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화 전략과 자국 학문 체계의 정립의 절묘한 조화
일반 국민들의 독서 등 튼실한 지식기반도 큰 역할

일본이 2년 연속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사진은 일본 NHK 방송 캡쳐.<사진=대덕넷>
일본이 2년 연속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사진은 일본 NHK 방송 캡쳐.<사진=대덕넷>
일본이 올해도 노벨 과학상을 탔다. 이웃 나라의 노벨상 수상은 경쟁자로 생각하는 우리에게는 불편한 진실(?)이다. 과학은 국가 생존을 보증해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핵폭탄 이상이다. 그런 점에서 이웃 나라 일본의 성공은 아주 좋은 롤모델이다. 3편에 걸쳐 우리가 노벨 과학상을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본의 사례를 갖고 알아보고자 한다. 1편 어떻게 일본 과학은 노벨상을 탔는가? 2편 NHK 등을 통해 본 일본의 과학 대중화 노력. 3편 한국,어떻게 할 것인가?<편집자 주>

매해 일본의 노벨 과학상 수상 소식에 우리나라의 과학자는 물론 국민들도 몸살을 앓는다. 왜 우리는 안될까하고 자문하고 번민한다. 그렇지만 늘 대증요법으로 그친다. 한 번 요란하게 점검하고는 근본 대책은 마련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린다. 그러다가 노벨상이 발표되는 10월이 오면 다시금 경기를 일으키고 또 일상으로 돌아간다. 과학계도, 언론도, 국민도 근본이유를 파 헤치지 않고 한바탕 한풀이 비슷하게 하고는 쿨하게(?) 잊는다고 할까?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몰라 수박 겉핥기로 끝내는 것일 수도 있고, 근본 원인을 알기는 하겠는데 그러려면 사회 전반적인 부분을 다 바꾸어야 하므로 체념하고 돌아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싶다고, 못한다고 해서 세상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좋지만 세상은 그렇게 자비롭지 않다는 것은 역사가 알려준다. 내 실력이 없는 한, 주체적 역량이 없는 한 그런 나라와 공동체는 원하는 삶을 살 수 없고, 다른 나라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일본 노벨상에 관심을 갖는 것도 부러워서만이 아니고 생존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노벨상은 장식물이 아니다. 주권을 지킬 수 있다는 하나의 상징물이다. 물론 헝가리처럼 노벨상 수상자를 7명이나 냈지만 이들이 다 외국으로 옮길 수 밖에 없는 특수 상황을 가진 나라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벨 과학상 수상국들이 선진국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노벨상은 국가 생존의 바로미터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아쉬워하는 것은 그런 점 때문이다. 그런만큼 노벨 과학상에 대한 접근도 달라져야 한다. 첨단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만 미뤄서도 안되고, 돈 쏟아부었으니 결과만 바래서는 안되고, 어쩌다 하나의 상을 탔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나는 일도 아니다.

국가 건립의 일환으로 과학에 대한 투자가 이뤄져야 하고, 과학이 상식을 넘어 교양이 되어야 한다.과학자가 연구에 사명감을 가져야 하며, 연구의 즐거움 속에 푹 빠져야 한다. 동시에 과학계만의 노력으로는 안되고 폭 넓고 깊이 있는 지식 사회가 형성돼야 하고 국민들이 배움의 즐거움을 알아야 한다.

성리학만을 지상 최고의 학문으로 착각하다가 망한 나라의 후예로, 낯선 과학을 온몸으로 소화하고 DNA로까지 만드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가야할 길이고, 이제는 과거에 비해 물적 토대가 마련됐다.이제는 우리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의지를 굳게 하려면 원인 분석이 잘돼야 한다.

