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대규모 교체 암시 발언에 과학기술계도 촉각
'2008년 악몽' 우려속 "과기중심 국정운영 표방했는데 설마…"

박근혜 대통령이 11일 새 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강력하고 힘찬 정부'를 언급하며 이명박 정부에서 임명된 공공기관장의 교체를 암시한 가운데, 과학기술계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기관장들도 '인사 태풍'에 직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감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 출연연 기관장들에게 일괄사표를 받고, 일부는 '정치적 낙하산'으로 지목돼 중도하차하기도 했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각 부처 산하기관과 공공기관에 대해 앞으로 인사가 많을 텐데 새 정부의 국정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주문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주요 국정과제를 언급한 뒤 "새 정부가 막중한 과제들을 잘 해내려면 인사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같은 발언은 새 정부의 국정 목표와 과제를 이행하기 적합한 새 인물을 임명하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향후 각 부처 산하기관과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를 예고한 셈이다. 특히 박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공기업과 공공기관의 낙하산 인사를 직접 비판한 바 있어 지난 정권에서 임명된 기관장들 대다수의 교체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대통령은 한국관광공사와 한국전력공사 등 공기업 17개와 국민연금관리공단 등 준정부기관 29개, 산업은행 등 18개 기타 공공기관 등의 기관장과 감사. 임원 등 줄잡아 500여명에 대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 대해 과학기술계에서는 2008년의 악몽이 다시 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섞인 목소리를 내보이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출범했던 2008년은 출연연 기관장들에게 두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시련의 계절이었다. 새로운 정권 출범에 기관장 일방 사퇴 통보 등 구조조정 작업으로 과학기술계 기관들의 사령탑 물갈이가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당시 연구현장은 대규모 물갈이 과정에서 혼란을 겪었다. 정부의 과학기술 개편 목표와 방향 등 큰 그림이 없는 상황에서 연구소 수장이 퇴출되는 등 하루 하루 일방적 통보만 접하는 과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안한 상황에 연구자들은 좌불안석이면서도 향후 미칠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기초기술연구회와 산업기술연구회 산하 출연연 수장 가운데 올해 임기가 만료되는 기관장은 문길주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11월) 원장과 정연호 한국원자력연구원장(11월), 나경환 한국생산기술연구원장(10월), 황주호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장(9월), 이재구 연구개발진흥재단 이사장(10월) 등 5명 정도다. 최근에 임기를 시작한 오태광 한국생명공학연구원장(2015년), 정광화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2016년), 김흥남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2015년) 원장과 임기가 5년인 오세정 IBS(기초과학연구원·2016년) 원장을 제외한 나머지 출연연 기관장은 모두 내년에 임기가 만료된다. 하지만 전례를 살펴봤을 때 공공기관장 교체는 남은 임기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정치권 등에서는 임기가 남은 임명직 공공기관장의 경우 '중도하차'는 없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박 대통령은 이런 관측을 '강력하고 힘찬 정부', '새정부의 국정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명분으로 일축했다.

이에따라 과학기술계에서도 대규모 물갈이는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비록 새정부가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한 국정운영'을 내세우고 있지만 공공기관 전체에 '인사 태풍'이 몰아칠 경우 과학기술계만 예외가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새 정부의 국정 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과학기술계 기관장의 경우 다른 여타 공공기관의 수장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기준이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권 때와 비슷한 혼란만 초래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 때문에 대덕을 중심으로 한 출연연 안팎에서는 특별한 목적과 인사 구조조정의 명분이 명확하지 않은 일방적인 물갈이는 과학기술 중심의 국정운영을 표방한 새정부의 기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러한 국정운영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인들의 사기와 환경이 가장 중요하고, 박 대통령 역시 수차례 '연구환경 개선'을 약속했는데 출연연 기관장들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적용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출연연 기관장 출신의 한 과학기술계 인사는 "과거 경험에서 보듯 '낙하산'은 안된다는 명분으로 물갈이를 하면 결국 또 다른 '낙하산'이 내려와 연구현장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명분이나 기준이 없다면 정권이 바뀌었다고 기관장을 일괄적으로 바꾸는 것은 일선 연구현장과 한국 과학기술계 발전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도 줄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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