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베스트! 사이언스 코리아①]세계 1위 토양 마련 '시급'

모방의 시대는 지났다. 과거 30년동안 연구소들의 사명은 선진 기술 따라잡기였다. 첫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했다. 이제 국민과 과학자들은 더이상 이류이기를 원치 않는다. 월드 베스트를 원한다. 한국 과학계가 일류로 뻗어나가는데 어떤 난관과 문제점이 있는지 4월 과학의 달을 맞아 대덕넷은 연구 현장을 들여다봤다. 순서는 일류를 위한 연구토양, 인재, 리더십, 문화, 결론 순이다.[편집자주]

월드 베스트를 지향하는 정부출연연구소의 과학자들이 설자리를 잃고 있다. 연구개발 아이디어 도입 추진단계부터 문제다. 연구현장의 사례를 보자. 과학계에서 이름 석자만 대면 알만한 스타과학자 K 박사는 최근 신문 기사를 보고 땅을 치며 한탄했다. 자신이 1년 전부터 추진해 온 전혀 새로운 개념의 연구개발 아이디어를 미국의 한 연구소에서 먼저 개발하겠다고 공표했기 때문이다.

요즘 K 박사는 문제의 신문 기사를 오려 지갑 속에 넣고 다니며 정부 관계자를 만날 때마다 꺼내든다. 국민 수십, 수백만명을 먹여살릴지도 모르는 세계 유일의 연구개발 아이디어를 미적거리다 외국에 빼앗긴 한국 과학계의 현실을 토로하기 위해서다.

허탈감에 빠진 K 박사의 푸념이다. "1년 전부터 정부한테 애원했는데, 결국 선진국한테 빼앗기고 마는군요. 공무원분들은 그 연구가 '선진국에서 하는거냐', '검증된 거냐'고 묻더군요. 이미 검증된 연구를 아무리 해봤자 세계 1등은 나올수 없는데 말이죠." 또, 지난해 미국 MIT대학에서 출연연구소로 온 30대 과학자는 자신이 야심차게 기획한 연구를 자포자기한 상태다. 세계적으로 유행하지 않는 연구개발 아이템으로 정부에 프로젝트를 수차례 제안했지만, 매번 돌아오는 답변은 'NO'였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이 엄청나게 투자하고 있는 유행 분야를 뒤쫓아간들 우리나라 현실에서 잘 쫓아가지겠냐'는 판단에서 나름대로 미래의 국가 부(富)를 창출할 수 있는 연구 테마를 잡았지만, 세계 일류를 향한 마음만 앞섰지 현실의 연구풍토는 뒤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에서야 그는 연구 프로젝트를 따올 수 있는 기본조건이 몇가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이가 좀 먹어야 된다', '세계적인 유행에 맞아야 한다', '로비를 잘해야 한다' 등이다. 그 젊은 과학자는 세계적인 아이디어가 연구 현장에서 나오면 합리적으로 검증하고 평가해, 그 아이디어가 적어도 사장되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이 파괴된 현실을 개탄한다.

또 다른 K 연구소 P 연구원은 연구 아이디어를 정부에 공식 제안한 뒤 너무 오랜동안 속앓이를 겪어야 했다. '우리나라를 미래 에너지 1등 국가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안고 정부에 연구과제를 제안했지만 수개월동안 깜깜무소식이었다. '연구를 시작하라'는 아무런 조치가 없어 세월아 네월아 하며 '꼼짝마' 상태로 지내야 했다. 기술개발 속도전쟁 시대에 하루 빨리 연구개발에 돌입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뿐이었다.

그러다가 P 연구원은 상사로부터 '좀 더 정부에 로비를 확실하게 해야지'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 때부터 자연히 연구는 뒷전이 됐다. 로비를 위해 경기도 과천에서 거의 살다시피했다. 과학계 한 인사는 "연구를 잘해야 정부과제를 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로비를 잘해야 딸 수 있다는 말이 아직도 통용되는게 과학기술계"라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연구개발에 몰두하려는 일류 과학자들은 살아 숨쉬기 어렵다"고 한탄한다.

정부의 연구개발 사업비 배분방식 현황과 관련, 연구 현장 과학자들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최근 설문조사 결과가 눈길을 끈다. 대덕 출연연구소 과학자들의 대변단체인 '출연연연구발전협의회'에 따르면 현행 연구사업비 배분방식의 적합성을 묻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중 90%정도가 부적합다고 답했다. 적합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고작 8.8%에 그쳤다.

