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만날 때 얼굴 다음으로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명함 입니다. 습관적으로 주고 받는 명함이라지만, 손바닥보다 작은 종이 하나에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회사명 언저리에 새겨진 슬로건이나 모토를 통해 그 회사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사람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양한 의사소통 수단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 팩스 번호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명함에는 마력이 있습니다. 꾸밈새가 산뜻하고 잘 정리되어 있으면 ‘괜찮은 회사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회사의 속내까지는 알 수 없으나 좋은 이미지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명함은 ‘회사의 얼굴’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반면 인쇄상태가 조악하거나 내용이 난삽할 경우 색안경을 쓰고 보게 되는 것이 사람 심리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명함을 만드는데 상당한 투자를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명함에도 ‘값’이 있다면 이상한 주장이 될까요?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명함이 바뀌니까 확 달라지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마치 때 빼고 광낸 것처럼 말입니다. 모 업체의 K팀장이 그런 케이스 입니다.

그는 몇 개월 전 까지만 해도 지독하게 보수적인 에너지 분야 중견기업의 고참 대리였습니다. 평사원에서 주임으로 승진하는데 2년이 걸리고 주임에서 대리로 오르는데 또 2년을 기다려야 하는 그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재미는 없어도 그럭저럭 견디는 데는 문제가 없는 ‘세월 보내기’ 였다고 합니다. IMF 시기에도 월급은 물론 보너스에 명절 선물까지 꼬박꼬박 받았으니 남 부러울 것은 없었지요.

그러나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 명함을 건네기라도 하면 “그 회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아직도 있었냐?”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얀 부분은 종이고 검은 것은 글씨인 투박한 명함에 ‘대리 K 아무개’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뭔지 모르지만 케케묵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모양 입니다.

그 회사에서 재무관리 담당이었던 그에게 대학시절 동아리 선배가 ‘러브 콜’을 보낸 것은 5달 전의 일 입니다. “재무 이사가 그만두는 바람에 숫자 만질 사람이 없어졌는데, 와서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을 잘 하면 이사로 승진시켜주겠다는 제안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회사 형편이 넉넉치 못해 월급이 줄어든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만, 선배의 줄기찬 구애에 넘어가 결국 회사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새 회사에 출근한지 일주일 만에 명함을 받았습니다. 2통에 몇 만원이나 한다는 고급인쇄 명함을 가져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오렌지 색과 청색이 잘 조화되어 있는 이미지에 ‘팀장 K 아무개’라고 찍혀 있는 것을 보고서는 감개가 무량했다고 합니다. 요즘 만나는 친구들에게 명함을 주면 “야! 너 출세했구나. 그 후진 회사 잘 나왔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라지요. 주위 사람들의 생각에는 명함이 ‘그 회사의 등급’처럼 여겨지는 모양입니다.

K팀장의 전 직장은 ‘IMF 시절이 열번 오더라도 망하지 않을 만한’ 탄탄한 회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치장에 관심이 없다 보니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우중충한 기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회사에서 일을 할 것인지, 아니면 리스크는 높으나 발빠르게 움직이는 회사에 합류할 것인지는 개인의 판단 문제 입니다. 어쨌든 산뜻한 명함을 지니게 된 K씨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을 보면, 명함에는 ‘단순한 정보,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선후배들과 함께 회사를 창업한 L이사도 ‘명함의 값어치’를 절감한 사례 입니다. 더욱 정확하게 말한다면 ‘직함’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L이사는 대기업에서 과장을 지낸 30대 중반의 인물인데, “젊은 나이에 타이틀이 뭐가 중요하겠느냐”는 생각에 팀장을 맡기로 했다고 합니다. 대표이사와 후배들이 “그래도 이사 명함 정도는 가지고 다녀야 한다”며 만류를 했지만 “빨간 펜(임원급)이 많으면 회사가 골로 가는 수가 있다”면서 고집을 부렸다지요.

헌데 L팀장의 이런 결심은 불과 석달 만에 깨어졌습니다. ‘이사’ 명함을 찍기로 했습니다. L팀장을 버리고 L이사를 자처하게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 쪽 분야에서는 후발 업체이다 보니 팀을 이뤄 열심히 영업을 다녔으나, 좀처럼 뚫기가 쉽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공략 대상 기업의 현황을 파악한 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내용의 제안서까지 잘 만들어서 들고 갔는데도 좀처럼 진척이 없었습니다. 책임자를 만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실무 권한이 없는 사람들을 아무리 만난들 헛바퀴만 돌 뿐이었습니다. 업무도 잘 모르는 풋내기들이 별 일 아닌 것 가지고 ‘오라 가라’ 하는데 짜증도 났습니다.

