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우리별 주역들 "순도100% 열정 위성에"

['우리별1호' 발사 20주년②]우여곡절·파란만장 위성개발기
1989년 유학생 1기 영국행 "사명감·열정으로 젊음 불살랐다"

 
대한민국 우주개발의 첫 포문을 연 우리별 1호가 발사된 지 오는 11일로 20주년이 된다. 개발 초기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인공위성 기술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는 비난도 있었다. 실제 1인당 국민소득 7000달러 이상 되는 나라에서 모두 우주기술 개발을 시작했다는 조사결과도 나와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5000달러 수준. 여러 악조건 속에서 우주기술 보유 여부에 따라 국가 위상이 달라진다는 정부의 의지와 연구원들의 집념이 모여져 개발 2년 만에 발사까지 성공한 '우리별 1호'. 그 안에 담겨진 20대 젊은 연구원들의 숨은 노력을 짚어보고 당시 참여했던 그들의 현재 모습, 한국의 우주개발 방향을 집중 진단한다.

밤 12시가 넘은 영국 써리대학. 어디선가 한국가요와 한국말이 들린다. 실험실 불빛 아래에는 한국사람들만 보인다. 우리별 1호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써리대학 실험실은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했다.

위성을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원으로 정해진 시간 안에 위성을 만들어 내야한다는 명제는 모두를 잠 못들게 했다. 우리별 1호가 완성되기까지 밤마다 환하게 불을 밝히는 날이 계속됐다. 1991년 초 우리별1호 발사일이 92년 8월 11일로 결정됐다.

영국 유학생들은 1년 만에 9명 모두 석사 논문에 통과해 우리별 위성 제작에 투입됐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실험실 전쟁이 시작됐다. 적은 인원으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위성을 만들어 내야 했기에 젊은 과학도들은 주 업무 외에 부수적인 업무도 몇 가지씩 맡아야했으며 주업무뿐 아니라 과외업무 모두 완벽하게 해내야 했다.

김성헌은 원격명령과 검침부, 보조컴퓨터, 우주 방사선 검출을, 박성동은 수신기 제작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과외로 위성체의 열해석과 태양전지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예상전력에 관한 분석도 해야했다. 최경일은 주컴퓨터에 들어갈 소프트웨어 개발이란 주임무에 위성 안의 각 부분들을 연결해주는 배선 업무를 과외로 맡았다.

김형신은 우리별에 들어갈 주컴퓨터 제작만을 맡았으나 충전지를 시험하고 선별하는 장치 제작과 시험을 해야했다. 시험 후 골라낸 배터리가 위성에 들어갈 수 있도록 틀배터리팩에 넣고 특수처리하는 일까지 맡았다. 거기에 없는 시간을 쪼개서 우리말 방송장치를 위한 주컴퓨터용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까지 해야했다.

여기서 우리별의 한 부분을 맡는다는 것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들의 어깨에 지워진 책임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으며 그들의 가슴 속에는 '위성은 100% 완벽함을 요구한다. 단 한 치의 실수도 용납치 않는다'는 명제만이 빛났다.

1989년 7월 한·영간 위성통신과 연구개발, 그리고 인력양성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하고 1989년 10월 다섯 명의 학생을 써리대에 파견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우리별 프로젝트. 영국 유학생들의 낯설고 물설은 유학시절은 물론이고 써리대와 함께 위성을 개발하고 92년 역사적인 우리별 1호를 발사하면서 겪은 온갖 어려움들, 그것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극복해온 우리별 팀원들의 좌충우돌, 파란만장 인공위성개발기를 함께 해 본다.

영국 써리대로의 유학… "호랑이 소장님 최순달 교수의 말씀 가슴에 새기고"

"당시 설명회에서 최 교수님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최 교수님은 너희들이 좋은 환경에서 학비 안 내고 공부할 수 있게 된 게 무엇 때문이겠냐고 물으셨다. 이 유학비는 시장 할머니의 전대에서 나온 돈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에게 사회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영국 써리대학 유학 1기인 박성동 쎄트렉아이 대표는 당시의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최 교수의 조언은 막연히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유학생 선발 공고에 지원한 그의 삶의 자세마저 바꿔놓았다.

박 대표와 마찬가지로 유학 1기생이던 최경일 박사 역시 유학생 선발 면접 당시 최순달 교수의 말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면접을 하기 위해 최 교수님을 만났는데 우리나라 우주개발을 위해 남은 인생을 걸겠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전율했고, 또 감동받았다. 그분의 애국심, 헌신적인 태도, 학생들에게 하는 당부말씀 등을 들으며 그때부터 최 교수님은 제 삶의 멘토가 됐다."

