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연구원에서 LG화학기술연구원장·LG화학 사장 역임 29일 눈감아
대덕단지에도 각별한 애정…리튬이온전지·석유화학 등 연구초석 마련
많은 이들이 그의 소식에 안타까워하며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된 빈소에서 그를 기리며 추억했다. 그의 삶은 자신의 철학과 오롯이 닮아있다. KIST 연구원으로 산업체와 처음 인연을 맺고 응용화학의 불모지 한국 기업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서 속속 연구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석유화학, 생명과학, 정보전자, 리튬이온전지 등 그의 연구 성과는 모든 화학분야 산업에 녹아들어 있다. 대한민국의 유망 신기술에도 여러번 선정됐다.
개발도상국의 이름없는 기업이었던 LG는 글로벌 무대를 선도하며 세계 최고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대덕과도 인연이 깊다. LG화학기술연구원장으로 재임하면서 대덕전문연구단지관리본부 이사와 대덕연구단지기관장협의회에서 활동하며 대덕연구단지에도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 KIST 근무하면서 화학의 매력에 빠져…유학 후 출연연 대신 기업 선택
故 여종기 전 사장은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후 KIST에서 연구원으로 5년간 근무하며 화학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는 응용화학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고 뒤늦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학위 공부를 하면서 그는 플라스틱, 섬유, 고무 등을 이루는 고분자화학 공부와 연구에 집중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서울대 공과대학에서 펴낸 '공학에 빠지면 세상을 얻는다' 책자 인터뷰에서 "남들보다 늦은 유학이었지만 연구원으로 일하는 동안 화학 중에서도 어떤 분야에 더 흥미가 있고 어떤 공부가 더 필요한지를 깨달아 좀더 확실한 목표를 세울 수 있었다"고 말하며 KIST 연구원 생활이 자신의 진로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밝힌바 있다.
1981년 미국에서 귀국해 다른 과학자들이 정부출연기관을 선택하는 것과 달리 연구환경이 열악하기만 했던 민간 기업으로 발길을 돌렸다. KIST에서도 산업체 관련 일을 했고 LG화학의 주요 사업이 자신의 전공인 고분자화학과 맞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LG화학에 와서 그가 처음 한일은 고기능 플라스틱 소재 개발. 당시 외국에서 기술도입으로 세워진 화학 플랜트는 범용수지만을 대량생산하는 상황이었다.
이를 본 여 전사장은 범용수지만으로는 부가가치가 없다고 판단, 특수 수지 개발에 착수한다. 결과는 성공. 지금은 LG화학의 중심사업이 됐다.
이후에도 연구를 지속해 합성수지의 고부가가치화 연구에도 성공했다. 이후 농약, 제약 등 정밀화학 분야와 유전공학과 같은 생명과학으로 연구 영역을 넓혀갔고 성과들이 속속 나왔다.
◆ 각 분야 전문가 두고 애로사항 해결 등 리더로서 역할
LG화학기술연구원 관계자에 의하면 여 전사장은 확장되는 다양한 연구분야마다 전문가를 두고 그들과 같이 호흡했다.
연구원 관계자는 "연구원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해 주는 등 리더로서의 면모를 십분 발휘했다"면서 "그의 아낌없는 지지로 모든 연구 영역에서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획기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됐다"고 그를 기억했다.
이어 관계자는 "여 전사장은 기업의 고성장이 예상되는 신규 사업 진출, 참신한 아이디어로부터 인큐베이션된 획기적인 신상품 개발, 우수한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유입과 육성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며 리더십도 남달랐다고 말했다.
여 전사장이 LG화학기술연구원장으로 재임하기 시작한 1996년부터는 리튬이온전지 개발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서 리튬이온전지 연구를 주도하고 있어 모두들 반대했지만 과감한 연구개발 전략으로 일본의 제품을 제치고 지금은 세계 최고 기술로 인정받고 있다.
리튬이온전지 기술 개발 완료에는 여 전사장의 역할이 컸다. 연구원 관계자는 "사실 리튬이온 전지 기술을 개발하기까지 그룹 일부경영진의 압박이 거셌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라며 연구 종료를 강요하기도 했다"면서 "여 전사장이 10년 이상 연구소 수장으로 재임하면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기업 최고위층의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회상하며 기술 개발의 토대가 완성되기까지 리더의 역할이 중요함을 다시한번 강조했다.
LG화학의 생산 규모는 현재 약 6조 원에 달한다. 생산 제품의 대부분은 연구개발 결과가 상용화로 이어진 경우다. 여 전사장의 숨결이 미치지 않는 부분이 없다는 의미다.
여 전사장은 앞서 언급한 책자와의 인터뷰에서 연구성과를 내기까지 사람의 역할이 컸다고 말하며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좋은 연구 성과는 좋은 연구 인력으로부터 창출된다. 우수한 구성원들이 모여 잘 다져진 팀워크를 발휘하면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 사람들이 뜻을 모아 동일한 목표를 공유하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면 그 결과는 엄청나다."
여 전 사장은 2005년 기업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한국공학한림원 부회장으로 과학기술계를 위해 정부에 정책을 건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또 이공계 기피 현상 결과가 10년 후 나타날 것이라고 우려하며 학생들에게 과학공부의 재미와 보람을 강의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여 전 사장의 빈소는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인자씨, 아들 봉준·정성, 딸 경화씨가 있으며 발인은 12월 1일, 장지는 절두산 순교성지 부활의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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