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공장서 시작해 글로벌기업 세운 이부섭 동진쎄미켐 회장
"부도 직전 달아나려 사둔 비행기표 매만졌지만 꺼내지 않아"

# 1951년 여름.
이부섭(75) 동진쎄미켐 회장의 고향은 서울 연희동. 전쟁을 피해 온 식구가 증평까지 피난을 갔으나 14대째 농사를 지어온 토박이 농군인 부친은 파종시기가 되자 마치 자석에라도 이끌린 듯 한밤의 나룻배를 구해 타가며 논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집안은 이미 전쟁의 상흔으로 풍비박산(風飛雹散).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겨우 여기저기서 꾸어 온 돈은 셋째아들이었던 그의 허리춤에 채워졌다. 그는 농사 밑천을 걱정하는 부모에게 “친구의 친척어른이 미군부대에서 일하니 거기서 미제 물건과 식료품을 사다 팔아 농사지을 돈을 마련해오겠다”고 호언했다.

또래보다 훌쩍 큰 키, 깊은 눈빛, 다부진 입매를 갖고 있는 영특한 아들이었지만 이제 겨우 열넷. 부모는 그의 호언을 오롯이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걱정만 하고 있는 와중에 해결방법을 생각해 온 것이 기특하고 대견했다.
 

▲경기고등학교 시절 이부섭 회장 ⓒ동진쎄미켐 40년사

그는 서울역에서 금촌까지 가는 화물열차에 무임승차하고, 금촌에서 문산까지는 검문을 피해 야산으로 걸어가 최대한 많이 물건을 진 후 온 길을 되밟아 왔다.

새벽에 출발해 꼬박 하루를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겁도 없이 시작한 '양키물건 장사'는 매번 두 세배의 이익을 남기며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목표까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문산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습관적으로 허리춤을 살피던 그는 돈 보자기가 만져지지 않는 걸 깨달았다. 사색이 된 얼굴로 금촌과 문산 사이 야산을 밤늦도록 헤매던 그는 부모의 얼굴과 한시가 급한 농사일을 떠올려본 후 문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 날은 너무 늦어 길가의 아무 집에나 들어가 사정을 말하고 하루를 묵었고, 다음날 새벽 물건을 파는 집을 찾아가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큰 용기를 내어 외상을 청했다. 찬찬히 그의 말을 듣던 매매인은 아무 의심 없이 선선히 외상을 주었다.

악몽 같은 하루를 보낸 그에게 천금 같은 기쁨이었다. 이후 서부훈육소가 생겨 다시 학교를 나가기 전까지 그가 문산을 오가며 번 돈으로 그의 집은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당시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그 날이다. 자신을 믿어준 그 분에게는 아직도 고마운 마음이 그대로 남아있고, 자신을 대견하게 바라보던 부친의 눈빛을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 1966년 봄.

 "여보, 창업을 해야겠어. 생각해둔 것이 있는데 일단 기본적인 기계 몇 대랑 실험실이 필요해. 아버지가 물려주신 논을 팔고, 우리집 연탄창고에 실험실을 만들면 안 될까?" 1960년대 초만 해도 화학공학과 졸업생들이 취직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산업은행 기술부나 고등학교 화학교사, 충주비료와 럭키화학 등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시기에 한국생산성본부 기술부장을 맡게 된 것은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일이었다. 월급은 일반 직장 보다 7배나 많이 받았고 안정된 직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업무에 파묻혀 나태해져가는 것이 싫다며 6개월 만에 그만두고 한국사진필름의 공장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실험실에서 인화지를 만드는 신기술을 연구하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흥미로웠다.

그렇게 일하다 인화지 공장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자 늘 새로운 일을 찾던 그는 1966년 봄, 결국 창업을 택했다.

▲신혼초 이부섭 회장 부부 ⓒ동진쎄미켐 40년사
그의 아내는, 연애시절 진흙에 빠진 구두를 말려준다며 실험실로 가져가선 바싹 구운 오징어처럼 만들어 온 모습을 보고도 웃었고, 망설임 없이 그와 결혼했다.

