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 못먹는 과학자?…'행정피로' 시달리는 과학계

[업그레이드 - 연구경영 ②]구매, 회계처리 비효율적 관행 지속
정부 관료 급한 자료제출 요구 '다반사'…설문 응답자 80% "행정 효율적 개선 필요"

# 사례 1. "여기 감사실인데요. 식사로 피자 드시면 안됩니다."
K 박사는 이런 전화를 받고 당황스러웠다. 돈이 비싼 것도 아닌데 먹을 수 있는 식사 항목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점점 이해할 수 없는 회계처리 내용이 생겨 어이없고 때로는 짜증스럽다.

# 사례 2. "내일까지 보고서 제출해 주세요."
관계 부처 공무원에게 또 연락이 왔다. 하루가 멀다하고 서류제출 요구가 끊이질 않는다. 연구소 행정부서는 관련내용을 잘 모르기에 부탁할 수도 없고, P 연구원은 밤을 새다시피하며 서류를 준비하는 날이 적지 않다.

# 사례 3. "매년 365일 기관평가를 위해 움직입니다."
한 정부출연연구기관 행정기획부서의 L 행정원은 거의 1년 업무의 대부분을 기관평가를 위해 집중한다. 연구자를 위한 행정은 거의 하기 힘들고, 기관평가와 정부를 상대로 한 행정이 주류를 이룬다.

한국 과학기술계가 연구행정 비효율에 허덕이고 있다.
연구자들은 대내·외 행정서류 작업이 가중되면서 본업인 연구보다 행정업무에 허덕이고 있고, 연구소 행정원들은 정부 대응을 비롯한 기관평가와 행정업무·각종 감사 등에 여념이 없어 사실상 연구자 중심 지원을 위한 행정은 실현하기 힘들어 안타까워 하고 있다.

◆ 외부 행정에 휘둘리는 연구자들…"보여주기식 행정은 그만"

연구현장에서는 국정 조사 등 공무원과 외부의 행정 요구가 심하다는 의견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한 정부연구소의 L 박사는 위에서 하루만에 연구계획서를 만들어 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 관료로부터 급하게 연락이 와서 4~5년 후를 예상한 연구기획서를 당장 다음주까지 제출하라고 요구받으면 결국 밤새서라도 해내야 한다. L 박사는 "정부에서 급하게 연락이 올때마다 내부 관계자들과의 충분한 협의 없이 겉으로 보여주기식 문서를 제출할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또, 과학계의 행정효율 개선을 위해 새로운 규정이 계속 만들어 지고 있다. 그러나 기존 규정에 더해 숫자만 늘어나기 때문에 실제로 제대로 된 개선효과가 발휘되기 어렵다는 것이 현장 목소리다.

출연연의 F 연구원은 "정부, 국회의원 등에서 국정 조사 자료, 현황 목록을 항상 급하게 요청하고, 당장 내일 오전까지 제출하라는 식"이라면서 "자료가 사전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준비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목적의 자료요청 등으로 행정업무에 시달릴 때가 많다"고 말했다.

다른 연구소의 K 박사는 "과학연구현장 경험이 전무한 행정관료의 충분한 사전검토와 점진적 현장적용 단계가 없는 비현실적 전횡은 현장연구자들의 에너지를 고갈시킨다"며 "마치 군대행군시 선두 행군자들의 행위가 후방 행군자들에게 끼치는 영향과 유사하다"고 하소연했다.

과학계 한 인사는 "애플의 잡스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세상은 단순화를 지향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 조직은 복잡화로 가고 있다"며 "정말로 중요한 규정만 제정해서 공포할때 그 위력은 더 커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연구원은 잠재적 범죄자?…"회의비 등 득보다 실이 더 크다"

최근 출연연의 거의 모든 감사형태는 회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중에서도 회의비나 식비는 연구원들이 가장 불만을 호소하는 항목 중 하나다. 교통비 등 모든 지출 세부 항목은 1원도 빠짐없이 서류 증빙을 해야 한다. 정부가 과학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라는 전제로 접근하는 것 같다는 연구현장의 목소리가 한, 둘이 아니다.  

연구원 K 박사는 "규정을 악용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증빙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서류 작업 부담이 심하다"면서 "현재 상황은 연구원들을 먼저 범죄자로 가정하고, 규제가 이뤄지고 있다. 회계분야에서의 좀 더 유연한 접근이 아쉽다"고 토로했다.

