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가는 연구현장 ②] 연구환경 반영하지 못한 52시제
근무 시간 조절 가능한 점은 장점
"연구개발 집중이나 긴 시간 요하는 연구 어려워"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선임연구원. 최근 그는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 52시간 근무제(이하 52시제) 이후 선배들이 부탁하는(그는 '은근슬쩍 밀어넣는다'라고 표현) 업무에 매주 일하는 시간이 이전보다 더 늘었다. 그나마 일하는 시간을 보상받지도 못한다. 52시제 도입 후 남아서 근무할 경우 결재가 필요해 도둑근무를 하기 때문이다.

연구현장이 양극화 되는 양상이다. 지난 7월부터 연구현장에 도입된 52시제를 잘(?) 활용하며 샐러리맨 연구자가 된 부류와 제도에 상관없이 연구에 몰두하는 그룹으로 구분되고 있다. 밤 늦도록 여전히 실험실에 불이 켜 있거나  오후 6시 이후 아예 깜깜하고 금요일부터 사람의 온기가 없는 연구실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과학기술은 발견과 발명으로 지식체계나 인류에 기여하는 부분이 크다. 연구자 역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지식을 공유하며 과학기술 수준을 높여가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또 연구개발 성과를 사업화 해 사회와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때문에 연구자들은 창의성과 자율성이 보장되는 연구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새롭게 적용되고 있는 법규, 제도들은 과학계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이번 정권이 들어서고 사람 중심의 연구환경을 기대했던 연구자들은 52시제 등 일괄적용으로 연구현장이 더 침체되고 양극화 되고 있다며 다가오는 미래를 우려하고 있다.

◆ 몰라도 너무 몰라, 연구개발을 시간 정해놓고 하나

주52시간 근무제 도입은 주당 법정 근로 시간을 기존 68시간에서 52시간(법정근로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으로 단축한 근로제도다. 2018년 2월 28일 이같은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같은해 7월부터 300인 이상의 사업장에 적용됐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자 보호를 위한 강행 규정이다. 노사가 합의해도 52시간 이상 일을 할 수가 없다. 이를 어기면 사업주는 징역 2년이하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근로자를 과도한 노동에서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조치다.

과학계인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올해 7월부터 주52시제를 시행 중이다. 각 출연연은 52시제를 위해 새롭게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각 출연연마다 컴퓨터를 켜고 로그인, 로그아웃하는 프로그램으로 연구자의 52시간 근무여부를 확인한다.

연구 현장에서도 연구자의 과도한 근로를 막자는 차원에서 52시제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특히 아직 개인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하는 젊은 연구자들은 외부 일정 등 근무 시간을 조정할 수 있어 숨통을 트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반긴다. 이런 부분은 어느 분야에서나 앞으로도 지켜져야할 근무 여건 중 하나다.

문제는 52시제를 강제한다는 데 있다. 과학계에서는 연구개발 과정상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고 몰입해야할 시기가 필요한 연구 현장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며 오히려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제조 현장처럼 시간 맞춰 기계를 가동하고 멈추듯 연구도 시간재놓고 하라는 거냐며 어려움을 호소한다.

출연연의 연구자들은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은 연구는 상사의 결재 받는 절차가 불편해 다음날로 미루거나 아예 접어버리는 경우도 있다"면서 "신나게 연구하는게 아니라 점점 하지 않는 분위기도 일부 확산되고 있다. 칼퇴근과 불 꺼진 연구소가 현실화 되고 있다. 자율성이 침해되며 연구의욕마저 꺾이고 있다"고 토로했다.

◆ 열심히 일하는 연구자는 도둑근무? 샐러리맨화 연구실도

"진행되는 실험도 있고 과제 등 기한이 있어서 맘 놓고 52시제에 따라 일할 수 없는게 사실입니다. 주말에도 나오거나 퇴근후에도 연구실에 남게 되죠. 그런데 결재 맡는게 불편해 도둑 근무를 합니다. 그럴때마다 이직 생각이 드는게 사실이고요."

출연연의 몇몇 선임 연구자의 목소리다. 그들의 목소리는 비슷하다. 여전한 연구 열정으로 그들은 실험실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도둑처럼 근무할때면 자괴감이 들며 이직을 생각하게 한다고 밝혔다.

출연연의 한 젊은 연구자는 "52시제 후 근무시간을 공식적으로 유연하게 할 수 있는 것을 빼면 자율성은 더 없는 것 같다. 후배에게 일을 떠 맡기는 선배도 있고 52시제를 언급하며 개인 생활에 충실한 연구자를 볼때면 나는 뭐하고 있나 싶다. 다 좋은데 제도의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연구소가 오래 되면서 고령화 되고, 일 안해도 후배에 얹혀 과제에 이름넣어 월급 받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52시제도 아주 잘 활용한다"면서 "일괄 적용되는 제도가 아니라 정말 열심히 하고 실력 있는 연구자들이 대우받고 인정받는 연구환경, 집중할때 집중할 수 있는 자율적 연구 환경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실제 올해 상반기 연구현장을 떠난 연구직은 최근 5년에 비해 늘었다. 대학으로 간 연구자들이 다수다. 신용현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회의원의 자료에 의하면 올해 6월까지 이직한 출연연 연구자는 82명이다. 2015년 123명, 2016년 124명, 2017년 147명, 2018년 117명으로 지난해 약간 감소했던 인원이 올해는 상반기를 기준해 본다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직자(593명)의 절반 이상(336명)인 57%가 대학으로 옮겼다. 산업계 43명(7%), 정부연구기관 38명(6%), 민간연 6명(1%) 순이다. 최근 5년간 퇴직자가 가장 많은 기관은 ETRI 99명, 한국원자력연구원 55명, KIST 55명, 한국생산기술연구원 34명, 한국항공우주연구원 32명, 한국기계연구원 31명 이다. 이들의 이직 사유는 정년이 길고 처우가 더 좋은 대학으로 옮긴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과학계의 관계자는 "연구 현장의 인력이 대학으로 옮길 수도 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인력이 빠져나가면서 한국의 연구경쟁력이 하락하고 신진 인력 유입을 더 어렵게 할 수 있다"면서 "정부는 현장의 실태와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과학계도 당장 몇몇 이익 요구가 아니라 큰 프레임의 연구환경 개선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포함되는 50~299인 사업장에 적용키로 했던 52시제의 보완대책을 발표하며 사실상 연기했다. 

출연연 관계자는 "주52시제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중소기업은 실질적인 반영이 어려운 현실이 있고 출연연은 연구 특성이 있다. 정부가 이런 점을 감안해 제도를 개선하고 유연하게 적용해야 한다"며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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