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전문기업 2-①]세계적 기술 확보해도 은행선 푸대접
정부-대기업, 전문기업 미래가치·기술개발 노력 인정 안해

초고정밀 GPS 대체항법 기술 전문기업 A사는 꽤 오래 전부터 은행권에서 곧 부도날 '한계기업'으로 판정받았다. 신용등급이 CCC. 돈을 절대 빌려줘서는 안될 기업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남의 일만 같았던 부도기업 취급이 이 회사 K 대표에게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당장 부도날 기업도 아니고, 미래 회사 가치 뿐만 아니라 국익에 도움이 되는 비즈니스임을 몸소 입증하고 있는데 은행권에서는 오로지 재무제표만 갖고 기업의 신뢰성을 따지는 현실에 땅을 치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자금이 필요해 울며겨자 먹기로 여러 관계 지인과 회사들로부터 도움을 구하고 있는 K 대표는 학계나 연구소·해외 시장에서는 박수를 받고 대접을 받지만, 은행권에서는 찬밥 신세다. A사는 초고정밀 GPS 대체항법 기술 분야에서는 이래뵈도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기술 전문기업이다. 10년간 밤잠 안자고 피땀흘려 노력해 만든 댓가다. 이 회사가 가진 원천기술은 미국의 Trimble, 캐나다 Novatel 등 전세계 5개 기업밖에 없다.

A사는 세계 1위 업체 기술수준에 95% 접근했고, 3년 정도 격차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국가적으로 보면 A사는 중요한 핵심원천기술을 보유한 유일한 전략 자원이자 무기다. A사 덕분에 수입대체 효과 뿐만 아니라 고가 측량장비를 수입할 때 A사 기술을 내보이면 수입가가 내려가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 회사가 빚어낸 기술 완성 노력은 새로운 지식 기반의 경제시대를 맞은 대한민국 중소기업들에게 슬픈 선율로 다가온다.

대부분의 첨단기술벤처기업들이 각 분야에서 기술 확보 노력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국가 사회적으로 제대로 인정받고 지원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은행권도, 사회적으로도 모두 '중소기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업의 미래가치, 기술가치를 평가받지 못하는 양상이 짙다. A사 뿐만 아니라 수많은 첨단기업들이 시장에서 겪는 냉소와 푸대접받는 사례는 각양각색이다.

#1. 사기꾼 취급 받은 그날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국방 분야 센서개발 전문기업 I사. 3년 전 수년간 개발해 이뤄낸 기술개발 성과를 갖고 정부연구기관에 들어갔다. I사의 J 대표는 국가적인 전략기술을 개발했기에 부푼 마음을 안고 연구자들로부터 기술에 대한 인정을 기대했다. 그러나 돌아왔던 반응은 칭찬과 인정이 아닌 '사기꾼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이었다. 어떻게 규모도 조그맣고 자금력이 없는 중소기업이 수백억원이 투입돼야 간신히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느냐는 불신이 깊었다. 보는 잣대가 달랐다.

I사 J 대표는 "이러한 인식을 바꾸는데 3년이 걸렸다"며 "사기꾼 소리를 들었을 땐 하늘이 온통 먹구름이 낀 듯 탄식했다"고 토로했다. 기술 자체를 믿지 않는 상황에서 못믿는 이들에게 실제 기술 구현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기 힘들었다. 결국 학회나 지인들에게 기술을 입증해 차츰 인정받을 수 있었다. J 대표는 "우리나라에서는 외국 기술을 뛰어넘어야 기술시장 진입이 가능하다. 그만큼 어렵다"면서 "전문기업들이 기술로 외국을 뛰어넘을 때까지 인내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돼야 하는데 인정받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고통이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전문기업들의 미래가치를 보고 긍정적인 인식이 뿌리내려야 세계적인 전문기업들이 탄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2. 정부도, 대기업도 중소기업 '을'로 취급…유럽과 한국 시장의 극명한 인식차

유럽에서는 매출이 작아도, 수익을 많이 내는 비즈니스 구조를 갖고 있는 세계적 전문기업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그 핵심비결로 정통성에 대한 부가가치 인정을 꼽는다. 제품원가가 200만원인데 시장에서 2000~3000천만원에 내다팔아도 시장은 그 가치를 인정한다. 국내에서도 유럽 기술제품들의 그 가치를 인정해서인지 비싸도 구입한다.

반면 국내 중소기업이 관련 기술제품을 똑같이 만들거나 가격을 저렴하게 시장에 내놓아도 정부나 대기업에서 그동안의 기술개발 노력에 대한 평가보다는 재료비나 제조원가로만 따진다. 대기업과 매출 100%를 거래하고 있는 K사 O 대표는 "대기업은 돈이 많다보니 기술을 찍어 누르는 경우가 많다. 기술완성도가 세계적 수준과 대등한 기술수준까지 가는 과정에서 대기업과의 관계는 대개 반 노예였다"고 실토했다.

또 정부 공무원과 주로 상대하는 O사 L 대표는 "정부가 국내 중소기업을 인정하고 기술제품 개발을 적극 권장하고 사줘야 하는데 절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라며 "외국의 선진기술을 뛰어 넘어도 원가계산 이야기만 하니 시장 진입 자체가 어렵다"고 전했다.

#3. 독일에선, 기술만으로 은행 대출…한국 과학자의 국내 기술 불신문화 '증명'

히든챔피언이 가장 많은 독일의 기업 생태계 환경은 우리와 사뭇 다르다. 기업과 기술의 규모 여부를 떠나 새로운 기술 문화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은행권에서도 기술사업화 전담 인력이 있어 회사의 규모가 아닌 기술을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대출까지 연계한다. 지난 8월 이용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박사가 개발한 심자도 측정장치가 국내가 아닌 독일로 이전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기반에서 비롯됐다.

국내 중소기업 산업현장에서 만연한 이러한 상황을 정부출연연구원 과학자도 실감한다. 국내 중소기업들은 중소기업이라서 인정받지 못하고, 기술가치 평가 문화도 뭔가 차이가 느껴진다. 표준연의 심자도 측정장치는 기존 선진국에서 내놓은 장치에 비해 소음이 적고 우수한 기술제품이다. 특히 인체에 해가 없어 태아의 심자도 측정도 가능하다. 이 박사는 당초 한국의 기업에 기술을 이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국내 산업계에서는 기술의 우수성은 인정했으나 초기비용 마련에 부담을 느껴 기술 이전에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 박사는 "국내에서는 우리가 개발한 기술을 인정하면서도 당장 수요자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서 "특히 3년 이내에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투자를 꺼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국내에서 이전 기업을 찾지 못한 이 박사는 학회에서 만난 독일 기업인에게 기술에 대해 설명했다. 이후 급물살을 탔다. 기술력을 파악한 독일기업인이 현지 은행에 이를 소개했고 은행에서 기술을 검토한 후 바로 대출을 해줬다.

이 박사는 "이번 기술을 이전 받은 독일 기업은 규모가 큰 회사가 아니다. 그렇지만 기술의 잠재력만으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면서 "우리나라도 기술만으로도 대출을 받을 수 있어야 기술 데모를 통한 투자를 유도할 수 있고 사업화가 활발해 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대덕넷 특별취재팀 = 김요셉·길애경·임은희·김지영 기자(joesmy@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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