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대부' 애끓는 '苦言'…"긴 역사관과 신뢰 필요"
한필순 전 소장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마련해야"


기자 일행이 한 전 소장과의 일정을 마치고 공항으로 출발하는 날, 중국 위해는 폭설로 도로가 마비됐다. 전날은 모든 항공과 선박도 결항됐었다. 그는 우리에게 공항까지 이동하는 차량편을 마련해주기 위해 새벽부터 한걸음에 달려왔다. 헤어짐의 시간, 공항까지 배웅하겠다는 한 전 소장과 만류하는 기자일행 모두 안타까움과 아쉬움으로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 전 소장과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 자립을 위한 당시 과학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졌다. 그리고 한 전 소장의 과학기술인들을 위한 당부가 출발을 알리는 비행기의 굉음보다 더 큰 울림으로 여전히 귓전을 맴돈다.

"과학기술자 신뢰하고 인정해 주는 정책적 배려 필요"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 소장.  ⓒ2010 HelloDD.com

"저는 나라를 빼앗기는 것만 식민지가 아니라 과학기술도 종속되거나 예속되면 식민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술자립을 이룩함으로써 선진국을 제치고 수출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번 원자력 기술 수출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과학기술은 특성상 금방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투자해야 좋은 연구 성과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자들을 신뢰하고 인정해 주는 정책적인 배려가 필요합니다."

지난 7일 원전수출 축하 행사에게 한필순 전 소장이 영상메시지로 전한 내용의 일부다.

한 전 소장은 연구용 원자로 요르단 수출과 아랍에미리트 원전수출 등 이번 성과에서 보듯이 과학기술은 단 시간에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50년전 원자력원 개원과 원자력연구소 설립, 연구원들의 뼈를 깎는 인고의 노력이 모태가 되어 가능한 결과라는 것.

우리나라는 1959년 1인당 국민 소득 70달러대에 원자력에 투자했고, 2백달러대에 대덕연구단지를 세우고 정부차원에서 막대한 지원이 있었다. 그 결과 지금은 세계 최고의 IT 강국, 이번의 원자력 수출의 쾌거까지 이뤄냈다.

"뿌리없는 나무는 쉽게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아무 기술도 없는 상황에서 정부가 투자를 했고 선배 과학기술인들이 긴 시간동안 연구에 전념하며 기술 자립을 위한 강한 의지로 탄탄하게 완성해 나갔기에 오늘의 결과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한 전 소장은 또 이번 결과에 대해 "우리나라는 평화적인 목적의 원자력발전기술 자립을 통해 최소의 경비로 거대 핵심 기술에 가장 빠른 시간에 다다른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면서 "하지만 이는 긴 시간 동안 과학기술인들을 믿고 기다려 준 성과"라고 강조했다.

"과학자들은 국가가 아껴야 할 귀중한 국가 재산"
 

▲97년 원자력연구소는 원전 기술과 관련 인력이 산업체로 뿔뿔히 흩어졌다. ⓒ2010 HelloDD.com

96년 말 연구소는 한국형 원자로 개발 기술과 인력의 산업체 이관으로 큰 홍역을 치렀다. 원자력위원회는 연구소가 수행하는 원자로계통 설계, 핵 연료 설계 및 중수로 핵연료 제조 업무를 '96년 12월 말까지 한국전력기술 등 관련 산업체로 이관하는 내용을 의결했다.

그해 11월22일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연구업무심의회를 열고 사업별 이적 규모와 대상자를 확정했다.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 150명은 한국전력공사, 원자로계통설계사업 339명은 한국전력기술, 핵연료사업(PWR핵연료설계 및 중수로핵연료제조)은 한국원전연료로 이관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리고 PWR핵연료 설계업무인력 65명 전원과 중수로핵연료 제조인력 60명중 38명은 원전연료로 11명은 한국전력공사, 11명은 한국전력기술로 전보하는 것으로 총 614명의 이적이 결정됐다.

