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 기획취재]중앙일보-대덕넷 설문 결과, 정부 간섭 관료주의 심각
"대통령 주재 과기전략회의, 과학계 고질적 문제해결해야"

#1 나의 연구가 국내 산업에 적용될 것이라는 큰 기대에 10년동안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렸다. 성과가 나오고 기술이전을 위한 후속 연구를 논의하려 했지만 관련부처는 언론홍보에 바빴다. 관료의 요청에 따라 인터뷰 몇 번하고 나니 과제도 끝났다. 사업화는 애초부터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는 듯이 후속 논의도 기술개발에 대한 로드맵도 없었다. 과제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2 연구장비관리 행정법에 따라 연구장비를 한 번 사용하더라도 '누가, 언제, 어떻게, 왜, 어떤' 내용으로 가동했는지 상세하게 기록해야 한다. 마치 '우리집에서 식사할 때 아버지가 숟가락을 몇 번 사용했는가를 기록하는 것'과 같다. 관료도, 연구자들도 이 기록을 보지 않는다. 다만 사용내역 등 요구 자료로 쓰는 것이다. 이처럼 불필요한 행정요소들이 가득하다.

#3 관료들은 기초과학을 연구하라면서 실용화 방안까지 내놓으라고 하고, 자기가 써야 할 보고서를 연구원들에게 강제로 떠넘긴다. 젊은 사무관한테 자료 요청 전화를 받으면 밤을 새서라도 만들어 보내야 한다.

실험현장에서 연구자들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해를 거듭할수록 가중되는 행정업무에 시름하며, 뿌리깊은 관료주의의 폐단에 허덕이고 있다.

연구환경은 갈수록 퇴보하고, 국가 과학기술 전략 부재 등 얽히고 섥힌 고질적 문제들이 한국 과학기술계의 혁신을 발목잡고 있다. 총체적 난맥상이다.

중앙일보·중앙SUNDAY와 대덕넷이 실시한 공동 기획설문조사에서 이같은 연구현장의 현실이 여실이 드러났다. 

이번 설문조사는 대덕넷과 중앙일보가 MB정권의 마지막 해인 2012년에 이어 4년만에 다시 실시한 것으로 갈수록 악화된 과학기술계 현장의 변화상이 그대로 반영됐다.

이명박 정권에 이어 박근혜 정부도 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다양한 부양책을 쏟아냈지만, 대통령의 의지가 담긴 구호와 연구현장과는 확실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지난 4월 22일부터 7일간 실시한 '한국 과학기술계 대상 2012년 비교 설문조사'에는 544명이 참여했다. 설문 결과, 참여자 10명 중 8명이 과학기술 정책, 연구 집중도 등 연구환경이 퇴보했고, 그 원인은 '불합리한 관료주의', '행정부담 가중'에 있다고 지적했다. 

◆ "4년 전 보다 연구문화 나빠졌다"

중앙일보·중앙SUNDAY와 대덕넷이 2012년에 이어 4년만에 실시한 '한국과학기술계 설문'결과 10명 중 8명이 나빠졌다고 답변했다.<그래픽=대덕넷>
중앙일보·중앙SUNDAY와 대덕넷이 2012년에 이어 4년만에 실시한 '한국과학기술계 설문'결과 10명 중 8명이 나빠졌다고 답변했다.<그래픽=대덕넷>

과학기술인이 체감하는 연구문화는 4년 전 보다 오히려 나빠진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환경, 연구집중 수준, R&D관리 및 지원시스템, 과학기술자 위상과 복지·사회적 인식, 연구정책과 행정 등 연구문화 전반을 묻는 질문에 '나빠졌다'는 답변이 70%를 상회했다. 정부의 각종 지원시스템과 제도 등이 현장의 목소리와 무관하게 규제를 위한 제도로 만들어지며 나타난 결과로 해석된다.

연구정책 및 행정의 변화를 묻는 질문에는 544명중 449명(82.5%)이 2012년에 비해 나빠졌다고 답변했다. 또 연구자들의 연구집중 수준을 묻는 질문에는 432명(79.4%), 과학기술자 위상 및 복지·사회적 인식에 439명(80.7%)이 퇴보했다고 답해 연구현장의 난국이 그대로 반영됐다.

연구개발(R&D)관리 및 지원시스템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는 평가다. 363명(66.7%)이 나빠졌다고 답변했으며, 좋아졌다는 답변은 181명(33.3%) 수준이다.