이번에도 아내는 15년 전 그의 부모가 그러했듯 그의 도전을 말리지 않았고, 직장생활을 계속하며 가족의 생계 걱정을 덜어줬다. 제2인산칼슘과 젤라틴(Gelatin)을 추출한다며 마당에 소뼈를 쌓아놓아도, 넘쳐나는 실험기구가 안방까지 점령해도, 한밤중에 펄펄 끓는 콩기름이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거나 암모니아 가스가 폭발해도… 아내는 절대 남편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실패해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다시 실험하는 남편에게 단독공장이 생기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그가 최초로 생산한 제품은 '폴리스타일렌(polystyrene)'이라는 플라스틱의 원료를 국산화한 것. 당시 폴리스타일렌은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정부에서 구매공급하고 있었는데 미국의 사정에 따라 국내 공급이 좌우되는 불안정한 상황이다 보니 국산원료는 생산하기만 하면 금방 동이 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가 폴리스타일렌의 원료인 스타일렌모노마(stylen monomer)의 특별관세는 그대로 둔 채 수입 폴리스타일렌의 관세를 철폐하자 그의 사업은 순식간에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동안의 수익을 모두 제품 보다 비싼 원료 구입에 사용, 미리 주문을 받은 제품까지 모두 생산한 후 빈털터리가 된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독일 화학잡지에서 발포제의 원료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서 실험해봤는데 결과가 괜찮아.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발포제 국산화 사업을 해보면 안 될까?"

# 1980년 겨울.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나온 그는 무교동 골목의 어느 조그만 일식집에 앉아 정종 한 잔을 들이키며 고민에 빠졌다.

한 쪽 손으로 양복 안주머니에 있는 봉투를 매만졌다.

안에는 얼마 전 충동적으로 산 비행기표가 있었다. 발포제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거래처는 늘어났고, 특허도 등록했으며, 수출도 했다. 태릉, 시흥, 길동 등의 임대공장을 거쳐 인천에 소원이던 단독공장도 건설했다. 매년 매출액은 50% 이상 신장하며 상공부장관상도 받았다.
 

▲1975년 인천공장 기공식 현장에서 ⓒ동진쎄미켐 40년사

그러나 1978년 2차 오일쇼크가 찾아오자 국내 기업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요 거래처들이 도산하며 회사 운영이 극도로 위태로워졌다. 국내 사정이 어려워지자 믿을 것은 해외 수출 뿐. 그러나 설상가상 수출컨테이너에서 화재가 나며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기 전까지 모든 발포제에 대한 선적금지령이 떨어졌다.

일본에서 수입해 오던 발포제 원료의 국산화 개발에 많은 투자를 했으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부도만은 막아보기 위해 임금을 체불하고 가족, 친척, 친구에게 돈을 빌렸으나 늘어나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했다. 경리부장에게 딱 내일이면 현금까지 모두 소진된다는 보고를 들은 그 날, 그는 어떻게든 피해보려 했던 부도를 맞이했다. 진작부터 그에게는 부도처리여부에 대한 결정권이 없었던 걸 깨달았다. 다만 남아있는 선택권이 하나 있었다.

빚을 남겨두고 도망갈 것이냐 남아서 부도 다음날을 맞이할 것이냐. 다시 한 번 안주머니에 손을 가져갔으나 안에 있는 봉투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집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세 번째 빈털터리군.'

# 2012년 겨울. 

▲이부섭 회장 ⓒ2012 HelloDD.com
사람들은 성공한 이야기보다 실패경험담을 즐거워하더군요. 나 역시 내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을 이야기하는 게 좋습니다.

좌절했던 날들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내가 극복하고 다시 일어섰다는 증거니까요." IT·미디어 산업클러스터의 신흥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디지털미디어시티에서 가장 높은 건물 최상층에 이부섭 (주)동진쎄미켐 회장의 사무실이 있다. 한 쪽 벽면에 전면을 차지한 창에는 시원한 전망이 펼쳐지고, 인접한 벽면에는 각종 훈장과 상패, 국내외 리더들과의 기념사진들로 가득 차 있다.

그 곳에서 미소를 머금은 눈과 입매, 낮고 느긋한 음성과 말투 등 부드러운 인상을 갖고 있는 현재의 이부섭 회장과 동진쎄미켐을 만났다. 이부섭 회장은 종심(從心)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열정적인 대내외활동을 하고 있다.

