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發 혁신 - 上]전기연 변화 중심은 '연구과제심의회'···내·외부 과제 평가 철저
"톱다운 과제 중심 장기투자···국가·사회적 파급력 없는 연구 그만"

경남 창원에 소재한 한국전기연구원이 최근 한국 과학기술계에 잔잔한 훈풍을 퍼뜨리고 있다. 쉽게 풀리지 않는 과학계의 고질적인 문제 실마리를 하나 둘씩 풀어나가면서 그 비결에 연구자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연구의 근본을 찾아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나가는 과정이 예사롭지 않다. 기관장은 욕먹을 각오로 나서고 있고, 구성원들은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공감을 하며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대덕넷은 창원發 전기연의 혁신이 어떤 과정을 밟고 있는지 그 중간과정을 취재했다. 上 - 전기연의 변신, 下 - 기관장 인터뷰 등의 순서로 기획기사를 연재한다. <편집자의 편지>

#사례 1. 한국전기연구원 신재생에너지 연구개발 부서의 모 박사. 모 대기업으로부터 소규모 단기 과제를 제안받았다. 과제 진행에 앞서 전기연 내부 연구과제심의회에 승인 과정에서 과제 진행 불가 판정을 받았다. 연구소 차원에서 더이상 소규모 개인연구자 중심의 과제는 진행하지 않기로 한 이유다.  

#사례 2. 인류가 가장 필요로 하지만, 출연연·기업에서 연구하고 있지 않은 전기융합 첨단 의료기기 기술개발 과제. 연구과제 최적임 책임자를 선정하기 위해 무려 일주일간 내부 연구과제심의회를 열었다. 경력·전공을 비롯해 연구철학·가치관·비전에 걸맞은 모 박사가 비로소 연구과제 최적임 책임자로 선정됐다. 모 박사에게 모든 책임과 권한을 부여한다. 별도의 내부 평가나 성과독촉 등의 압박이 전혀 없고, 단지 3년 단위로 중간 진행보고만 이뤄질 예정이다.

한국전기연구원(원장 박경엽) 혁신의 중심은 '내부'에 있다. '연구과제심의위원회'가 그 실체다. 잘못된 연구방향을 바로 잡는 기관 연구과제의 방향타 역할을 연구과제심의회를 통해 중심 잡고 있다. 

연구과제심의회가 심판이 돼서 바로 잡는 대상은 크게 보면 'PBS 제도'와 '기관고유 사업예산 과제'다.

PBS제도 등으로 만연화된 개별 연구자 중심체제는 전기연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었던 게 아니다.
또, 기관고유 사업 예산으로 연구과제를 제대로 수행하는데도 문제가 있었다. 두가지 고질적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결국 인류와 국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연구는 뒷전이고 당장의 눈 앞에 보이는 유행 연구과제가 지속되는 현상이었다.

이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기연은 연구과제심의회를 통해 과제선정 기준을 비롯한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우선 과제선정 기준을 명확히 했다.
연구과제심의회에서의 과제선정 기준은 '인류에 도움이 되는가?', '국가산업에 도움이 되는가?', '개인 연구자가 필요한 과제는 아닌가?' 등 3대 의제로 걸러진다. 과제선정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가차 없이 과제를 포기해야 한다. 국가·사회적으로 파급력이 크고, 인류에 혜택을 줄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연구 중심으로 과제가 선정된다.

또, 지난해부터 연구자들이 외부 과제를 받아오는 것을 제한하고 있다. 정부나 기업 등 외부로부터의 수탁과제도 다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연구과제심의회에서 심사를 받아야 진행할 수 있다. 이 역시 과제선정 기준에 근거해 평가가 이뤄진다. 

◆ 케이크 갈라먹기식 과제 단절···연심 최소 5일

전기연은 최근에 성공적으로 진행한 과제 4개와 실패한 과제 4개에 대한 성공·실패 요인을 조사했다. 그 결과 과제 성공 요인은 '제대로 된 과제'와 '제대로 된 책임자'로 압축됐다.

'제대로 된 과제'는 국가 미래 성장동력을 창출할 수 있는 산업 원천 분야를 말한다. 혹은 민간이 해결하기 힘든 난제 기술 분야, 국가 공익적 차원에서 해당 분야의 기술 판도를 바꿀 만큼 파급효과가 큰 대형·융복합·성장동력 과제가 그 대상이다.

'제대로 된 책임자'는 경력·전공을 비롯해 연구철학·가치관·비전·열정을 골고루 갖춘 연구자가 과제를 맡아야 성공적으로 연구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이유로 연구과제심의회에서 두 가지 요인을 만족하기 위해 최소 5일에서 길게는 일주일간 심의회를 갖는다.

특히 연구심의회를 갖기 10일 전쯤 과제 관련 자료를 위원회 참여 연구자들에게 배포한다. 미리 연구과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공부의 시간을 줘 제대로 과제가 심사될 수 있게 하기 위한 조치다.

