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미국의 법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저는 미국 법체제를 분석하고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럴 능력도 없고요.대신 아주 재미있는 사건을 기술함으로써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법과 그 법이 집행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머리식히는 셈치고 부담없이 읽어주십시오.

미국 역사상 ‘세기의 범죄(The crime of century)’ 라고 불리는 사건이 있습니다. ‘리처드 린즈버그의 아들 유괴사건’이라고도 합니다. 독자여러분 중에서도 이 사건을 아시는 분이 많을 것으로 압니다만 제가 아는 한도 안에서 설명하죠.유명한 얘기라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1932년 3월1일 뉴저지주 호프웰에서 생후 1년이 안 된 유아가 유괴됐습니다. 유괴범은 한 밤중에 리처드 린즈버그의 2층 집에 사다리를 타고 침입, 그의 장남을 유괴했습니다. 범인들은 사다리를 그대로 둔 채 도망쳤습니다. 이 집주인인 린즈버그는 1927년에 홀로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기록을 세워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됐죠. 당시 그는 공군 장교였습니다.(그는 후일 2차대전이 터졌을 때 미국의 참전을 반대한 반전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그의 행보가 히틀러를 옹호하는 것으로 비춰져 친나치주의자라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미국영웅의 아들을 유괴한 사건. 당연히 엄청난 관심이 집중됐겠죠. 유괴범은 린즈버그에게 돈을 요구해 수만달러를 받아 챙겼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졌죠. 경찰이 유일하게 희망을 거는 것은 특별히 표시를 해 유괴범들에게 건넨 구권(신 화폐를 찍기 전에 유통됐던 돈)입니다. 유괴범들은 경찰의 이런 수법을 몰랐습니다. 때문에 경찰은 유괴범들이 이 돈을 쓰기만 하면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경찰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아메리카드림을 꿈꾸며 독일에서 이민온 목수인 찰리 카우프만이 사건발생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경찰이 표시한 돈의 일부를 주유소에서 기름값으로 지불한 것입니다. 당연히 경찰은 카우프만의 집을 급습, 그를 연행했습니다. 당시 카우프만은 결혼해서 생후 1년이 안 된 아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연행당시 그는 강도전과가 있는 전과자였습니다. 경찰은 그를 연행하자 마자 “어디서 이 돈이 생겼는가”라며 그를 추궁했습니다. 그는 “옛날 돈을 모으는게 취미”라며 둘러댔죠. 그러나 경찰이 그의 집을 수색한 결과 헛간 벽에서 유괴범에게 건넨 돈의 일부인 1만4천달러가 발견됩니다. 정황은 그가 범인이라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몸값으로 지불된 돈의 일부가 발견됐죠. 여기다 유괴범들이 사용한 사다리가 카우프만 같은 목수나 만들 수 있는 정밀한 것이라고 판명되면서 카우프만은 진범으로 몰립니다.

하지만 카우프만은 범행을 부인합니다. 그 돈은 피쉬라는 친구가 독일로 떠나기 전에 잠시 맡긴 상자안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약 7천달러를 피쉬에게 투자, 독일에서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피쉬가 독일에서 사고로 죽자 그는 7천달러를 날리게 된 것이죠. 하지만 피쉬가 독일로 떠나기 전에 맡겨논 가방과 상자가 생각나 뒤진 끝에 1만4천달러를 발견했습니다. 카우프만은 누구한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이 돈을 헛간에 몰래 감춰 뒀다고 진술합니다. 그리고 이 중 일부를 사용하다 경찰에 검거됐다고 주장합니다. 경찰은 그의 부인에도 불구, 수사를 강화합니다. 그러나 수사를 할수록 카우프만에게 유리한 정황만 나옵니다. 우선 카우프만의 알리바이가 확실했습니다. 그는 이날 부인과 함께 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값을 요구하는 편지의 필체와 카우프만의 필체를 비교한 필적감정전문가는 두 필체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경찰에 보고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직접 몸값을 건네면서 유괴범의 목소리를 들은 의사는 “카우프만과 유괴범이 동일한 것 같지 않다”고 진술합니다. 하지만 경찰은 필적감정전문가와 의사를 다그치고 린즈버그와 이웃에 있는 주민들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면 현상금을 줄 수도 있다”고 유혹, “카우프만이 유괴범과 동일하다”는 진술을 얻어냅니다.