다만 산학연 연계 융합연구는 나아졌다는 답변이 311명(57.2%)으로 융합연구 문화는 점차 확산되는 추세다. 과학외교 및 해외 네트워크 변화를 묻는 항목에는 277명(50.9%)가 나빠졌다, 267명(49.1%)는 좋아졌다고 설문에 응했다.

특히 연구에 집중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설문 응답자들은 '불합리한 관료주의'와 행정부담'을 가장 많이 꼽았다.

연구인력 부족, 연구예산 부족, 행정부담 가중, 연구과제수주 어려움, 불합리한 관료주의 등 설문에 제시된 5가지 보기항목 중 321명(59.0%)이 불합리한 관료주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고 꼽았다.

또 복수의 답변이 가능한 이 설문에서 226명(41.5%)이 연구에 집중할 수 없는 이유로 행정부담 가중을 꼽아 연구자들의 행정부담도 무거운 짐이 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뒤를 이어 164명(30.1%)의 응답자들이 과제 수주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한 정부출연연기관의 A 박사는 "관료들이 전화 한 통에 연구자들을 불러 올리고 각종 자료 요청이 적지 않다"며 "연구자들이 보고용 자료까지 만들다보면 연구자인지 행정업무자인지 분간이 안될때도 있다"고 하소연 했다.

또 한 과학자는 "공무원이 연구자의 전문성 이해는 커녕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는 있는지 의아할 때가 많다"면서 "연구자로서의 자존감 상실에 연구 의욕마저 떨어지게 한다"고 토로했다.

◆ 한국 과학기술계의 현실 문제, 국가의 위기로

과학기술계 구성원들은 한국 과학계의 현실에 대해서도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현장의 연구자 506명(93.0%)이 한국 과학계의 현실에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

한국과학기술계의 현실을 묻는 항목에서는 응답자의 93%가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그래픽=대덕넷>
한국과학기술계의 현실을 묻는 항목에서는 응답자의 93%가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그래픽=대덕넷>
과학계의 가장 큰 문제로 연구자들은 제시된 13개 항목(2가지 선택 가능) 중  199명이 '불합리한 관료주의' 159명이 '정부의 과학정책 부재'를 꼽았다. 또  단기프로젝트 104명, 연구시간 빼앗는 행정업무 100명, 기초보다 응용 개발위주 연구 100명, PBS시스템 96명 등 순으로 문제로 지적했다. 

이외에도 연구결과의 정량지표, 나눠먹기식의 연구비 분배, 정량적 조기성과 요구, 정권에 따라 변화하는 과기정책 등 평가와 정책에 다른 연구현장의 고질적인 문제도 여전한 것으로 지적됐다.

한국 과학계의 문제는 장기적인 과학기술 정책 부재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과중심의 정량적 평가와 장기적인 로드맵 없이 단기적인 과학기술정책이 반복되면서 연구자들은 도전적인 연구보다 성공 가능한 평범한 연구에 치중해 온게 사실이다.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 묻는 설문에는 연구자의 88.8%(483명)가 못하고 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 응답자의 88.8%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그래픽=대덕넷>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 응답자의 88.8%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그래픽=대덕넷>
과학기술계가 느끼는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도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기술이 뒤처진다(아주 뒤처진다(62명 11.4%), 뒤처진다(278명, 51.1%)고 답변한 응답자가 62.5%로 조사됐다. 아주 잘하고 있다고 답변한 연구자는 2명(0.4%) 뿐이었다.

인재의 부재는 국가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한다. 이번 설문에서 연구자의 77.2%(420명)는 미국 등 선진국에서 일할 기회가 있다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답변했다. 이들 중 330명(64.7%)이 한국을 떠나고 싶은 이유로 더 좋은 연구풍토와 환경, 154명(30.2%)이 삶의 여건이 더 좋다고 판단해서라고 답했다.

한국의 미래 과학기술 핵심인력 확보에 대해서는 430명(79.0%)이 인재 부족을 지적했다.

