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창규 과학칼럼니스트

딸랑 딸랑. 최고 산타의 루돌프가 목에 달린 방울을 흔들었다. 작년에도 같은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 워낙 오랫동안 같은 일을 하다 보니 보통 영리한 녀석이 아니다. 지금도 연례 회의에 참석해야 할 산타들이 적당히 모이자 제가 알아서 집중하라고 소리를 낸 것이다.

최고 산타는 장내를 스윽 둘러보더니 말했다.

“다들 모였나? 자 그럼 호명할 테니 대답하라구. 귀찮겠지만 형식이라는 게 있으니까. 자, 북유럽 1호 산타.”

순서에 맞게 여기저기서 대답들이 들린다. 거의 모든 사람이 출근 점검을 마치자 최고 산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 남미 방면에 12호 산타가 있었나? 아, 작년에 비정규직으로 한 명 채용했었지.”

그게 바로 나다. 나는 살짝 손을 들어보였다. 최고 산타는 흰 수염 너머로 인간들의 백화점 간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최고 산타는 작년과 달리 곧바로 주소록 분배에 들어가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자, 올해는 회의 과정에 항목이 하나 더 늘었어. 업무 과정을 개선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거든. 그래서….”
“연장 회의 시간도 초과 수당 나옵니까?”

북미 3호 산타가 이렇게 묻자 산타들이 킬킬 거렸다. 하지만 최고 산타의 얼굴이 어두운 것을 보고 웃음소리는 곧 잦아들었다. 최고 산타는 하던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인간 개인이 아닌 다수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나 의논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네. 사실 소원 통계국에서 해야 하는 일인데, 알다시피 그 쪽은 배달할 수 있는 물건들만 취급하거든. 그러니 업무를 수행하면서, 아니면 평상시에 보고 느꼈던 인류의 총체적 소원을 하나씩 얘기해 보라구.”

산타직을 어디까지나 연말 아르바이트 정도로 생각하던 나는 조금 흥미가 일었다. 하지만 의견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느 정도 침묵이 흐르고 나자 누군가가 첫 안을 내놓았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물질적인 부 아닐까요?”

최고 산타는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건 논외야. 금전적인 문제는 인간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지 않나.”

그제야 우리들은 이 새 절차의 의미가 뭔지를 깨달았다. 산타 업무에는 꽤 까다로운 제약 사항이 있다. 그 조건으로 이것저것 걸러내고 나면 남는 것은 세계 평화나 사랑의 충만처럼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들뿐일 것이다. 최고 산타는 그걸 적어서 상부에 제출하고, 윗사람들은 행정 개선 창구를 하나 추가했다며 뿌듯해 할 것이다.

산타들은 인사 고과 점수를 떠올리면서 어서 누군가가 얼굴을 붉히며 ‘세계 평화’라는 안을 내놓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무서울 것이 없다. 여기서 퇴출당하면 그걸로 그만이다. 게다가 평화나 사랑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날씨요.” 최고 산타가 무슨 소린지 몰라 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날씨?”

나는 산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일어섰다.

“올 한 해 인간들은 이상 기후 때문에 지독하게 당했습니다. 뭐 저야 비정규직이니 기후 담당 부서에 그 원인을 뭐라고 하는지는 모릅니다만, 인간들은 올해의 이상 기후 원인을 두 가지로 꼽더군요. 지구 온난화와 엘 니뇨가 겹쳐서 그렇다구요.”

최고 산타는 잠시 생각하더니 내 의제의 절반을 잘라버렸다.

“우선 지구 온난화 해결은 소원에 해당하지 않네. 그건 인간들이 제 손으로 자처한 셈 아닌가. 이산화탄소라든가 각종 공해에 산업 폐기물들. 그러니 그건 우리가 고려해 줄 문제가 아니지.”
“그럼 엘 니뇨는 어떻습니까?”

최고 산타는 모자를 벗더니 머리털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정수리를 긁었다. 난처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옳거니. 나는 얼렁뚱땅 형식적으로 넘어가려던 최고 산타의 약점을 잡은 기분이었다. 그 때 남극 1호 산타가 내 소박한 계획의 타이밍을 빼앗았다.

“엘 니뇨가 뭐야?”

나는 낭패감을 숨기며 대답했다.

“열대 태평양 쪽에서 나타나는 이상 고온 현상입니다. 정확히는 심해의 한류가 올라와야 할 곳을 엉뚱한 난류가 대신하면서 생태계와 기후를 망가뜨리는 거죠. 이름의 뜻은 ‘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만, 그 뜻과는 달리 악영향이 더욱 큰 모양입니다.”

‘신’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몇몇 원로 산타들이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나는 못들은 척 얘기를 계속했다.