물론 재판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죠. 배심원들은 유죄를 인정했고 법원은 1급 살인죄를 적용,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러나 카우프만은 계속 무죄를 주장합니다. 그러자 당시 뉴욕과 뉴저지 지역의 유력신문이었던 ‘이브닝 저널’이 카우프만에게 “유죄를 인정하는 솔직한 고백을 이브닝저널을 통해 독점으로 하면 9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이 정도의 돈이면 그의 아내와 아들이 평생 돈 걱정없이 살 수 있을 만한 액수입니다. 그러나 카우프만은 이를 거절합니다. “내가 범인이 아닌데 어떻게 유죄를 인정하는가” 그는 이같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당시 뉴저지 주지사였던 해롤드 호프만이 그의 무죄주장에 귀를 기울입니다. 납치한 아이의 몸값보다 2-3배 이상 많은 돈을 제시했는데도 불구,거절한 것을 보면 무죄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죠. 그래서 호프만 주지사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검사를 불러 비밀리에 사건을 재검토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사건을 재검토한 검사는 경찰의 수사과정에 무리가 많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특히 필적감정결과 왜곡, 증언왜곡 등은 수사결과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요소였죠.

이같은 특별검사의 재검토결과를 보고받은 호프만주지사는 직접 카우프만을 교도소에서 만납니다. 그는 카우프만의 말을 듣고 카우프만이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이에 따라 주지사는 검찰과 경찰에 재수사를 지시합니다. 하지만 검찰과 경찰은 오히려 호프만 주지사를 설득합니다. “만약 재수사를 하면 경찰과 검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 조직이 무너질 수 있다. 더구나 법정에서 증언한 많은 사람들이 위증죄로 처벌받아야 하는 등 무리가 많다”는 논리를 폅니다. 검경의 반발에 접한 호프만주지사는 타협점을 모색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치인이었기때문입니다. 그는 카우프만에게 씌운 유죄의 사슬을 풀고싶지 않은 검경의 입장을 고려해야 했고, 이민온 독일인에게 분노하는 뉴저지 주민들의 심리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번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도 그는 뉴저지 유권자들의 정서를 거스를 수 없었죠. 그래서 그는 카우프만이 수감돼 있는 교도소에 찾아가 “유죄를 인정하면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제안할 수 있는 마지막 타협안”이라는 말과 함께. 그러나 카우프만은 여기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이마저 거절합니다. 그러면서 한마디 합니다. “유괴사건의 범인으로 한사람의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나다. 나는 무죄이다. 하지만 희생양이 필요하다면 감수하겠다” 결국 카우프만은 사형에 처해집니다. 그러나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사형집행관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시오” 라고 그에게 최후진술 기회를 줬지만 그는 결코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는 죽으면서까지 거짓말을 한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신념과 목숨을 바꾼 것일까요. 아직도 이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확실치않습니다. 물론 법적으로는 카우프만이 범인이고 그를 사형에 처함으로써 사건은 종료됐습니다. 하지만 카우프만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이 사건을 ‘세기의 범죄’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눈길이 가는 것은 이민온 독일인을 희생자로 삼은 검경의 행태입니다. 당시 사건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뉴저지 검경은 주민들의 비난 때문에 사면초가에 몰립니다. 이때 이민온 전과자가 수사망에 걸립니다. 그러자 이들은 온갖 무리수를 두면서 이민자를 범인으로 몹니다. 미국 주민들은 이민온 외국인이 범인으로 밝혀지자 외국인들을 비난했습니다.이같은 사회적분위기가 사건의 재수사를 막은 것이죠. 나머지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호프만 주시사는 차기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에게 패했습니다. 유권자 눈치를 살핀 보람도 없이 선거에서 패해 그는 완전히 정계를 떠났습니다.

카우프만의 아내는 90살이 넘도록 살았습니다. 그녀는 90년대에 숨을 거두면서도 남편의 무죄를 확신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법은 엄정하다고 합니다. 법앞에서 예외가 없고 차별이 없다고 합니다. 공명정대한게 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접할 때마다 생각이….

뉴욕=김종윤(dalsae@hotmail.com)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