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산업화④]완벽한 산·학·연 클러스터 형성한 동부의 실리콘밸리
재미과학자들 'RTP B&B' 모임으로 활동 저변 확대 나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North Carolina 州)의 랄리-더램(Raleigh-Durham) 공항에 도착하자 최근 확대 신축한 공항답게 깔끔하고 널찍한 내부 공간이 쾌적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공항 곳곳에 자랑스럽게 새겨 넣은 RTP(Research Triangle Park) 문구. 공항을 나와 도로에 들어서자 혹여라도 세계적인 기업들과 대학을 지나치지 않도록 여기저기 주요 기관들의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있다.

길 양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나무숲과 나즈막한 산등성이가 한국 교민들에게 '미국에서 가장 한국에 가까운 자연환경을 가진 주'로 꼽히는 이유를 설명한다. 큼직하고 쭉쭉 뻗은 나무는 이국적이지만, 푸른 하늘과 녹음이 어우러지는 것이 우리나라 국도와도 흡사하고, 특히 녹지 공간 사이로 듬성듬성 보이는 기관들이 대덕연구단지와도 비슷한 분위기를 낸다.

RTP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주도(州都) 랄리(Raleigh)와 더램(Raleigh), 채플힐(Chapel Hill)을 잇는 삼각벨트 안에 위치한 세계적인 연구단지다. 듀크대학(Duke University), 노스캐롤라이나대학(UNC:University of North Carolina),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North Carolina State University)이 각 도시에 하나씩 자리 잡고 있고, IBM, 노텔네트웍스(Nortel Networks), 시스코(Cisco), 머크(Merck), GSK 등 170여 개의 유수한 기업들이 단지 안에 위치해 있다.

1950년대까진 담배와 목화 생산에만 의존하는 탓에 미국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주였지만, 주 정부와 지역 대학이 나서 기업과 인재 유치에 열정을 쏟아 지금은 미국내에서 '기업하기 좋은 도시'로 인정받고 있다. 산학연이 집적돼 우수한 연구 성과와 경제성장을 이뤄낸 것. 1970년대 우리나라가 대덕연구단지를 계획할 때 RTP를 벤치마킹했으며 최근에 세종시 수정안이 논의될 때도 계속 거론됐던 곳이 RTP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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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주의 실리콘밸리가 IT 중심 지역이라면 바이오 분야의 중심은 RTP로 꼽힌다. BT분야 입지조건과 의료분야 고용성장률 부분에서 미국 전체에서 1위이며, 생명과학분야 인적자원과 제약분야 입지조건에서는 2위, 생명과학 R&D 입지조건은 3위를 기록하고 있다. 기업들이 RTP에 투입하는 연구비만 연간 28억달러(약 3조2200억원)이며, 주 전체 고용인구의 22%, 연구직 직원의 55%가 RTP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에게 임금으로 연간 27억달러가 지불되고 이들이 교육과 의료, 주거 등에 쓰는 돈은 지역 경제의 '젖줄'이 되고 있다. 소득수준이 높아져 교육 및 거주환경이 좋아지자 인구가 계속 늘고 있다. RTP 지역 인구는 2000년 이후 30.2%나 증가했다.

RTP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탄탄한 산학 연계가 주효했다는 의견이 많다. 대기업 연구센터가 각 대학 내에 존재하며 공동연구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학은 기업들에 공간을 내어주고, 기업들은 대학에 연구자금을 대준다.

UNC는 학부생들에게 한 학기 동안 의무적으로 RTP 기업 실습을 하게 하는 등 학생들이 지역기업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한다. 또 쾌적한 생활환경도 큰 장점. 동부의 제약산업 중심지인 뉴저지에 비해 물가와 주거비용이 저렴하고, 숲과 공원의 면적이 넓다.

굴뚝산업을 배제하고 첨단기업으로만 입주를 허가하는 주 정부의 철저한 관리 덕에 환경도 깨끗하다. RTP에는 GSK의 김용호 박사, UNC 의대의 박종배 교수, 신젠타(syngenta)의 문항식 박사, NIEHS(National Institute of Environmental Health Sciences:미국 국립환경보건과학연구소)의 황성용 박사 등 500여명의 바이오분야 재미과학기술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2008년 'RTP B&B(Bioscience and Biotechnology Meeting)'를 조직, 재미생명공학자들의 성장을 지원하고 있다. 기업·학교로 분리해 모임을 갖는 다른 지역과 달리 교수, 기업인, 학생이 함께 모이며, 학술회의 못지않게 리더십 프로그램이나 교류행사도 중요하게 진행한다.
 