당시 원자력연구소는 원자력발전기술자립의 근거가 되었던 원자력발전사업 이관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연구원들의 반발도 거셌다. 원자력연구소 경영진은 이관 이후 대책 미흡에 관해 정부를 설득했고 연구원을 비롯한 직원들은 사업이관 저지 투쟁위원회를 조직해 대 국민 홍보 활동을 벌였으나 결국 정부의 정책대로 각 분야별로 뿔뿔히 흩어져 이관되고 말았다.

한 전 소장은 이를 두고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고 회고했다. 그 댓가로 원자력연구소는 연구자금을 받기로 했지만 연구원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략적으로 해체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

"오랫동안 선진국에 예속되어 왔던 원자력발전기술의 자립 주역들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국가에 기여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에서 일원화 된 관리체계 확립돼야 합니다. 또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니라 국민경제에 직접 책임을 지고 기여할 수 있는 실용화된 기술의 주역으로 키워야 합니다. 과학자들은 우리나라가 아껴야 할 귀중한 국가 재산입니다. 부처 이기주의의 희생물이 돼서는 안됩니다."

한 전 소장의 애끓는 목소리에 후배 과학기술인들에 대한 염려가 그대로 느껴졌다. 이어 그는 "과학 기술은 역사적 관점에서 긴 호흡으로 진행해야 한다. 이렇게 정책적으로 흔들어 놓으면 그 피해는 우리 후손들이 보게 된다"면서 "관계 정부기관도 당장 눈앞의 성과에 급급해 정책을 입안하거나 지원여부를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사업과 연구 분리 반대 시위로 96년 원자력연구소는 진통을 겪었다. ⓒ2010 HelloDD.com

"수명 길어지는데 연금, 일할 곳 없어, 정부차원 대책 필요"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80세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기인들 61세가 정년입니다. 최근 정년 영년제를 실시하는 출연연들이 늘고 있고 정년 회복이 논의되고 있어 고무적이긴 하지만 우수 과학인력들이 그냥 사장되고 있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입니다."

지난 IMF시기 과학인들의 정년이 65세에서 61세로 낮춰졌다. 우리나라 과학자들은 연구현장보다 학교를 더 선호하는 추세다. 명목은 후학 양성이지만 실제 속사정은 따로 있는 것. 65세가 정년인 대학교수 자리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또 공무원은 퇴임 후 연금제도가 마련돼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인들은 연구현장에서 퇴임하면 그 다음날 부터 당장 수입원이 전혀 없다. 정년 퇴임 후 평균연령까지 계산한다면 보통 20년이 넘는 시간인데 과학자들의 노후는 보지 않아도 어려울게 뻔하다.

"과학자들 박사학위까지 받으려면 대학졸업 후 다른 사람들보다 최소 5년 이상 더 공부합니다. 그들의 노력을 인정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과학을 공부하고 외국에 가서 학위받아 국내에 들어오려고 하겠습니까?"

최근 고경력 과학기술인들을 위한 ReSeat 프로그램 등 다양한 움직임이 일고 있어 퇴임 후에도 활동하는 과학기술인들이 늘고 있지만 아직 미흡한 상황이다. 한 전 소장은 과학기술인에게도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보통 공부를 많이 하면 시시한 일을 하지 않을려고 하는 데 이것도 문제입니다. 그 시시한 일들이 모여 큰 일이 됩니다. 정년퇴임한 과학인들도 현장에서 다시 일을 하기 위해서는 '허드렛일을 어떻게 하는냐'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즉 후배들에게 짐이 돼서는 안됩니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자립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한필순 전 소장. 그의 현 위치는 중국정부에서 운영하는 폐식품재처리기계제조연구소 기술 주임이다. 그는 고국을 떠나 멀리있지만 지금의 일에 만족한다. 국내에서는 그가 일할 자리가 없지만 중국에서는 아직도 그의 과학 지식을 인정한단다.

다만 이런 활동이 국익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안타까움은 여전하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한필순 전 소장은 "이번 요르단과 아랍에미리트 성과는 대통령의 역할도 크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 자립을 위해 50년전, 30년전부터 혼신의 힘을 다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다시한번 강조하면서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지금의 성과에 안주하면 얼마 후 우린 다시 기술 노예국으로 전락할 수 있으므로 과학기술인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믿어주는 정책적인 배려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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