“지구의 거시적 기후는 계절풍, 무역풍 등의 기류와 해류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람들의 생활도 이에 맞춰져 있고 지역색 또한 여기에 맞게 생기는 거지요. 한데 엘 니뇨는 주기적인 기후 순환을 흔듭니다. 어떤 지역은 어획량이 늘어나서 기뻐하기도 합니다만, 대개의 경우 건조하던 지역에 폭우가 쏟아져 홍수를 일으키거나 서늘하던 지방에 혹서를 퍼부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제 담당 구역인 페루에서는 대 홍수가 있었죠. 칠레에는 큰 가뭄이 들었구요. 엘 니뇨가 발생하면 어촌 아이들의 소원도 바뀌더군요. 크리스마스 선물은 안 받아도 되니 아버지가 고기를 많이 낚게 해달라구요. 하지만 남반구에 사는 사람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인도네시아도 기근으로 시달렸고, 이제 전 지구가 엘 니뇨의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결국 지구의 총체적인 이상 기후에 큰 몫을 하는 셈이죠. 몇몇 인간들은 인간이 빚은 지구 온난화가 엘 니뇨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아직까지 지구 온난화와 엘 니뇨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내가 이야기를 끝내자 내 선배, 그러니까 남미 2호 산타가 푸념을 털어놓았다.

“사실 엘 니뇨는 우리 업무하고도 연관이 있어. 루돌프들이 얼마나 환경 변화에 민감한지는 다들 알지? 이 녀석들이 최고의 몸 상태로 움직이지 않으면 그만큼 선물 배달이 늦는단 말이야. 한데 이 엘 니뇨는 크리스마스 전후해서 발생하거든. 게다가 완전히 주기적인 것도 아니라서 미리 대처하는 게 불가능하다구. 지속 기간은 또 어떻구? 짧을 때는 1년 정도 가다가 그치기도 하지만 길면 5년 까지도 계속 되거든. 이러다 루돌프가 병이라도 걸려봐. 대체 운용 루돌프를 신청하면 3년이나 있어야 하는데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란 말이지. 하물며 한 철만 활동하는 우리도 이런데 평생을 거기서 살아야하는 인간들은 어떻겠어.”

자, 이렇게 해서 형식적인 회의를 의미 있는 것으로 바꾸려는 내 계획은 성공했다. 인간들의 큰 소원 하나를 골라내서 산타들이 얼마나 인간들을 생각해주는가 생색이나 내자던 회의의 취지는 어느새 실직적인 과제로 변했고, 거기에 산타들의 근무 환경과 루돌프들의 복지 문제까지 겹치니 최고 산타도 구태의연한 보고서만 제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입을 다물고 있던 남미 산타들도 앞다퉈 불만사항을 토로했다.

“알았어, 알았다구. 하지만 근무 복지는 이번 회의하고는 상관이 없지 않나. 그건 따로 시간을 내서 얘기해보도록 하고, 문제를 엘 니뇨 하나로 좁히면 되겠지?”

최고 산타의 타협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엘 니뇨는 지구 남반구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고 있으며, 이제는 그 피해가 지구 전반에 미칩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기후의 안정화이며, 그 일환으로 엘 니뇨 현상을 없애주시거나 그게 어려울 경우 고정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정도로 보고를 올리면 되겠나?”

좋다. 첫 출발로는 아주 좋다. 만의 하나 이 새로운 회의가 매년 계속 된다면 실질적인 문제들을 더 많이 고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코 묻은 아이들에게 새 게임기를 안겨주거나 애인을 원하는 노처녀에게 인연과 만날 수 있노라며 야구장 입장권을 건네주는 것 보다는 조금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고 산타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아보였다. 그 때문에 나는 무언가 찜찜한 구석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최고 산타는 각 지역장 산타들을 앞으로 불러서 주소록을 나눠주려는 참이었다. 나는 얼른 손을 들었다.

“음? 얘기가 아직 안 끝났나? 자네도 결론에 만족한다면서?”
“예, 제출안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만, 결과는 언제 알 수 있습니까?”
“무슨 결과?”
“그러니까…. 엘 니뇨는 언제 해결되는 거냐 이 말씀입니다. 그도 아니면 대답을 언제….”
“그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 누가 그랬는데?”
“예?”

나는 멍하니 최고 산타를 바라보았다.

“내가 받은 지시는 다수의 소원을 전달할 창구를 만들라는 것뿐이었네. 그걸 충실히 이행한 것뿐이야. 뭐 문제라도 있나?”

나는 큰 소리로 한 마디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눈길을 돌려 동료 산타들의 피로에 젖은 얼굴들을 보았다. 그렇다. 우리는 중간 관리자이자 실무진이다. 최고 산타도 예외는 아니다. 그저 상처받은 인간들을 잠시 위로해 줄 수 있는 선물을 전해 주는 게 우리의 일이고, 또 능력의 전부다. 언제나 그랬듯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윗사람들은, 아니 우리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실제 존재하는가도 분명치 않은 윗사람들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면서 어떤 해결책도 내려주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극동 지역 산타에게 전해들은 속담 하나가 떠오른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계약이 있으니 올해의 산타 노릇은 제대로 할 셈이지만 내년에도 이 일을 계속 해야할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로도 인류는 엘 니뇨의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당분간 살던 ‘절’을 떠날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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