매일 새벽 등산을 거르지 않는 탁월한 자기관리를 바탕으로 그는 매주 발안공장에서 열리는 전체 조례에 참석하는 등 경영 일선에 서있으며, 지방 및 해외 출장도 무리 없이 소화한다.

과학기술계의 발전을 위한 대외적인 활동도 현재 그의 인생의 한 축이다. 지난해 12월 '대한민국과학기술대연합'으로 과학기술계를 결집시킨 것도 이 회장의 작품. 현재 한국엔지니어클럽 회장인 그가 기업인다운 추진력과 결과 중심적 사고방식을 발휘해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다.

부도가 났던 동진쎄미켐은 현재 반도체와 FPD(Flat Panel Display)용 재료 제조·판매 분야와 발포제 분야에서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로 4000억대 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국내에 발안과 인천, 시화 등 3개의 공장과 해외에 인도네시아, 대만, 북경 등 3개의 공장이 있다.

또 대만동진화성고분유한공사(대만), DJ테크놀로지(미국), 동진전자재료(계동)유한공사(중국), (주)신암정유(한국) 등 9개의 계열회사를 보유한 글로벌 첨단정밀화학소재기업이다.
 

▲발안공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아침체조하고 있는 모습(좌), 45주년 및 판교연구소 개소 기념식(우) ⓒ동진쎄미켐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이자 존경받는 CEO 중 한 명인 이부섭 회장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전형적인 자수성가(自手成家)형 인물이다. 그의 표현대로 인생에 세 번이나 빈털터리가 됐으며, 그 중 세 번째는 가장 큰 좌절이었다. 부도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는 여러 차례 자신이 당시 경험이 정말 부족했다고 말했다. "진작 부도를 냈어야 했어요.

경험 많은 사람이라면 어음을 같이 사용하던 주 거래처가 부도났을 때 같이 냈을 거예요. 그래야 기업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시간과 자금을 확보할 수 있죠. 그런데 너무 젊고 경험이 없어서 부도가 나면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오히려 주변사람들까지 위험하게 만들었던 거죠. 막상 부도 다음 날 걱정과 달리 빚쟁이들이 회사나 집으로 몰려오지 않더라고요.

집에 하나 있는 값나는 물건이었던 전축(오디오)을 형님 댁으로 옮겨놓은 게 무색해졌었죠.(웃음)" 이어 그는 세 번의 좌절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사람에 대한 신뢰 덕분"이라며 "이는 평상시 꾸준한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강조했다.

"돈을 잃어버리고 외상을 부탁하는 소년을 믿어주셨던 분은 그 전에 제가 어린 나이에도 집안에 보탬이 되어 보겠다며 먼 길을 걸어오는 모습을 기특하게 보셨던 거죠. 두 번째는 저를 믿어주었던 가족과 동료들이 있어 다시 시작할 수 있었고요.

세 번째 역시 제가 책임지고 다시 사업을 일으켜 보겠다고 했을 때 많은 분들이 믿어주셨습니다. 당시 저희 회사가 안팎의 상황이 안 좋았을 뿐 기술과 내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죠. 모두 다 평소 성실한 태도로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위기에서 그러한 신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변의 신뢰를 통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 꿈을 이룰 수 있었던 이 회장은 이제는 다른 사람들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 중이다.

젊은이들에게 창업자금과 노하우를 지원하는 등 개별적인 것은 물론, 과학기술에 대한 중요성을 정부 및 대중들에게 인식시키고자 한다. "과학기술은 곧 국가경쟁력입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사를 보더라도 과학기술이 발전한 나라가 다 선진국이 됐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국가와 국민들이 이러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총 예산 중 3분의 1이 인프라 투자에 쓰이는데 그러한 막대한 자본을 쓰려면 전문가들이 참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과학기술 담당 부서도 없고, 과학기술계 출신의 장관은 물론, 차관도 하나 없고. 이 상황에 과학기술계가 불평만 하지 행동은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과학기술계가 장기적으로 살아남아 앞으로 원하는 걸 발전시켜 나가려면 우리도 무엇인가 역할을 해야 합니다. 과학기술계에도 준비된 정책전문가를 양성해 이공계의 능력을 스스로 입증해 보아야지요. 과학기술계와 국가 발전을 위해 노력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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