어느 분야보다도 합리적이어야 할 과학기술계가 정치 조직 못잖은 비합리적 사회임을 엿보게 해준다. 연구 현장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PBS(Project Based on System) 제도 실시로 먹거리가 부족한 가운데 과제 배분에 있어 특정 학맥이나 인맥이 판치는 것도 연구원들을 좌절하게 하는 요인이라는 것이 공공연한 말이다.

외국에서 연구 생활을 하다 청운의 꿈을 품고 고국으로 돌아온 우수한 두뇌들이 출연연의 이러한 연구 환경에 적응 못하고 방황하는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결국 고민이 깊어지면서 연구보다는 다른 곳으로의 탈출을 꿈꿀수 밖에 없게 된다.

"출연연은 연구소 아닌거 아시죠?"...연구개발 중간단계

"연구소는 연구소 아닌거 아시죠?" 정부출연연구소 새내기 박사가 연구소에 취직했을 당시 한 간부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처음엔 무슨 소린지 몰랐다. 연구소가 왜 연구소가 아닌지 궁금하기만 했다. 새내기 박사가 1년 동안 연구소에서 생활한 소감을 들어보자. "그 말이 맞는 말이었습니다. 한 연구 과제를 집중할 수 있는 풍토가 아닙니다. 정말 해야 할 연구는 안하고 서류작업이나 쓸데 없는 것에 시간을 소비합니다. 아마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연구 다운 연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겁니다."

하고 싶은 연구를 못하는 연구 환경은 연구원들을 옥죈다. 더군다나 소규모 과제 떼우기에 급급하는 연구수행 풍토에서 세계 일류의 연구성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수년간 연구소에서 활약하다가 최근 사퇴를 결심한 모 박사의 독백 역시 일류 연구성과가 나올 수 없는 한국 과학계의 현주소를 실감할 수 있다.

"1년에 과제를 10개 이상 하는 과학자도 있어요. 과학자가 아니라 앵벌이죠. 연구 과제도 아예 공무원들의 구미에 맞는 프로젝트를 제출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일류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깊이 있는 연구를 하려면 연구소에서 '왕따'당하거나, 적지 않은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면 대기업 연구소(LG전자)와 출연연, 양쪽 연구소를 모두 거친 후 벤처기업 창업 준비를 하고 있는 G 박사의 출연연 평가를 들어보자. 그는 "연구소에서 대부분 진행되는 연구는 아직까지 선진국 따라잡기 위한 연구가 많다. 한국이 잘할 수 있는 독창적인 분야는 없다"라면서 "때문에 일류는 없고 이류가 판친다"고 단언한다.

실패 없는 한국 과학계...연구개발 종료, 그 이후 단계

연구단지 E 박사는 일본의 대표적인 이화학연구소의 실패사례 공유를 부러워 한다. 한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다가 프로젝트 기간 내에 결과를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그 실패사례가 공론화된다. 연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왜 실패했는지', '실패한 요인들이 무엇인지' 등을 토론하며 향후 연구 프로젝트에 피드백(Feedback)시킨다.

실패가 드러나는 것은 '금기' 사항이 아니다. 오히려 실패를 꼼꼼하게 되씹는 연구 풍토다. 반면 한국 과학계는 상황이 좀 다르다. 실패가 없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각 정부 부처와 연구소들마다 연구성과 성공사례집은 있지만, 실패사례집은 없다.

실패가 전무하다보니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 한 연구원의 이웃 연구 실험실에 대한 현장 고발이다. "2년짜리 과제였어요. 과제 종료 기간이 다가와 부랴부랴 외국에서 개발된 제품을 수입해 왔죠. 조금 개조하더니 결과보고서를 내고, '외국보다 뛰어난 성과를 냈다'고 발표하더군요."

한국 과학계에서는 실패가 통용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한 번 실패하면 영원한 낙오자가 될 수 밖에 없는 분위기다. 이와 관련, 특히 국가 주도의 대형 프로젝트 대열에 끼지 못한 연구원들의 원성이 높다. 기초분야를 연구하는 한 과학자는 "평가도 제대로 못받고, 게다가 한 번 평가에서 C등급을 맞으면 다음에도 C등급을 맞을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연구소에서 한 번 낙오자는 평생 눈칫밥 먹고 산다"고 토로한다.

과학계 한 고위 인사는 "실패한 사람도 인정받고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과학계의 안전망 체계 구축이 시급하다"면서 "실패를 두려워 하는 문화는 세계 일류를 창출해 낼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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