연구심의회에서 과제에 대한 소신을 밝히지 못하면 과제 책임자 선정에서 탈락되기 일쑤다. 설렁설렁해서 과제가 선정될 분위기가 아니다. 냉혹하리만큼 엄격해 지고 있다. 그동안 케이크 갈라먹기식의 나눠먹기식 과제 수주 문화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전기연은 일단 과제가 선정되면, 과제 지원 예산과 기간에 상관없이 과제 책임자가 소신껏 책임지고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철저히 연구자에게 자율과 책임을 주는 것부터 출발한다. 전기연 원장을 비롯해 직할 부서장도 과제에 간섭하지 않는다. 과제가 종료될 때까지 전적으로 과제 책임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원칙을 세웠다. 

◆ 기술 판도 바꿀 '23개 톱다운 장기과제'  

전기연은 톱다운 과제를 중심으로 연구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전기연은 연구과제심의회를 거친 의료형 펨토초 레이저를 비롯해 불연성리튬이온전지, 공작기계용 정밀제어시스템 등 총 23개 과제를 톱다운 과제로 선정했다.

현재 전기연은 주요사업 예산의 30% 이상을 톱다운 과제에 우선 배분해 연구 주제의 분산을 막고, 핵심 연구 분야에 집중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전기연이 기존 4000MVA 대전력시험설비에 4000MVA 시설을 증설했다. 전체 용량은 8000MVA에 달하며 세계 3위 수준이다.<사진=전기연 제공>
전기연이 기존 4000MVA 대전력시험설비에 4000MVA 시설을 증설했다. 전체 용량은 8000MVA에 달하며 세계 3위 수준이다.<사진=전기연 제공>
전기연의 대표사업 중 하나는 올해 증설한 '4000MVA 대전력시험설비'다. 기존 4000MVA 용량과 더해 전체 용량은 8000MVA에 달하며 세계 3위 수준이다. 8000MVA의 용량은 원자력 발전소 8기 용량의 설비를 동시에 시험할 수 있는 규모다.

대전력시험설비는 고전압·대전류를 중전기기에 흘려 전력 계통에 들어가는 전력기기를 모의 시험해 전력 공급이 정상일 때와 이상이 발생했을 때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확인하는 설비다.

증설된 4000MVA 시설의 모습.<사진=김요셉 기자>
증설된 4000MVA 시설의 모습.<사진=김요셉 기자>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가 각 공장과 가정 등 수용가에 도달할 때까지 적용되는 송배전 설비가 대상이다. 전력기기는 특성상 광역 정전 등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에 안전성과 신뢰성을 평가하는 설비가 중요하다.

대전력시험설비를 제어하는 통제실의 모습. 모든 시험의 과정을 진행할 수 있으며 시험 결과도 실시간으로 얻는다.<사진=김요셉 기자>
대전력시험설비를 제어하는 통제실의 모습. 모든 시험의 과정을 진행할 수 있으며 시험 결과도 실시간으로 얻는다.<사진=김요셉 기자>
대전력시험설비는 국내에서 전기연이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다. 올해 증설한 '4000MVA 대전력시험설비'는 연 200억 원 이상의 시험료 수입을 고려할 때 사업에 대한 단순 투자수익률은 12%에 이른다. 600여개 전력기기업체의 고용 창출, 창원국가산업단지고도화 등 간접 효과도 크고 다양하다.

서윤택 전기연 대전력설비 증설사업본부 팀장은 "중전기기 제품은 소량 다품종 생산 형태로서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 분야다"며 "대용량의 중전기기들에 대한 외국 시험소의 의존도를 낮추고 국내에서 모든 시험을 해소해 국내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크게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방욱 박사가 고온 고에너지 이온주입 장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김요셉 기자>
방욱 박사가 고온 고에너지 이온주입 장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김요셉 기자>
탄화규소(SiC) 전력반도체 기술개발 과제도 톱다운 과제에 속한다.
전력반도체는 전압과 전류를 조절하는 반도체다.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 반도체가 인체의 두뇌에 해당한다면 전력반도체는 일을 하는 근육에 해당한다.

전력이 크게 필요할수록 혹은 시스템의 경량화·소규모화가 중요한 분야일수록 효율적인 전력반도체가 필요하다. 탄화규소의 경우 물성이 좋아 기존 실리콘 반도체에 비해 전력을 덜 사용하고, 열도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전기 자동차 분야의 핵심 부품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고온 고에너지 이온주입 장치 연구실의 모습.<사진=김요셉 기자>
고온 고에너지 이온주입 장치 연구실의 모습.<사진=김요셉 기자>
이미 일본 등 선진 자동차업계는 탄화규소 전력반도체에 주목해 1990년대부터 연구를 진행해왔다.

특히 탄화규소 전력반도체 분야에서 가장 앞서있는 도요타는 프리우스 3세대 모델에 탄화규소 전력반도체를 채용했다. 전체 연비를 5% 향상시킨 바 있으며 지난해 5년 안에 연비를 10% 이상 향상시킨 전기차를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내걸었다.