일본이 발달한 서양 과학을 접하며 가장 잘 한 것의 하나가 온국민이 과학을 필수 요소를 넘어 충분 조건으로 인지했다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후 구미에 파견된 이와쿠라 사절단은 물론이고, 메이지 유신 이전의 막부와 번(藩) 정부도 이국 문물을 두려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활용해 생존을 도모한다는 인식을 가졌다. 그래서 맹렬하게 서양 배우기에 나섰다. 번 정부는 막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밀항으로 번의 인재들을 유럽으로 보내 신학문을 배우도록 했다. 동시에 서양의 기술자와 과학자들을 초청해 새로운 문물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 이후 유학생이 돌아오고, 일본내에서 인재들이 양성되면서는 자체적으로 학문체계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일본 과학의 성공은 아시아에는 큰 의미를 지닌다. 근대 과학의 출발점과 완성점은 모두 서양이다. 한 중 일의 동양 3국은 근대 과학에 있어 피동적 존재이다. 그런 가운데 근대 과학을 국내에 착근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통해 국가 번영을 이뤄냈고, 더 나아가 서양과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현대 과학을 리드하는 존재가 됐다는 점에서 일본은 훌륭한 롤 모델이다. 일본의 과학사에 대한 한국어 서적은 빈약하다. 그런 가운데 단연 도움되는 책은 현재 히로시마 공대 교수인 김범성 박사의 '어떻게 일본 과학은 노벨상을 탔는가'(살림지식총서 379호)이다.시리즈 기사의 제목도 이 책 내용이 좋아 그대로 인용했다.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점 가운데 하나는 일본은 우리와 눈높이가 달랐다는 점이다. 우리는 후발 주자로 목표치가 낮았다. 후발 주자의 이점은 선발 주자들이 궤적에서 장점을 취하고 단점은 버리는 것일 터인데 일단 시작하는 것이 바빴겠지만 우리는 선발 주자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다. 일본의 눈높이가 우리와 다른 것은 일본은 일찍부터 본인들이 서양과 동등한 존재가 되기를 바랬던데 있다. 일본은 일본 학문의 자기 완결성을 목표로 삼았다. 일본 민족이 서양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자부심을 갖고 외국에 유학하기 보다는 내부에서 서양에 맞서는 이론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졌다.

대표적 사례가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끼이다. 그는 유학 경험이 없는 순수한 일본 국내파이다. 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노벨상 수상 직전 미국에 연구원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의 고등연구원에서 연구중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 가게된 것은 이미 일본에서의 연구로 중간자 이론이 나오고 이것이 서양 과학자들로부터도 검증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결과였다.

그는 "세계의 과학자들에게 자신 있게 내놓을 만한 연구 성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외국에 가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중간자 이론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뒤인 1939년에 처음으로 외국을 가게된다. 일본을 세계 과학의 중요한 플레이어로 만들겠다는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우리가 우리보다 앞선 나라를 따라가는데 익숙하다면 일본은 목표 자체가 우리와 차원을 달리했다고 하겠다. 이는 국가의 지향점과 행동이 달랐던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근대 일본의 출발점이라할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이유는 독립 주권의 확립이었다. 외국으로부터의 주권을 침해받는 나라가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은 자신들이 책임지는 국가의 수립이었다. 정치인을 비롯해 지식인과 국민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과학자들도 독립적인 학문 체계 수립이 지상과제의 하나였다.

조선과 그 이후의 한국은,일본과 달랐다. 조선이나 그 뒤를 이은 한국에 공통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사대주의이다. 독자적인 국가 수립이 아니라 우리보다 큰 주체에 의존하면서 우리의 생존을 유지하려 했다. 조선에서는 명과 청이었고, 한국에서는 미국이다. 조선에서는 소중화를 자칭하며 성리학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었고, 한국에서는 미국의 아류 혹은 부속물로 만족했다. 이 때문에 주체적인 학문체계를 세우지 못했다. 인문계,이공계 가릴 것 없이 미국류를 수입하고, 유학 경험을 갖고 평생 위세를 부릴 생각에 지식인들이 만족해 했다. 미국이란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셈이다.
 
