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獨·日 연구기관 과학자들 "한국 연구문화, 시스템 변화 시급"
"연구와 행정 분리…연구는 반짝쇼 아닌 지속성 필요"

"투서가 무엇인가? 연구소마다 여론함이 있고 자신이 부당한 처우나 불이익, 차별 등 건의사항이나 중재를 요할 사항이 있으면 EEO(Equal Employment Opportunity)라는 문제제기함이 있어 거기에 내용을 적어 넣는다. 육하원칙에 의해 명확하고 기명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사에 들어가지 않는다."(미국 연구소 33년째 근무중인 과학자)

"투서요? 지금까지 들어본적이 없다. 독일은 노동법이 강해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을 경우 옴부즈만 제도와 같은 통로를 통해 해결하는 제도가 있지만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연구와 행정을 철저하게 분리해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독일 연구소 8년간 근무했던 과학자)

"10여년동안 일본 연구생활을 하면서 투서를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다. 일본은 본인 연구가 아닌 이상 관계하지 않는다. 좋은 성과를 내면 잘했나보다라고 생각할 뿐 질투하거나 한마디를 보태지 않는다. '関係ない(관계없다)가 그들의 문화다."(일본 연구소 10년간 근무했던 과학자)

미국과 독일, 일본의 연구기관에 근무하거나 경험이 있던 과학자들은 故 정 모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박사의 상황에 대해 당황스러워하며 "안타깝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나"라고 말하면서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과학선진국들의 연구자들이 경험한 연구현장 투서나 감사, 이에 대한 대처 등에 대해 집중 취재해 봤다.

◆ 과학선진국 연구자들 "투서가 뭡니까?"

과학선진국의 연구기관을 경험한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투서에 대해 보거나 들은적이 없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이들 국가에서는 투서라는 용어자체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

각 연구기관마다 여론함을 두고 건의하도록 하고 있다. 건의는 철저하게 기명이며 육하원칙에 의해 명확하게 기록돼야 한다. 특히 사실관계가 정확하게 적시돼야 조사에 들어간다. 대면 등 조사 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면 제보자는 무고 등으로 강도높은 처벌을 받는다.

연구자가 내부적으로 불합리한 처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경우 옴부즈만 제도 등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이를 이용하는 일도 거의 없다.

각 프로그램, 과제마다 또는 실험실마다 디렉터나 슈퍼바이저(연구기관마다 호칭 다름)가 구성원들의 상황을 늘 파악하고 있어 투서나 감사가 적용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33년간 과학자로 근무하고 있는 A 박사는 "지금까지 이런 문제 제기나 감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적이 없다"면서 "직접 돈을 만지는 구매부서에서 공금으로 사적인 물건을 구매해 처벌 받는 것은 어쩌다 있어도 과학자가 과학자를 고발하고 감사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며 안타까워 했다.

독일의 연구소에 근무했던 B 박사 역시 "연구비와 행정이 철저하게 분리돼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독일은 노동법이 강해 과제 책임자나 리더가 연구원들을 과다근무 등 부당하게 처우하면 항시 주시하고 있는 옴부즈만 등이 관여하기 때문에 투서가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일본의 대학에서 근무했던 C 박사 역시 "일본 내에서도 투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면서 "이전에 데이터 조작건이 발생했을때 공론화시켜 조사위원회가 조직돼 관련 교수를 조사하고 박사학위를 박탈한 적이 있지만 인신공격성 투서는 없다"고 말했다.

◆ 과학선진국들의 부정방지 제도는?

해외 경험 연구자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시스템' 차이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우선 미국, 독일 등은 연구와 행정이 철저하게 분리돼 있어 연구비 유용이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또 옴부즈만이 정기적으로 연구자들과 상담하며 내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 문제가 생기기 전에 알게 된다.

이들 국가는 연구과제가 선정되면 연구비는 처음부터 행정부서로 입금된다. 연구자는 연구비를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구조. 과제 책임자 역시 필요한 재료를 마음대로 구매할 수 없다.

연구 성과로 부정이 발각 될 경우는 더욱 엄하다. 독일은 연구자로서 생명이 끝나는 강한 처벌이 이뤄지므로 연구자들은 그야말로 자신의 연구에만 집중하는 문화다.

B 박사는 "독일에서는 연구자는 연구만 한다. 재료 구입도 행정 부서에 요청하면 알아서 구입해주기 때문에 과제 책임자는 연구자들이 잘 할 수 있도록 챙기고 연구자는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서 "처음부터 문제의 씨앗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에서는 연구자의 부정을 막기 위해 매년 연구 윤리 교육이 진행된다. 또 정기적으로 옴부즈만 상담이 이뤄져 근거없는 의심은 근본적으로 자리 잡을 수 없는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다.

한국에서만 이런일이 자꾸 발생하는 걸까?

과학선진국 연구자들은 투서의 악순환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한국의 연구문화와 시스템 변화의 필요성을 들었다.

독일 연구기관에서 근무했던 B박사는 한국의 연구과제 운영제도에 대해 놀랐다고 털어놨다.

그는 "한국에 오니 과제 책임자가 연구자의 급여나 재료 구입 권한까지 다 가지고 있는데 놀랐다"면서 "이전보다 많이 시스템화 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수직적인 연구문화에서는 오해와 갈등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그에 따르면 독일은 연구기관에서 연구자에 대한 등급을 정하고 그에 따라 연봉이 결정된다. 단계가 올라가면서 연봉도 변화되는 구조로 과제 책임자와 연구자는 금전적인 문제로 전혀 얽히지 않는다.

B 박사는 "한국에 오니 이전보다 시스템화 됐지만 00정보 활동비 명목으로 운영되는 연구비 등 연구자들이 마음한번 잘못 먹으면 얼마든지 사리사욕 채우기가 가능해 보였다"면서 "연구와 행정의 철저한 분리가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연구 문화에 대해 C박사는 "일본의 경우 한 연구자가 자기 분야를 꾸준하게 연구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준다"면서 "40~50대가 되면 그 분야의 대가가 되어있다. 정말 순수한 연구자로 성장한다. 한국도 이런 문화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의 연구자들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방안으로 A 박사는 동료평가 강화와 지속적인 연구비 지원, 과제선정의 투명성과 합리성을 들었다.

그는 "연구는 대외적으로 상을 하나 받거나 논문에 실렸다고 높이 평가되는 반짝쇼가 아니다"면서 "연구는 해당분야 학술지에 5년, 10년 계속 좋은 논문이 실려야 진짜 실력있는 것이다. 이런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한국은 프론티어 사업도 9년정도만 주고 그다음부터는 연구비 지원이 끊기는 것을 봤다"면서 "연구비는 과제를 지속할 수 있도록 주는 것이다. 큰 액수가 중요한게 아니고 감당할 수 있는 연구비로 오래오래 연구에 파고 들수 있는 체제가 마련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A 박사는 연구과제 선정의 투명성, 합리성에 대해서도 제안했다. 그는 "연구과제는 자원배분권을 가진 공무원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또 언변 좋은 비전문가가 설득해서 결정되는것이 아니다"면서 "과학자나 엔지니어 출신으로 분야를 잘아는 패널이 평가한 과제로 선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그는 "사람중심으로 연구비가 배분되고 연구비를 따려고 로비하는 풍토가 계속되면 지금과 같은 악순환은 반복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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