할 방안을 찾아 나서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참가자들의 모습. 국내 산·학·연 과학기술기술계 관계자 80여 명이 참석했다.<사진=박은희 기자>
이날 행사에 참여한 참가자들의 모습. 국내 산·학·연 과학기술기술계 관계자 80여 명이 참석했다.<사진=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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