연구비 비목(費目, 비용명세)도 최소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KAIST의 J 교수는 "미국은 연구비 비목을 구분하지 않고, 연구비 내에서 카드 등 아무거나 집행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면서 "비목을 나누어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비목간 전용을 승인 받거나 하는 절차가 필요하므로 행정적, 시간적 비용이 소요된다. 연구비는 어떻게 사용하던 결국 전부 소모하게 되어 있는데, 차라리 자유재량에 맡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과학기술계의 감사 성격이 궁극적으로는 연구성과의 효율적 관리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출연연 A 감사는 "현 감사체계는 주로 회계감사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면서 "연구 과정을 문서화하고, 통합 프로그램 마련 등을 통해 회계 보다 연구성과와 관리에 집중해 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 연구원은 "회의비가 존재해 득보다 실이 더 많은것 같다"며 "차라리 회의비를 없애면 회의비 사용에 대한 행정 규제와 정산과 같은 수고가 없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 구매 위해 때로는 몇달 소요…고가장비 구입하려면 문서작업에 진 빠지기도

출연연의 A 연구원. 그는 "실험에 필요한 기자재를 구매하려면 연구에 적합한 기자재를 선정하기 위한 정보 탐색 시간보다 구매 문서 작성에 소요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고 불편함을 토로했다.

A 연구원만 그런게 아니고 다른 연구소들의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B 연구원은 "고가 장비 구입시 제출해야 할 서류가 너무 많다"면서 "1억원 이상은 장비 심의 위원회를 거쳐야 하는 등 절차를 진행하면 연구원 입장에서는 행정작업에 진이 빠진다"고 말했다. 구매관련 입찰 절차도 3000만원 이상에서 2000만원, 1000만원 단위로 입찰 단가가 햐향되고 있는 추세여서 이전보다 행정업무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출연연 K 박사는 "투명한 회계처리를 위해 행정 서류가 필요는 하겠지만 세부 항목들까지 하나하나 신경쓰면서 연구에 불편함이 지속된다면 분명 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구자들에게 중복 입력해야 하는 現 연구관리시스템도 골칫거리 중 하나다.

출연연의 K 연구원은 "정부 기관별 연구관리시스템이 통합되어 있지 않다"면서 "구매서류를 작성해서 연구원 내부 심의를 통과해도 산업부, 미래부 등 각 관계 부처 전산망에 하나하나 다시 입력해야 하는 중복 구조로 불필요한 시간이 낭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 과학계 설문 80% "행정 비효율 개선돼야" 의견 제시

대덕넷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4월 20~25일), '연구효율화와 업무 효율화를 위한 행정 지원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총 242명의 응답자 중 ▲매우 부족하다 49명(20.2%) ▲부족하다 139명(57.4%)로 전체 응답자의 80%에 달했다.

분야별로는 ▲각종행정서류업무 105명(43.4%) ▲연구기획 47명(19.4%) ▲연구과제관리 38명(15.7%) ▲예산관리 29명(12%) ▲기타 9명(3.7%) 순이었다.

한국 과학계의 행정 관련 주관식 답변에 다양한 의견도 제시됐다.

설문 응답자 A씨는 "연구 본연의 업무에 앞서 행정 권위적인 일들이 정부나 소속 출연 연구소에서 일상화 되어 있다"면서 "정부 부처의 중·하위직 담당자가 연구원의 책임자 혹은 대표자를 대상으로 갑의 자세로 횡포를 부리는 것은 여전하다"고 답했다.

D씨는 "연구 스케줄 외에 기타 행정 서류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30%를 차지한다"면서 "수행중인 연구계획서상 명시되지 않으면 출장을 가거나 자리를 비우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F 씨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는 것이 문제다. 연구를 효율적으로 할수 있는 행정지원 시스템을 마련하고, 수십년 미래를 준비하는 연구가 수행될 수 있도록 관리해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B씨는 "과학자들을 위한 행정적 뒷받침이 필요한데, 오히려 현 상황은 행정에 휘둘리고 있다"면서 "안정적인 연구활동을 위한 재원마련과 지원이 필수적이고, 과학기술계 종사자의 윤리의식 고취를 위한 활동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한 이공계 대학 교수는 "비전문적이면서 단기적 과학행정을 추진하는 공무원이 과학행정을 주도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전문적 식견을 가진 과학자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과학정책 프로그램과 행정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계 한 원로는 "한국 과학계의 현재 행정 수준은 분명 선진화돼지 못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며 "선진국들의 사례를 통해 연구자 중심 행정시스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고찰해 정부부처와 연구소 모든 행정 주체들이 변화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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