과학문화학자 장하석 캠브리지대 교수는 말한다. 한국은 서양 과학을 진리 아니면 수단으로 받아들였다고. 진리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서양 과학기술의 입증 과정에서의 논쟁은 알지 못하고, 논란이 끝나고 정리된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진리로 생각하다 보니 의심 않게 되며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변형 혹은 응용에 심리적 제약을 받게 된 것이다. 수단으로 여긴 것은 사업이나 취업 등 당장의 써먹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 있는 철학이나 논리는 관심이 없다보니 일회용 혹은 단기적 방안으로 여기는 것이다.

기업은 자신들이 축적의 시간을 들여 기술을 완성할 생각을 안하고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것만을 원하고,학생은 취업에 용이하다는 이유로 이공계를 택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외국 것을 베끼고,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하는 행태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일본은 과학을 국가 독립과 발전, 번영의 중요한 변수로 생각하는 만큼 전개 방법도 달랐다.전략이 있었고 그에 따라 역할분담을 했다. 의도적이었는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나 뒤에 돌아보니 그렇게 됐다. 한쪽은 선진 외부 세계와 일본 국내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고, 다른 한쪽은 외부의 선진문물을 기반으로 내적 역량을 강화하며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세워갔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입신양명은 자연스런 욕망이다.

그러나 일본의 유명 과학자 가운데 두 명은 자신의 연구도 연구지만 후학들을 외부 세계와 연계해주는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움직였다. 대표적 인물이 나가오카 한타로와 니시나 요시오.나가오카 한타로는 28세인 1893년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아시안인으로서의 한계를 느끼며 과학과 민족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그 영향으로 일본과학과 서구 주류과학의 접목이 필요함을 느끼고 그 일에 전념한다. 그는 과학을 통해 일본도 서양과 대등한 문명국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와 그의 제자의 노력으로 1922년 당시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이던 아인슈타인을 일본으로 초청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일본으로 오는 배안에서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게 되고,이 점은 그의 가치를 더욱 높였고, 일본 사람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에도 기름을 부은 셈이 됐다.일본에 도착해서는 43일간에 걸쳐 일본 전국을 돌면서 과학 강연을 했다.일본인들의 과학 마인드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다.

나카오카의 뒤를 이어 그의 제자인 니시나는 서양 물리학의 주류들을 일본으로 불러왔다.보아와 하이젤베르크,디렉 등등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이 그의 주선으로 방문했다.이들 외에도 좀머벨트,라포르테 등등도 찾아왔다.니시나는 나가오카의 추천으로 당시 유럽 최고 연구소이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연구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보어를 만났고,이 인연을 계기로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보어의 이론물리학 연구실에서 연구하며 이들 학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이들을 초청한 것이다.

해외의 석학들은 유카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치 등등 일본의 신진 과학자들에게 세례와 같은 영향을 주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급성장시켰다. 일부는 유학을 가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일본에 남아 연구했다. 유카와처럼 일본파가 뿌리 내릴 수 있게 된 것은 그와 같이 연구할 젊은 과학도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전통은 이후로도 이어져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일본내에서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서구의 과학과 같이 전쟁은 일본 과학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은 그동안 수입에 의존하던 화학공업제품을 들여올 수 없었다. 독일이 적대국이 되며 금수가 됐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으며 위기의식을 갖게 되고 과학연구의 자립을 국가정책으로 입안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에서도 군사상의 필요로 연구를 하게 됐고, 상당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원자폭탄으로 항복을 하게 되지만 이 때 쌓은 과학기술로 고속 성장을 이루며 세계 주류로 복귀하게 된다.