노(老) 교수의 우주개발 열정은 젊은 과학도 최경일에게도 그대로 전이됐고 마음속에 우상을 품은 그는 우리별 제작과 발사 과정에서의 고비마다 멘토의 한마디를 생각하며 힘을 얻었다.

영국 유학생 1기였던 박 대표 뿐 아니라 모든 우리별 팀원들은 우리나라의 첫 위성을 만든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무장하고 힘들고 어려운 유학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활력과 재미를 줬던 여러 에피소드가 빡빡했던 유학생활의 쉼표가 되기도 했다.

조곤조곤 조용한 말투를 갖고 있지만 연구실의 개그맨이라는 별명 또한 갖고 있는 이현우 박사는 유학 당시 수많은 에피소드의 주인공이었다. 유학생 모두가 알고 있는 세탁소 시리즈 3편 가운데 2편 역시 그의 얘기였고, 우리별1호 발사 후 위성 스스로 자세를 제어하게끔 하는 붐이 뽑힐 때까지 위성이 보내오는 소리에 귀를 쫑긋했던 이도 자세제어 담당 이현우 박사였다.

미로 찾는 쥐 로봇을 만들다가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영국 유학을 가게 됐다는 이 박사는 유학생활이나 위성 개발 당시의 어려운 점에 대해 "어려운 점이라... 물론 있었겠지만 그 때 나는 20대 중반이었다. 당시엔 힘들었겠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저 모든 게 다 재미있었던 것 같다"며 위성 개발이 좋아 지금도 계속 개발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본격적인 위성 제작…"사명감과 열정 하나로 젊음 불살랐다"

유학생들의 하루는 실험실에 출근해 각자 해야할 일을 적어보는 것으로 시작됐다. 각자 맡은 부분의 일을 하더라도 두 부분이 각각 세 개의 시스템을 갖고 있다면 모두 여섯 가지 일을 해야 하는 셈이었고, 그 일들을 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밤이 돼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늘 이런 일상만 계속되는 건 어쩌면 다행한 일이었다. 오전 내 해 놓은 일이 잘못 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때도 있었으며 한국 유학생들을 도와주기로 한 영국 연구원들은 또 다른 위성을 만드느라 우리별까지 꼼꼼히 챙기지 않았다. 우리별에 관한 대부분의 일은 온전히 한국 유학생들만의 일이었던 것이다.

당시 주 컴퓨터에 들어갈 소프트웨어와 배선 업무를 맡았던 최경일 박사는 "써리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영국의 UoSAT-5 위성 제작에 투입됐다. 그런데 처음에는 일만 시키고 기술회의에는 참석시키지 않았다"면서 "그래서 더 빨리, 자세히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공식, 비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면서 상세히 배울 수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게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유학생들은 최 교수의 당부를 떠올렸고, 한국 최초의 위성을 만든다는 사명감으로 다시금 재무장했다.

하루를 반으로 쪼개 낮과 밤을 달리 썼던 이들. 낮에는 프로그램 짜느라 고심하던 최경일은 밤이면 전선의 피복을 벗기고 연결하는 작업을 했고, 낮에 컴퓨터를 만들던 김형신은 밤에는 충전지를 들고 돌아다녔다. 낮동안 수신기를 만드느라 납땜기를 들고 다니던 박성동은 밤이면 열역학을 계산하느라 밤잠도 잊었다.

이들의 죽기를 각오한 고생은 대한민국을 위성보유국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우리별 2호에 이어 순수 우리기술만의 모델인 우리별 3호를 제작하는 기반이 됐다. 박강민 박사는 우리말 방송 시스템을 맡았었다. 대학시절 목소리가 나오는 보안시스템을 만든 경험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우리말 방송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로 가득 차 있었고, 밥을 먹다가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실험실로 달려가기 일쑤였다. 박 박사는 "똑똑한 너희들이 못해내면 부끄러운 일이다. 성공 못하면 도버해협에 빠져 죽을 각오로 해야한다"는 최순달 교수의 부드럽지만 강한 어조의 당부가 포기라는 단어를 잊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회고했다.

가끔은 실험대 위에서 잠이 들어 관리실 아저씨의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대체로 밤이면 눈이 더 빛나는 올빼미 스타일이라 새벽에 퇴근하는 남자로 알려졌던 박 박사는 "써리대학 유학생 중 누구도 위성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면서 "전자공학, 재료공학, 기계공학, 물리학 등 전공도 모두 달랐지만 처음 배우는 분야라서 그런지 정말 스펀지처럼 받아들일 수 있었다. 2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선택하라고하면 역시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며 지난 시간을 공유했다.

박강민 박사는 이공계 후배들에 대한 조언으로 "당시에는 정말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만큼 더 고민하고 어려움을 겪으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면서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이겠지만 자기가 좋아하면 어디에 어떤 환경에 있던지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후배들을 독려했다.
 