▲RTP B&B의 모임에서 서로의 이메일주소를 알아오는 시간을 갖고 있다. RTP B&B는
심포지엄이나 학술발표 못지 않게 교류의 시간을 중요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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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미 시행착오를 겪은 기업 연구원들이나 교수들이 젊은 연구원들을 후원하는 형태로 모임이 진행되는 것도 RTP B&B의 큰 특징. RTP B&B 부회장인 황성용 박사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재미생명공학자들이 리더십을 발휘하거나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받을 기회가 많지 않아 RTP B&B에서 이를 지원하려 한다"며 "컨퍼런스에서 좌장을 맡게 하고, 상(award)을 수여하는 등 실질적으로 이력에 도움이 될 만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 RTP B&B를 만드는 사람들

◇ RTP B&B의 대부 '김용호' 회장

▲김용호 회장 ⓒ2011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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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들보다 길을 앞서갔으니 모임을 주도하고 꾸려가는 것도 당연히 해야지요.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받은 것을 나누고, 다른 이를 섬기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큰 눈과 큰 입에 항상 그만큼 큰 웃음을 머금고 있는 김용호 회장(GSK 임상약물동역학 분야 책임연구원)은 GSK 내에서 '절대 불만을 얘기하지 않는 사람'으로 통한다. 누가 무슨 부탁을 해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귀를 열고 들어주는 것이 그의 신조. 그래서 'RTP에 바이오분야 연구자들의 모임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도 적극적으로 나서 바쁜 시간과 자비(自費)를 들여 모임의 틀을 잡았다. 김 회장은 '회원들과 전세계 한인 과학자, 그리고 다음 세대를 섬기자(serve its members, Serve scientific activities in Korea and in the World, Serve future generation)'는 모임의 비전을 만들고 이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또 노스캐롤라이나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하며 쌓은 명성과 인맥을 활용해 회원들이 좋은 자리를 잡아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는 "다음 목표 중의 하나는 공부하느라 결혼이 늦은 미혼 연구원들의 짝 찾기를 도와주는 것"이라며 "학술활동을 하더라도 재미있는 요소를 만들어 남녀노소 모두가 모임을 나오고 싶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미국내 유일한 한의학 전공 의대교수 '박종배' 홍보이사
 

▲박종배 교수 ⓒ2011 HelloDD.com
기업과 학교를 구분하지 않고 '바이오'와 '한국'이라는 공통점만 있다면 함께하는 RTP B&B에는 한의사도 있다. 박종배 홍보이사(UNC 의대 교수)가 그 주인공. 미국내에서 일반 의과대학교에서 교수를 하는 한의사는 그가 유일하다. 중의학 전공자까지 합쳐도 그를 포함, 겨우 둘 뿐이다. 한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친 박 교수는 영국에서 임상의학을 전공했고, 현재도 한의사로서의 진료와 치료효과(clinical effective) 연구를 함께 맡고 있다. 박 교수가 한의사로서 의과대학의 교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양·한방을 가리지 않고 적용될 수 있는 연구 분야와 능력 덕이지만, 또 하나의 비결은 진료 실력이다. 그의 진료는 보험이 해당되지 않아 진료비가 높은 편인데도 늘 몇 달치 예약이 차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미국 내에서 비주류 학문을 전공했음에도 의대 전공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박 교수는 "RTP B&B의 젊은 연구자들이 모두 다 성공할 수 있도록 준비를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 감성과 아이디어 담당 '이혜란' 여성부 이사

▲이혜란 박사 ⓒ2011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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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예일대 박사과정 5년차 여성과학자가 자살했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런데 그 마음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날 저도 참 힘들었거든요. 가슴이 아팠어요. 그리고 무엇엔가 홀린 듯이 장문의 편지를 썼죠. 친구가 되어줄 모임을 가져보자고. 알음알음 알게 된 주변의 한인 여성과학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굉장히 많은 분들이 답장을 했어요. 곧 바로 모임을 갖기 시작했는데, 매번 나오진 못해도 한 번에 열 명이 넘는 여성과학자들이 모여요." 한 아이 엄마이기도 한 이혜란 박사(UNC 박사후연구원)는 "연구도 하고 아이도 돌보다 보면 네트워킹을 하기가 정말 힘들다"며 "타지에 나와 있는 여성 과학자들의 고립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서로가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RTP B&B에 본인이 조직한 여성 생명과학도 모임을 합친 것도 모임이 보다 지속적으로 유지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모임을 통해 역할모델을 찾을 수 있다는게 가장 큰 장점"이라며 "서로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으면 어느 날 '내가 왜 이렇게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공부와 연구를 해야하는가' 회의가 몰려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RTP B&B 내에서 아이디어 뱅크(bank)의 역할도 한다. 대부분이 특유의 여성적 감성을 살린 아이디어들. 여성과학자들도 모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행사에 베이비시터(baby-sitter)를 마련했고, 뮤직비디오처럼 소그룹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찍어 모임에 재미를 더하자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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