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해 연구하면 손해?…우린 2000명 연구원이 협업"

[이것이 창조경제다]①'오픈 이노베이션' 전도사 유진녕 LG연구원장
자기것만 최고라는 'NIH 신드롬' 파괴 "3M에 견줄만한 협업문화 구축"

창조경제가 화두다.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ICT)를 중심으로 한 창조경제'는 박근혜정부의 핵심 국정목표다. 곳곳에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연구도, 기업활동도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혼란도 여전하다. 창조경제의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는 볼멘소리도 적지 않다.

이에 대덕넷은 '2013 아젠다'의 하나로 '이것이 창조경제다'를 연중 기획으로 마련한다. 창조경제는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창조경제를 실천해왔던 연구기관, 연구원, 벤처기업, 기업인도 적지 않다. 이들을 통해 창조경제의 앞날과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우리 연구 문화가 정말 협업을 꺼리죠. 오죽하면 자기 것만 최고라는 NIH(Not Invented Here) 신드롬이 나오겠습니까. 그 신드롬을 깬 연구소가 바로 우리 연구원입니다. 연구자들이 문제가 생기면 협력을 하니 확실히 연구속도가 빨라지더군요."

유진녕 LG화학기술연구원장은 과학기술계 오픈이노베이션 전도사다. 유 원장이 2005년 1월부터 LG그룹의 R&D 총책임자 역할을 맡은 후 가장 역점을 둔 부문이 바로 '내부 연구원들간의 협업'이었다. 자기 연구만 알던 연구원들의 마음을 열게 만드는 일이 녹록치 않았지만 오픈이노베이션 경영을 선언한 이후 8년 남짓 꾸준히 텃밭을 가꾼 덕분에 현재 협업 경영의 효과가 빛을 발하고 있다.

자동차용 리튬이온 폴리머 전지, 3D TV 편광필름 원천기술 개발 등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기술 성과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연구개발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연구원 수가 최근 2000명을 넘어 올해 연말이면 2300명이 협업을 하게 생겼다.

나홀로 연구문화인 'NIH 증후군'을 보란듯이 깨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간연구소로 발돋움시키고 있는 유진녕 원장이 오픈이노베이션 경영 리더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협력 안하면 손해 "3M에 견줄만한 협업문화 구축 성공"

초기 오픈이노베이션 적용 당시 연구원들은 상당한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소위 귀찮아 하는 연구원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연구현장에서의 협업이란 단어가 듣기에도 낯설었지만, 자기 연구에만 몰두하던 연구원들에게 거북스럽기만 했다. 연구원들은 자기 연구에 대한 아이디어와 기여도가 다른 연구자와 공유하게 되면 자기 몫이 빼앗길까봐 협업 자체를 꺼렸다.

유진녕 원장 입장에서도 연구소 규모가 커지다 보니 내부 기술현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1981년 LG기술원과 인연을 맺은지 수십년간 연구원들과 동고동락한 유진녕 원장이었지만 1000명이 넘는 연구자들이 서로 무엇을 연구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유 원장 마음에는 늘 안타까운 것이 있었다. 제품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기술이 여럿인데 연구소 34년 역사의 기술노하우가 존재하고, 또 다른 팀에서 이미 검토하거나 시도했던 사례들이 있을텐데 모두 자기 연구팀 내에서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아쉬웠다. 혼자 하게 되면 개발기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드는데, 왜 이런 상황이 반복되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됐다.

▲장벽을 무너뜨리기 이해 그가 내놓은 대안은 바로 '내부협업'이었다. ⓒ2013 HelloDD.com

그래서 내놓은 해결책이 '내부 협업'이다. 보통 오픈이노베이션이라 하면 외부 조직과의 협력을 떠올리지만 LG화학기술연구원의 경우 협업 타깃은 내부 연구원들이다. 내부 연구원들부터 집단지성을 발휘해야 외부도 잘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협업 문화 구축의 일환으로 제품개발을 장려하고 도와주기 위한 다양한 내부 협업 프로그램들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트라넷 상에서 개별 연구자가 풀리지 않는 문제를 올리면 전체 연구원들이 답변을 올리는 시도부터 전개됐다.