이와함께 사회 전반의 지식 수준과 이에 따른 지식 수용력도 과학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과학기술정책 연구소의 이정찬 박사는 '어떻게 일본은 많은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과학도들의 다양한 분야 독서와 독서 진흥을 통한 국민 전체의 사고력 증진이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한마디로 지식대국으로서의 기반이 노벨상 수상이란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2013년 OECD 국제성인역량 조사에서 일본은 언어,수리,컴퓨터 기반 문제해결 능력 등에 있어 24개 회원국 가운데 모두 1위를 차지해 종합 1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언어 10위,수리 14위,컴퓨터 기반 문제해결 8위로 종합 14위였다.

지식 대국 일본의 오늘의 뿌리는 매우 깊다. 조선 통신사 등에서 학습 열기가 느껴지지만 특히 존립의 위기를 느끼게 된 메이지 유신 전후의 학습 열풍은 일본을 지식 대국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렇게 축적된 지식은 20세기 후반 고도성장이란 빅뱅으로 나타나고, 장기불황이라고 엄살을 떨지만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 하고 있는 것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전후 서세동점은 일본인의 지식열에 기름을 끼얹었다.

메이지 유신전 네덜란드를 배우는 난학이 성행한데 이어 메이지 유신후 서양을 알리는 책들이 잇따라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 전후 서양의 모습을 담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1866년)이 1백만부,'학문에의 권장'(1872년)이 340만부가 팔렸다. 서구 문물을 배우려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미구회람실기'(米毆回覽實記)도 출판돼 국민 모두가 서양 문명을 알도록 했고,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당시 일본 인구 3000만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와 일본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것이 '해국도지'란 책의 번역과 보급 정도이다. 해국도지는 아편전쟁 직후 서양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동양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다. 아편전쟁을 촉발한 린쩌쉬와 그의 친구 웨이이안이 지은 것이다. 1844년 초판 50책, 1847년 60책, 1852년에 100책으로 완간됐다. 아시아권 최초로 세계 각국의 역사,지리,정치,경제,문화,군사에 관한 정보를 집대성한 백과사전으로 당시로서는 최신 정보의 보고였다. 일본은 이 책을 입수하자마자 번역해 막부를 비롯한 지도층이 제일 먼저 열람했고, 특히 페리제독 내항뒤에는 열독붐이 일어 21종의 번역서가 나올 정도로 일본인들의 서양관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도 이 책을 연행사를 통해 거의 같은 시기에 들여왔으나 일부 실학자들만이 이 책에 관심을 가졌을 뿐 집권층이나 일반인 등에게는 보급되지 못했다.

일반인들뿐 아니라 과학자들도 다방면의 독서를 통해 폭 넓은 지식과 교양을 축적했다. 유카와 히데키, 고시바 마사토시, 마스카와 도시히데, 고바야시 마코도, 야마나카 신야 등등은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해 다양한 서적을 읽었다. 이공계임에도 불구하고 철학, 문학과 같은 인문계 서적을 탐독해 시야를 넓혔고, 이는 획기적 발상과 창조적 연구 직관의 토대로 작용했다고 이정찬 박사는 밝혔다.

노벨 과학상은 일부 엘리트 과학자만의 능력 경쟁이 아니고 국민 전체의 지적 역량이 기반이 되는 결과물임을 인지할 때 우리가 갈 길은 아직 멀다고 하겠다. 과학자에 대한 지원도 필요하지만 국가가 생존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며, 국민 각자가 해야할 일은 무엇이며,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수용하며 그 가운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풍토의 조성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다음 편은 일본의 과학 저변에 대해 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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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쓰는데 참조가 된 책을 소개하고, 기회가 닿는대로 일독을 기원합니다.

어떻게 일본 과학은 노벨상을 탔는가. 살림지식총서 379호. 김범성 著
나카오카 & 유카와, 아시아에서 과학하기. 김영사. 김범성 著
뉴턴의 무정한 세계-우리 시각으로 재구성한 과학사. 돌베개. 정인경 著
조선을 탐한 사무라이. for book,이광훈 著

그리고 최근에 나온 책으로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일본 과학 역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지는 책.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부키. 고토 히데키 著, 허태성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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