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i의 과학향기] 글 : 최성우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시나리오 하나. 고등학생인 철수는 생일을 맞은 단짝 친구 민석을 위해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깜짝 생일파티를 준비했다. 민석은 저녁 시간에 국회의사당 부근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친구들이 몰래 기다렸다가 일을 마치고 나오는 민석에게 생일 선물 전달과 함께 간단한 축하 행사를 해 주기로 계획한 것이었다.

철수는 불꽃놀이용 폭죽을 준비하기로 한 친구들에게 '오늘 밤 11시 국회의사당 앞 불꽃놀이'라는 문자메세지를 보내서 민석의 생일파티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했는데, 학교가 끝나고 생일 선물을 사러 가던 중에 영문도 모른 채 낯 모르는 아저씨들에게 붙들려가고 말았다. 중요한 국가 행사를 앞두고 테러예방 등에 만전을 기하려던 국가정보기관의 컴퓨터가 철수의 문자메세지를 검색해서 혹시 국회의사당을 노린 테러리스트가 아닌가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둘. 때는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기술을 이용한 개인정보카드가 보편화된 미래의 서울. 결혼 20주년을 맞은 김철수 씨는 아내에게 값비싼 결혼기념 선물을 사주기 위하여 큰 맘 먹고 시내의 유명한 명품 백화점을 찾아 갔다. 그런데 백화점 입구에서 정장 양복 차림의 백화점 직원들이 김철수 씨를 정중히 가로막으면서 "손님, 죄송하지만 저희 매장은 멤버쉽제이기 때문에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백화점은 매우 부유하고 신용등급이 높은 사람들만을 고객으로 대하였는데, 백화점 입구에 설치된 기기가 김철수 씨의 개인정보카드를 검색하여 은행 잔고나 상거래 실적 등이 기준에 못 미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김철수 씨는 몹시 마음이 상했지만 정부의 개인정보 보호와 차별금지 지침과는 달리 고급 호텔, 저명 병원 등에서 비슷한 차별이 이미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할인점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물론 위의 얘기는 가상의 시나리오일 뿐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은 1949년에 컴퓨터와 같은 첨단과학기술이 인간을 억압, 감시하고 세뇌하여 지배하는 오세아니아라는 가공의 전체주의 나라를 묘사한 소설 '1984년'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소설은 미래 정보화사회의 어두운 면을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로 유명한 데, 조지 오웰이 먼 훗날이라 생각했던 1984년도 이미 20년이 더 지났지만, 그가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시킨 독재자 '빅 브라더(Big Brother)'라는 존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경종을 울려주고 있는 듯하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이른바 '...X파일'이니 뭐니 하면서 국가정보기관의 과거 불법 도감청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오늘날 '21세기의 빅 브라더'라 꼽을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은 전세계적 도감청망인 '에셜론(Echelon)'이다.

1988년 8월 영국의 한 월간지가 기사를 실으면서 미국 등이 주도하는 에셜론의 도감청 시스템의 정체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에셜론이 유럽 기업의 산업 정보 및 일반인들에 대한 감청까지도 일삼는다고 지적한 보고서가 발표돼 논란이 된 바 있다.

에셜론의 기원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과거 냉전 시대에 공산권 국가들에 대한 군사정보 수집을 위해 미국과 영국 등의 주도하에 계획된 것이었다. 이후 에셜론은 영어권 국가들이 대거 참여하여 이들 회원국을 제외한 전세계 모든 종류의 통신정보를 수집, 분석, 공유하는 세계 최대의 통신정보 감청시스템으로 발전하였고, 각 나라들의 정보, 보안 기관들이 연합된 시스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물론 미국과 영국 측에서는 에셜론은 국제적인 안보를 위하여 테러리스트나 마약상과 같은 위험 인물들에 대한 정보, 그 밖의 중요한 정치적, 외교적 정보를 수집할 뿐이며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으므로 이를 이용한 산업스파이 활동 등은 할 수 없다고 밝혔으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은 여전히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일을 망쳐버렸다(bombed)"는 전화통화를 했다가 '폭발'(bombed)이란 말이 감청시스템에 검색돼 테러리스트로 분류되는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에셜론의 감청 능력과 시스템을 감안하면 위에서 예로 든 것과 유사한 시나리오가 그다지 허무맹랑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산업혁명기인 18세기의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Jeremy Bentham)은 특수한 감옥을 고안한 바 있다. 즉 간수는 높은 탑에서 죄수를 감시할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가 감시하는 것을 알 수 없는 특수한 원형감옥을 설계하여, 이를 '파놉티콘(Panopticon)'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구조의 건축물이 감옥 뿐 아니라, 교회, 학교 등에도 바람직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이러한 파놉티콘의 원리가 현 사회의 감시와 통제의 기본이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사회학자들은 벤담과 푸코의 개념을 빌어 국민의 신상 및 신용 등에 대해서 전자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려는 발상은 '전자 파놉티콘'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산드라 블록 주연의 SF영화 '네트(Net)'를 보면 전자 파놉티콘이 현실화하였을 때, 해킹 등에 의한 부작용과 위험성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 정부가 추진하였던 '전자주민카드 제도'가 바로 파놉티콘이 아닌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단체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사업이 철회된 바가 있다. 미래 유비쿼터스(Ubiquitous) 사회의 핵심적 총아 기술로 떠오르는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역시 위의 두 번째 시나리오에서 보듯이, 그 편리성만큼이나 개인 프라이버시의 유출 및 그로 인한 차별 문제 등이 우려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새로운 과학기술의 부작용이나 파생문제 등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최악의 경우만을 가정하여 막연히 불안해 하거나 무턱대고 거부감을 표출해서는 매우 곤란하겠지만, 부정적인 측면 등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관련 기술적, 법적, 제도적 측면을 잘 점검하여 준비, 보완에 만전을 기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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