유 원장이나 간부들도 적극 동참해 답을 달았다. 질문을 올리는 사람에게 1000원 가치의 점수를 줬고, 답변하는 연구원에게도 가치에 따라 1000~3000원 점수를 차등 부여했다. 연구원들은 점수가 쌓이면 매점에서 이것저것 사먹는 재미를 맛봤다. 매달 한 번씩 2개의 연구프로젝트 팀이 강단에 서기도 한다. 자기 연구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술원 전체의 두뇌를 빌리기 위해서다.

이런 식으로 연구원들간 서로 아이디어를 토론할 수 있는 온라인 협업 프로그램을 비롯해 현상금을 걸고 기술적 문제해결을 유도하는 프로그램, 전문가가 한자리에 모여 원포인트 자문을 펼치는 전문가 협업 프로그램 등 총 8개 프로그램이 동시다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연구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연구문제 해결을 위한 오픈이노베이션 방향성과 효용성을 깨닫고 있으며, 덕분에 업무 효율이나 능력이 향상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결과가 되었다.

유 원장은 "LG기술원의 협업 문화는 오픈이노베이션 경영의 대명사로 꼽히는 3M과 견주어봐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며 이러한 문화가 한국 과학기술계 연구현장 곳곳에 널리 퍼지길 염원했다.

 

◆ "연구자들의 천국 만드는 게 나의 사명"

▲연구자들이 좋은 환경에서 연구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2013 HelloDD.com

 

"연구소에는 우수한 연구원과 좋은 과제가 있으면 그게 전부입니다. 기존 연구원들한테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잘하고, 또 좋은 사람·좋은 과제를 잘 관리하고 유치하는 일이 제 일과의 대부분이죠." 유진녕 원장의 일상에 대한 답변이다. 그의 일상에 경영 철학이 담겨 있다.

어제나 오늘이나 원장을 마치기 전까지 그가 하는 일의 전부는 연구자들이 연구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유 원장의 경영 철학은 연구자 특성에 맞는 경영을 펼치는 것이다. 그는 16년 전 한 일간지에 실린 ‘연구원 특성 6가지’ 기사를 지갑에 지니고 다니며 연구원들과 소통한다.

연구원의 특성은 ▲연구원은 자율적 분위기를 중시하고 관리자의 감독을 극히 싫어한다 ▲연구원은 고도의 기술개발 활동에서 자아를 성취한다 ▲최신 기술의 홍수 속에서 자신이 뒤쳐진다 생각하면 좌절한다 ▲연구원 집단의 윤리의식에 충실하고 회사충성도는 낮다 ▲조직 목표에 열광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방향이 잡혔다 생각하면 무섭게 집중한다 ▲독립심이 강하지만 지나친 경쟁은 불안감을 조성해 연구에 차질을 빚게 할 수 있다 등이다.

유 원장은 연구원 특성을 어르고 보채거나 교육을 통해 바꿀 수는 없으며, 바꾸려고 하는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연구자 특성을 잘 승화시켜 강점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우친 것이다. 특히 유 원장은 연구원들이 고도의 연구개발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새로운 연구위원 제도를 2008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예전에는 연구위원이 되면 임원이 되어 경영 매니저 역할을 해야 했다. 그것도 매년 1명도 채 안되는 연구원이 임원이 됐기에 연구원들 입장에서는 ‘오르지 못할 나무’로 인식됐다. 연구를 잘한다고 임원을 시켰는데 연구가 아닌 매니저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폐해가 있었다. 지금의 연구위원은 매니저가 될 수도 있지만 정년까지 보장받으면서 연구에 몰두할 수 있다.

매니저 스킬이 좋은 사람은 소장이 될 수도 있지만, 연구가 좋은 사람은 그대로 연구하도록 하는 듀얼레더(Dual ladder) 시스템이다. 누구나 연구위원이 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짐에 따라 연구원들은 연구위원이 되려는 목표가 생겼다. 연구위원은 임원급 대우을 받는다.

수석연구위원은 전무나 사장급과 동일하게 처우를 해준다. 연구위원들만의 주차공간도 별도로 있다. 현재 LG화학기술연구원의 연구위원은 25명. 전체 연구원의 1%다. 연구위원은 세계적으로 통하는 기술수준을 보유하거나 회사에 성과를 낸 연구원으로, 나이와 성별·학벌에 관계없이 뽑는다. 최근 학사출신 여성과 55세 연구원, 39세 연구원을 포함해 6명을 신규 연구위원으로 선임하기도 했다.