한국의 미래 과학기술 핵심인력 부족 문제도 큰 것으로 확인됐다. 설문 참여자의 79.0%가 인재 부족을 꼽았다.<그래픽=대덕넷>
한국의 미래 과학기술 핵심인력 부족 문제도 큰 것으로 확인됐다. 설문 참여자의 79.0%가 인재 부족을 꼽았다.<그래픽=대덕넷>
이공계 대학의 한 교수는 "과학기술 정책은 연구 성격에 따라 단기정책, 장기정책으로 세워져야 하는데 성과 중심으로 가다보니 구별없이 단기과제에 정책의 초점이 맞춰져 있는게 사실"이라고 지적하며 "특히 기초연구는 장기적인 정책과 연구지속성이 필요한데 기초연구조차 사업화를 운운하는게 현실"이라고 꼬집어 말했다.

과학기술 정책 한 전문가는 "연구성과는 홍보용이 아니라 과학기술계와 인류에 얼마나 기여했는가가 중요하다"면서 "지금 한국 정부는 보고와 보여주기에 지나치게 치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훌륭한 연구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일갈했다.

◆ 과학기술 콘트롤타워 필요?.."과학계 자발적 각성하고, 일관성 있는 과기정책 수립돼야"

정권이 바뀌면서 미래창조과학부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신설됐지만, 과학기술계 콘트롤타워 역할 부재 논란도 여전했다.

현재 과학기술 콘트롤타워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가라는 항목에서는 설문 참여자의 96.7%가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그래픽=대덕넷>
현재 과학기술 콘트롤타워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가라는 항목에서는 설문 참여자의 96.7%가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그래픽=대덕넷>
현재 과학기술 콘트롤타워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는 5명(0.9%)에 그쳤다. 전혀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284명, 52.2%), 일부 기능만 발휘되고 있다(242명, 44.5%) 등 부정적인 답변을 한 연구자는 96.7%였다. 

그러면서 한국 과학기술계의 활성화를 위해 과학기술 전담부처 필요성에 힘을 실었다. 설문 참여 연구자 중 455명(83.6%)이 과학기술 전담부처가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필요없다고 답변한 연구자는 89명(16.4%)으로 조사됐다.

이공계 기피 현상은 2012년 설문 대비 비슷한 수준으로 확인됐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 없다고 답변한 연구자는 51명(9.4%)으로 2012년 5명에 비해 약간 늘었다. 반면 연구자의 483명(88.8%)이 이공계 기피현상이 있다(심각하다(187명 34.4%), 어느정도 있다(206명 37.9%), 조금있다(90명, 16.5%))고 답변했다. 

자녀에게 이공계 대학을 권유할 의향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323명(59.4%)이 있다고 답했다. 이공계 대학에 보내진 않겠다는 연구자는 124명(22.8%), 모르겠다는 답변은 97명(17.8%)이 집계됐다.

그런 가운데 544명의 응답자들은 한국 과학계 문제해결을 위한 다양한 대안을 쏟아냈다. 과학계 인사들은 현장의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며 '장기적인 정책입안' '일관성 있는 과기정책'이 시급하다는 데 한 목소리를 냈다.

과학기술계를 바로 잡기 위해 대다수의 여론은 정부의 개혁과 변화에 방점이 찍혀져 있지만, 과학기술계를 주도하는 연구자들 스스로도 정체된 과학계 문제들에 대한 자발적인 각성과 자정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부의 역할을 연구생태계 안전성과 지속성 확보를 위한 인프라 지원자로 한정하고, 직접 플레이어는 연구자들에게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제안이 눈길을 끌었다.

한 응답자는 "누가 장관이 되든 또는 기관장이 바뀌든 상관없이 예상할 수 있어야 하고, 과학자의 긍지를 짓밟지(지나친 회계 감사와 행정업무 등) 않으면 된다"며 "정치적으로 과학정책이 결정되고, 성과는 해당 부처(공무원)를 위한 것들만 요구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과학계의 한 원로는 "관료들이 계속해서 연구현장을 시시콜콜 지적하고 통제하려고 하면 한국의 과학계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면서 "최근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과학기술전략회의'를 신설하겠다고 발표했는데 또 하나의 옥상옥이 아닌 과학계의 고질적인 문제해결을 하는 주체가 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한편 이번 대덕넷-중앙일보 공동 설문은 설문 참여자 중 349명(64.2%)이 박사급으로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으로 석사 123명(22.6%), 학사 72명(13.2%) 순이다. 직업군은 출연연 소속이 325명(59.7%), 기업 68명(12.5%), 교수(강사) 62명(11.4%), 학생 40명(7.4%), 기타 49명(9.0%)이 설문에 응했다.

[중앙SUNDAY 기사 참고: '이래라저래라' 정부 간섭, 과학기술 발목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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