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공계 거목들의 대덕방문, 감사와 감동의 순간
한 세대 뒤에도 박수 받을 일은 우리에게 무엇?

후배는 오늘날의 토대를 만들어준 선배들을 깍듯이 모셨고, 선배들은 자신들이 뿌린 씨앗을 갖고 열매를 맺어준 후배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냈다.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선진국을 만든다는 일념으로 세대를 이어가며 합심했고, 그 결과 무역수지 세계 10위권 국가란 결실을 맺은 것에 대해 선 후배는 한 마음이 됐다. 지난 25일 대덕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국 이공계의 역사들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6.25때 이공계 인력들을 공군 기술 장교로 선발해 이들의 목숨을 유지토록 한 김창규 장군과, 거기서 보존된 목숨을 고도성장기 국가를 이끄는데 여한없이 바친 오원철 청와대 경제수석, 원자력 자립의 기반을 마련한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 소장, 중화학 공업에 이어 IT 등 정보산업의 토대를 마련한 최순달 전 체신부 장관 등 한국 과학의 뿌리가 모였다.

여기에 줄기에 해당하는 현재를 책임지는 백홍열 국방과학연구소 소장과 정연호 한국 원자력 연구원 원장, 열매에 해당하는 미래를 열어나가는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 원장과 신성철 대구경북 과기원 총장 등이 가세했다.

김창규 전 공군참모총장(왼쪽)과 정연호 원자력연 원장(오른쪽).
김창규 전 공군참모총장(왼쪽)과 정연호 원자력연 원장(오른쪽).
선배와 후배들은 덕담을 주고 받으며 한국 과학을 회고하고 미래 희망을 이야기했다.
후배들은 우선 선배들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 양준석 한전 원자로설계단장은 "35년이란 짧은 시간내에 원자력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을 갖게된 것은 한국이 유일하고 이는 기초를 잡아준 선배들 덕택"이라며 " 앞으로 반도체와 자동차 못잖게 원자력이 수출산업이 되어 국부에 일조하도록 하겠다"고 각오를 표했다.

신성철 대구경북 과학기술원 총장은 "반세기만에 한국이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것은 혜안을 가진 리더들이 계셨기 때문"이라며 "역사의 지평선을 넘어 기초과학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역설했다.

오세정 기초과학원장은 "선배들의 노력으로 우리가 이제 제대로된 기초과학을 하게 됐다"며 "과학기술만이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고, 미래를 약속하는 만큼 선배들을 따라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최순달 전 장관은 "오명 전 장관이 청와대에서 오 전 수석이 해낸 일을 보고 오명이 10명이 있어도 꿈도 못꿀 일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들은바 있다"며 "전공이 화학공업이면서도 테크노크라트로서 경제 수석에 임명돼 국가 기틀을 마련해낸 것을 존경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애국심은 시대 초월한 열정의 출발점...후손 보고 일해야

오원철 전 수석(왼쪽)을 부축하고 있는 한필순 원자력연 고문(오른쪽).
오원철 전 수석(왼쪽)을 부축하고 있는 한필순 원자력연 고문(오른쪽).
일행들이 방문한 기관의 기관장인 원자력 연구원의 정연호 원장, 핵연료 주식회사의 김기학 사장,국방과학연구소의 백홍열 소장, LG화학기술원의 유진녕 원장 등은 하나같이 선배들이 마련해 놓은 토대가 있었기에 오늘이 가능했다며 감사를 표하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를 리드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 연대에 중화학 공업 및 방위 산업의 기틀을 잡으면서 울산 석유화학, 조선 및 자동차, 구미 전자, 창원 기계, 여천 석유화학, 대덕 과학연구 등등 한국 경제의 기본틀을 설계해 '한국 경제의 설계사'로 불리는 오원철 전 수석은 "이 모든 것이 우리 모두가 애국심을 갖고 일했기 때문이 아니겠냐"며 "모두 함께 축하하고 격려하자"며 박수를 유도하기도 했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열린 '세대간의 대화'에서는 선배들의 후배들에 대한 당부가 이어지기도 했다.
김 전 총장은 "6.25에 직전 권총을 만드는 등 국방과학기술을 연구한 바가 있다"며 "전쟁을 하게 되면 사람의 생명과 물자가 최소한의 희생으로 승리를 거두도록 하는 것이 국방과학의 기본 철학"이라며 후배들은 이 정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오 전 수석은 "최근 일본에서 한국의 로켓 기술이 1960년대 수준으로 자신들보다 50년 뒤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존심이 상했다"면서 "나로호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철저히 분석해 자체적인 로켓 기술을 가질 수 있도록 너나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앞으로 4만 달러를 달성하게 된다면 국민 총생산은 1조 8000억 달러가 된다. 국방비로 5%를 쓴다면 연간 900억 달러를 지출할 수 있게 된다. 이는 한 해 약 1000억 달러 정도의 시장이 형성된다는 뜻이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이를 바탕으로 세계최고의 성능을 갖춘 병기, 장비를 연구, 개발하는데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산된 우수한 병기는 우리나라의 국방력 강화에 절대적인 기여를 할 것이며 또한 병기수출에도 막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라며 밝은 미래를 보고 연구해달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오 수석과 김 총장 등은 이날 대전 현충원도 찾았다. 공군 기술장교 출신으로 나중에 상공부 차관을 거쳐 장관과 국무총리 서리 등을 역임한 박충훈씨와 최장수 국무위원을 지낸 최형섭 전 과기처 장관이 이곳에 묻혀있기 때문.

두 사람을 찾아 묵념하며 어려운 시기에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신 분들이라며 명복을 기원하고,특히 최 장관의 묘비명으로 쓰인 '연구자의 덕목'을 읽으며 고인을 추모하기도 했다.

30년뒤 내다보며, 국가 관점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오전 8시반에 서울서 출발해 만찬을 포함 12시간을 잠시의 짬도 없이 강행군하면서도 오 수석과 김 총장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갔고, 후배들을 만나고 현장을 둘러보는 눈빛은 형형했다. 노구로 지팡이가 필요했지만 자신들이 열정을 쏟은 결과들이 열매를 맺은 것을 보면서 감개무량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젊어서의 열정이 30년뒤에 결실을 맺고 그것이 후손들에 큰 선물이 되는 영광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특정인만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 수석과 김 총장, 두 사람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오로지 국가가 제대로 자립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멸사봉공의 자세를 갖고 노력해와서 오늘의 뿌듯함을 만들었다고 본다.

시대가 달라지기는 했다. 세계 무역 10대국이 되기는 했지만 한국이란 나라는 여전히 배고프다. 아직도 4대 강국은 우리 주변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경제력을 바탕으로 영향을 미치려 한다. 북한 리스크도 줄지 않았다. 진보당 사태에서 보듯이 내부에서의 위협 요인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국가 공동체가 제대로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자를 비롯한 이공계들의 주인 의식이 더 필요하다.

한국 이공계의 역사라 할 오원철, 김창규 두 사람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한 길로 나아갔다. 본인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일을 했다. 이전 보다 이공계가 쓸 수 있는 자원은 훨씬 많아졌고, 과학기술의 지향점도 달라졌다.

응용 연구에서 기초 연구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기초 연구는 하고 싶은 연구를 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면서도 그것이 가능하게 된 뿌리와 역사를 알고, 개인의 관점이 아닌 공동체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도 연구에 도움되고, 궁극적으로 과학자 개인의 만족도도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하고 두 원로를 보면서 생각하게 됐다.

30년뒤 후배들에게 남겨줄 선물은 무엇이고, 그때 후배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을까? 우리 모두가 한 번 상상해볼 가치가 있는 화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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