유 원장은 "우리 과학계는 40대 후반이 한계이고, 연구능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치부하고 있지만, 연륜이 있고 경험이 있는 엔지니어들이 없다는 것이 큰 약점"이라며 "우리 연구원은 정년이후 계약을 통해서라도 60대 연구원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패스트 팔로우에서 '퍼스트 무버'로…"1등을 위한 문화 지향'

▲차량용 리튬이온 전지. 대한민국 대표의 첫 퍼스트 무버 기술이다. ⓒ2013 HelloDD.com

LG화학기술연구원은 지난 2009년 전기자동차용 리튬 이온 폴리머 전지를 개발, 현재 세계 1위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자동차전지 산업은 초기에 일본이 선두주자로 앞섰으나 리튬 이온 자동차 전지에 대해서는 개발 노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그러한 핵심 이유는 리튬 이온 전지가 소형의 경우 적절하지만 대형에서는 안전성의 문제가 존재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R&D를 미흡하게 추진했고, 그 사이에 LG화학기술연구원이 역전한 케이스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세계 1위라 평가받는 기술은 대부분이 Fast following을 효과적으로 추진해 이룩한 성과임에 반해 한국 내에서 First mover로 세계 1위가 된 산업은 LG화학기술연구원의 자동차용 리튬이온 전지가 최초의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2000년경 전지사업 부문에서 2000억원 가까이 적자를 기록했고, 2번이나 관련 사업을 접으려는 위기가 있었지만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신뢰와 지속적인 관심으로 오히려 투자를 늘린 결정이 세계 1등 상품을 탄생시키는 근간이 됐다. 유 원장의 전임 원장인 故 여종기 박사 시절부터 10년 이상 공들여온 성과이기도 하다.

동시에 지난 2011년 3차원 디스플레이용 편광(FRP)필름을 개발함과 동시에 대량 생산을 시작해 3D TV 세계시장 판도를 바꾸는 일을 이룩했다. 유 원장은 "R&D는 투자하면 바로 성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흔히 비용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투자의 개념"이라며 "장기적으로 산업을 주도할 수 있는 퍼스트 무버 기술은 경영자의 확신과 연구원들의 창의적 열정이 숨쉬는 R&D 문화에 의해 탄생한다"라고 강조했다.

▲3D TV 시장을 석권케 한 편광필름 기술을 소개하고 있다. ⓒ2013 HelloDD.com

전통적으로 LG화학기술연구원은 원장 임기가 10년 단위다. 초대 최남석 원장이 14년을 역임했고, 여종기 전 원장도 10년간 씨앗을 뿌리고 유 원장에게 바통을 넘겼다. 유 원장은 이제 9년차다. 유 원장 임기 내 이미 2개의 퍼스트 무버 기술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덕분에 좀 더 퍼스트 무버 기술 탄생을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게 펼칠 수 있게 됐다.

장기적 과제 투자 수준이 20% 가까이 된다. 현재 연구소 전체 R&D투자액이 4500억원으로 그중 20%는 장기과제에 투자되고 있다. 실패할 확률도 많지만 국가 경쟁력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신소재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유 원장은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지만 5년 이내 또 하나의 퍼스트 무버 기술이 탄생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다.

유 원장은 "제가 은퇴한 후에 다음 원장이 이어서 새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다"며 "자동차 전지는 여종기 전 원장이 제게 물려준 기술이라면 저는 후배 원장이 다음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씨앗을 심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 원장은 은퇴 이후 중학생들에게 과학에 대한 꿈을 심을 수 있도록 매달 한 번씩 강연을 해보겠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그는 과학기술인들에게 "어떤 분야에 있는 사람보다 과학기술인들은 사회에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을 절대 잊지 말자"고 당부했다. 한편 유 원장은 오는 5월 15일 UST에서 열리는 '상상력 포럼 D'에서 LG화학기술연구원의 오픈이노베이션 경영 사례를 과학기술계 구성원들에게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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