실리콘 웨이퍼(왼쪽)와 탄화규소 웨이퍼(오른쪽)의 모습. 탄화규소 웨이퍼는 투명하다.<사진=전기연 제공>
실리콘 웨이퍼(왼쪽)와 탄화규소 웨이퍼(오른쪽)의 모습. 탄화규소 웨이퍼는 투명하다.<사진=전기연 제공>
우리나라도 전력반도체 연구는 1990년대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이미 세계 최고를 달리고 있는 선진 메모리반도체와 달리 연구환경이 열악했던 것이 사실이다. 전기연 전력박도체연구센터 연구팀은 원천기술연구의 일환으로 1999년부터 전력반도체 과제를 수행해왔다.

열악한 환경에도 국내 기술로 전력반도체 제조 원천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톱다운과제의 장기적 지원 때문이다.

탄화규소 반도체 관련 연구 시장이 형성되지 않아 반도체 연구 중단의 위기를 맞았지만, 2012년부터 연간 20억 원의 적극 지원 전략으로 탄화규소 전력반도체 기술 개발 성과를 얻게 됐다.

방욱 전기연 전력반도체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장기 원천 연구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지속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탄화규소 전력반도체 기술개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며 "우리나라가 전력반도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데 필수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펨토초 레이저 시스템 연구 모습.<사진=전기연 제공>
펨토초 레이저 시스템 연구 모습.<사진=전기연 제공>
톱다운 연구과제 성과에 펨토초 레이저 기술(femto second)도 주목할 만한 대상이다.
전기연은 2014년 러시아의 광학 기술과 전기연의 ▲원천 레이저 설계 기술 ▲모듈제작 기술 ▲레이저 제작·안정화·상용화 기술 등을 접목해 맞춤형 펨토초 레이저 가공 시스템을 탄생시켰다.

펨토초 레이저 광원 기술은 1000조 분의 1초라는 극히 짧은 시간의 폭을 갖는 펄스(pulse)를 발생시키는 레이저 시스템 기술이다.

펨토초 레이저 기술은 크기가 작고 장시간의 동작이나 장비를 결합했을 때에도 1% 이하의 출력 안정도를 갖는 등 신뢰성이 높다.

극초단 레이저 광원 기술을 초미세 가공 분야에 적용하면 충격파에 의한 왜곡이나 표면의 파편 잔해, 열에 의한 주변 재료 변질, 미세 크랙 발생 등의 부작용 없이 섬세하게 가공할 수 있다.

펨토초 레이저 기술은 지난 2014년 레이저 분야 국내 중견기업인 한빛레이저와 이오테크닉스에 각각 기술이전해 총 18억원의 기술료 수입을 획득했다. 또 미래창조과학부가 선정한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도 선정된 바 있다.

강욱 전기연 前 RSS(Russia Science Seoul)센터 센터장(현 의료기기 벤처기업 인더스마트 대표)은 "초정밀 안과 수술 등과 같은 의료산업이나 차세대 정보 저장장치 등과 같은 IT산업 등을 아우르는 초미세 레이저 가공 장비 시장의 문을 연 것"이라며 "레이저 산업을 국제 경쟁력을 갖춘 차세대 레이저 분야 미래 산업으로 성장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기연의 톱다운 과제 리스트. 5개의 대과제와 23개의 세부과제로 구분돼 있다.<사진=전기연 제공>
전기연의 톱다운 과제 리스트. 5개의 대과제와 23개의 세부과제로 구분돼 있다.<사진=전기연 제공>
이외에도 전기연에서 진행 중인 톱다운 과제로 ▲스마트그리드 기반의 차세대 전력망 기술 개발 ▲HVDC 핵심기술 개발 ▲전기추진 기술 개발 ▲나노기반 전기소재·부품 기술 개발 ▲전기융합 첨단 의료기기 기술개발 등 23개의 세부과제를 추진하고 있다.

디엠테크놀러지 제1공장의 모습. 전기연으로부터 중량물 이송용 기술을 이전받았다.<사진=김요셉 기자>
디엠테크놀러지 제1공장의 모습. 전기연으로부터 중량물 이송용 기술을 이전받았다.<사진=김요셉 기자>
전기연은 산업 분야 기업체 기술개발 지원도 활발하다. 창원에 소재한 디엠테크놀러지가 대표적이다. 최근 전기연은 중량물 이송용 기술을 이전했고, 생산설비 현장에서 생산품들을 자동 고속 이재·적재가 가능한 Gantry Robot System 기술까지 확장·개발했다.

디엠테크놀러지의 본관(왼)과 조창제 대표(오른)의 모습.<사진=김요셉 기자>
디엠테크놀러지의 본관(왼)과 조창제 대표(오른)의 모습.<사진=김요셉 기자>
디엠테크놀러지는 두산·현대위아 등 제조 공장 생산설비에 독자적으로 생산 로봇 제품을 납품하고 있으며 현재는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한 판로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전기연은 이외에도 사업화 유망기술을 기업체에 이전·사업화 지원하며 관계 기업의 매출증대·고부가가치 일자리 창출 등의 효과를 키워가고 있다.

박경엽 원장은 "출연연의 연구개발 우선순위는 인류와 국가 사회에 둬야 한다"며 "인류와 국가사회에 혜택을 줄 수 있는 연구아이템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개발해야 나갈 것"이라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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