L씨는 결국 고심 끝에 명함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대표이사에게 “잘못했으니 나를 이사로 승진시키자”고 하면서 겸연쩍게 웃었다고 합니다. 제 머리를 자기가 깎은 꼴이 됐습니다. 그가 이사 명함을 들고 다니면서부터 공교롭게도 일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다닌 것이 밑거름이 되었는지, 아니면 ‘마케팅 이사’라는 명함이 위력을 발휘한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웬만한 기업을 찾아가면 팀장 또는 부장, 심지어는 이사나 대표이사까지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간단계를 과감하게 건너 뛰게 되니 중언부언 하지 않고 요점만 이야기 해도, 그 자리에서 방향이 결정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전의 울화통 터지는 수차례 면담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 해도 능률을 올리는데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명함은 바뀌었으나 L씨라는 사람은 원래 그대로 입니다. 사장과 함께 창업을 주도한 ‘당 서열 3위’의 인물이며 ‘팀장’ 직함을 쓸 때부터 주요 경영진 멤버였습니다. 바뀐 것이라고는 명함의 몇 글자 뿐입니다. 아쉬워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항상 낮추어 보는 것이 우리 기업들의 관행인 것 같습니다. 저쪽에서 대리가 찾아오면 ‘명함의 모양’을 보아서 만나거나 말거나 하고, 팀장 정도가 오면 대충 맞이하는 것 말입니다. 임원 정도의 명함을 내밀어야 책임자 급 이상이 “무슨 일로 오셨나요?”하면서 나타납니다. 찾아오겠다는 사람은 항상 ‘을’로 짐작합니다. ‘갑’은 느긋하게 앉아서 기다리고 ‘을’이 막히는 교통을 뚫고 달려갑니다. 번듯한 명함이 힘을 갖는 것은 우리 사회의 체면을 중요시하는 풍토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공직이나 기업에서 정년 퇴직을 하신 분들 가운데는 여생을 풍족하게 살만한 자금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친구나 후배 회사에 책상 하나를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일거리로 출근해 부지런히 움직여 보겠다는 생각도 있겠지만, 대개는 ‘명함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분의 표현으로는 “명함이 없는 채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합니다. 명함에 대한 집착은 회사의 중대사에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인터넷 솔루션 분야에서 승승장구하던 A사가 그런 경우 입니다. A사는 철저하게 ‘소총수’만으로 이뤄진 기업입니다. 명망 있는 얼굴 마담을 들어 앉히거나 가방 끈이 긴 멤버들 위주로 구성된 이 분야 경쟁사와는 달리, 현업에서 잔뼈가 굵은 기술자 또는 실무자들이 대부분이지요. 회사를 만들자마자 반기동안 수십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급작스레 시장이 얼어붙은 뒤로는 생존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나온 방안이 ‘합병’이었습니다. 일부 사업에서는 경쟁관계이지만, 대부분의 영역에서 상호보완 관계인 B사와 ‘살림을 합치자’는 얘기가 오고 가게 됐습니다. 두 회사를 합치면 솔루션 분야 국내 최대의 기업으로 탈바꿈하는 만큼, 이를 재료로 삼아 펀딩도 받고 사업구조도 개선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B사도 처한 입장이 비슷했고 양사 경영진 또한 막역한 사이였으니 합병이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합병 논의가 고속으로 진전되었습니다.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겹치는 영역에 대한 조정방안은 물론 양사의 강점을 결합해 향후 주력해야 할 사업분야에 대한 분석까지 마쳤습니다. 합병만 성사된다면 뭔가 희망이 보일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명함 문제 때문에 합병 논의가 중단됐다면, 믿기 어려울테지요? 정말 입니다. 비밀리에 추진되던 합병 추진 사실이 알려지자 A사 직원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회사를 만들었는데, 그렇게 펀딩 잘 받아서 얼렁뚱땅 만든 업체 밑으로 들어갈 수가 있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B사를 보는 A사 직원들의 시각은 이렇습니다. A사는 소총수들이 ‘기술’을 가지고 일궈놓은 기업이지만 B사는 영어 깨나 한다는 볼펜들이 외국에서 솔루션을 들여다가 가공해서 팔아먹는 곳이므로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세치 혀’ 외에는 특장점이 전혀 없다는 주장입니다. 확보하고 있는 기술만을 놓고 보자면 이런 시각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A사의 한 간부 얘기는 다릅니다. “A사나 B사의 핵심 멤버들은 모두 출신이 같아요. XX그룹에서 나온 사람들이지요. 문제는 A사가 좀 더 젊은 사람들인 것이지요. XX그룹 대리 출신이 A사에서는 부장으로 앉아 있는데 B사에서는 실무자 밖에 되지 않아요. 게다가 B사에는 박사학위 소지자가 10명이 넘는다구요. 뻔하게 계산이 나오지 않아요? ”

이처럼 명함의 표기 문제는 윈-윈을 위한 회사간 합병에 있어 민감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B사의 입장은 모르겠으나 A사 직원들의 기준에서 보면 엄청나게 불리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태세이니 말입니다.

협상이 결렬된 가장 큰 이유는 ‘명함의 얼굴’ 문제였습니다. 회사명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지요. A사는 “새로운 이름을 내걸어 재출범하자”는 쪽이었던 반면, B사는 “우리 회사 이름이 잘 알려져 있으니 B사 브랜드로 통합하자”고 맞서는 바람에 논의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장기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태스크포스가 해체되고 회의가 뜸해지더니 ‘없던 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두 회사의 합병이 결렬된 것을 ‘순전히 명함 탓’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명함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구성원들의 집착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두 회사가 합쳤다고 해서 더 좋은 결과를 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도 없습니다.

명함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상징물’ 같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집착을 하고, 놓지 않기 위해, 때로는 더 좋은 모양으로 만들어 남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기를 쓰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명함의 값을 올리기 위한 노력에는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명함은 어떻습니까?

한상복(㈜비즈하이 파트너, 전 서울경제신문 기자)closest@bizhig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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