▲남미 기아나의 쿠루 우주기지에서 최순달 교수(오른쪽서 두번째)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우리별 1호 발사 성공을 기뻐하고 있다.  <사진=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제공>ⓒ2012 HelloDD.com

위성과의 첫 교신 그리고 그 후 …"위성 운영관리는 또 다른 세계의 시작"

1992년 8월 11일 우리별 1호가 하늘로 날아가면서 한국은 세계에서 스물 두번째 위성보유국이 됐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우리별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위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위성과 지상국과의 통신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위성은 기계덩어리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성을 하늘로 쏘아올렸다면 그 이후 위성을 적절하게 관리하고 교신하며 위성이 잘 운영되도록 하는 것 역시 우리별 팀원들의 일이었다. 위성 발사 후 첫 교신에 실패해 영원히 위성을 잃어버린 경우를 직접 목격한 우리별 팀원들은 첫 교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우리별과의 첫 교신에 예정돼 있던 8월 11일 오후, 지상국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찼다. 우리별 팀원들과 인공위성센터 교수들, 취재를 나온 기자들까지 모두 초조한 마음으로 첫 교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손에 땀이 흐르는 것도 모를 정도로 가슴 졸이던 이들은 우리별 팀원이었다.

이들은 우리별이 한국 상공을 지나게 될 오후 7시 30분 무렵을 기다리며 우리별의 움직임을 추적했고, 오후 7시 27분 우리별 1호와의 첫 교신을 시도했고 피 말리는 기다림 끝에 그날 저녁 8시 35분, 드디어 우리별 팀원들은 우리별 1호로부터 내려오는 데이터를 두 손에 받아들 수 있었다. "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지상국에 환호성이 울려퍼졌고, TV중계를 위해 켜 놓은 광열등으로 지상국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우리별의 배터리를 맡았던 김형신 교수는 밤낮없이 위성과의 교신만을 생각하며 지내던 때를 떠올리며 "위성의 배터리는 태양빛을 이용하는데 위성의 위치가 잘못 잡혀 태양열을 흡수하지 못하면 자칫 위성은 우주 미아가 되고 만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배터리가 없으면 송신기를 못 켜고 자세제어 명령을 해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럼 지상에서는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우리별 팀은 위성 발사 후 한,두달 동안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밝혀야했다. 100분마다 위성이 한국 근처에 오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춰 명령어를 마구 보내야 했기 때문에 우리별 팀은 매일 100분쑈를 해야만 했고 그 시간이 새벽 세시, 네 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밤샘 작업을 한 아침이면 모두 초죽음이 되기 일쑤였다"고 지난 시간을 소회했다.

젊은 과학도들은 이렇게 위성이 한국 상공을 지나는 시기를 '100분쑈'라 부르며 그 시간마저도 기분 좋은 기다림으로 승화시켰다. 우리별 1호 개발 당시 써리대에 유학하고 있던 이서림 선임연구원은 "저는 우리별 1호의 태양전지 쪽을 맡았었는데, 선배님들께서 공부를 더 하라고 배려해주셨다. 그래서 우리별 1호 발사 후 귀국해서 운영 관리를 했고, 2호부터는 소프트웨어 개발과 운영관리를 맡았다"며 20년 전을 떠올렸다. 위성이 보내온 영상을 컴퓨터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관리하던 이 연구원은 우리별 1호가 보내온 한반도 영상을 보고 세계관도 바뀌었다.

이 연구원은 "한강이 까만 실선으로 표시돼 있었다"며 "우리가 만든 위성이 찍어서 보내준 영상이라 생각하니 느낌이 정말 뭉클했고 그걸 본 후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뿐 아니라 '지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진 것 같았다"는 소회를 밝혔다.

그렇게 조금 더 커진 시각, 조금 더 성숙한 기술로 우리별 팀은 우리별 2호 제작에 들어갔고, 우리별 팀은 전도유망한 젊은 과학도로 방송과 공익광고, 여성지에도 소개돼 인기를 얻기도 했다고 이서림 연구원은 귀띔했다.

수많은 역경과 우여곡절을 겪으며 한국 최초의 위성 개발이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졌던 우리별 연구팀. 이들이 쏘아올린 별 하나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서 살며 우주정복이라는 미래의 꿈을 계속해서 키우고 있다.
 
▲우리별 1호 곳곳에는 우리별 연구원들의 땀과 노력이 배어있다.
<사진=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제공>
ⓒ2012 HelloDD.com
▲우리별 1호의 비행모델(왼쪽). 우리별 1호는 소형 위성으로 사람의 상체 정도의 크기이며 발사 전 수많은 환경 테스트를 통과했다.  사진 오른쪽은 우리별 1호의 열 진공 시험 모습. <사진=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제공> ⓒ2012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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