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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소재 둘러싼 한일 갈등과 과학계

[대덕단상] 과학기술, 후방에서 전방으로 패러다임 변화
연구뿐 아니라 국가 현안 해결에도 주도적 역할 기대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는 우리 과학기술자들에게도 많은 화두를 던져준다. 시키는 일을 잘 하는 기능인을 뛰어넘어 사회의 문제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찾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사진은 이번 수출 규제의 대표적 아이템인 도쿄오카공업주식회사의 포토레지스트 제품이다. 도쿄오카공업은 1936년에 창립해 8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미세가공기술에 특화된 기업이다.<사진=도쿄오카공업주식회사 홈페이지에서 촬영>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는 우리 과학기술자들에게도 많은 화두를 던져준다. 시키는 일을 잘 하는 기능인을 뛰어넘어 사회의 문제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찾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사진은 이번 수출 규제의 대표적 아이템인 도쿄오카공업주식회사의 포토레지스트 제품이다. 도쿄오카공업은 1936년에 창립해 8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미세가공기술에 특화된 기업이다.<사진=도쿄오카공업주식회사 홈페이지에서 촬영>

과학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됐다. 가치 중립적이어서 정치의 세계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되던 분야가 과학기술이다. 때문에 국제적인 정치나 경제 갈등이 불거져도 과학은 후방에서 무풍지대였다. 그런데 이번 한일 갈등에서 패턴이 깨졌다. 새로운 상황의 전개이다.

이번 사건은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자와 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국가와 민족은 어떤 관계인가, 과학자와 사회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연구개발과 관련짓는다면 테마를 선정할 때 그 기준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되어야 하는가, 인류 난제 해결이 되어야 하는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어야 하는가와 관련된다고 하겠다. 3가지 기준에 다 맞으면 좋지만 그 중 하나나 둘만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인가라는···.

반도체 분야의 어느 전문가는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에 이번에 문제가 된 소재인 폴리머를 연구하는 과학자는 매우 많다. 하지만 가장 문제가 된 'EUV 포토 레지스트'를 연구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유는 많다. 시장이 작고, 이미 일본에 고도의 전문 기업이 있고, 국산화 이야기하면 기업이나 정부에서 별로 관심도 없었고...그럼에도 누군가가 준비를 해서 이 상황에서 대안을 제시한다면 그는 영웅이 될 것이다. 준비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나 할까. 지금으로서는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연구하는 사람은 많은데 왜 국민이, 사회가 필요로 할 때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공동체에 희망이라도 주는 경우는 왜 별로 없을까?

많은 사람이 열심히 연구한다. 주 52시간을 둘러싼 출연연 종사자의 격론도 찬반 모두 잘해보자는 것이지 대충 놀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여서 사회가 아쉬워할 때마다 과학계가 속시원한 해답을 내놓는 장면을 접하기 어려울까? 이런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과학기술자도 많지 않다. 몇몇 사람만이 이야기 소재로 삼지 토론회가 열리거나 스터디 그룹이 만들어지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혹자는 이야기한다. 한국이 숙적으로 생각하는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일본 사람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고. 과학자라면 日 과학자를, 언론인이라면 日 언론인을, 학생이라면 日 학생을 능가해야 그 총합으로 국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단순 논리이다. 정답은 아닐 수 있으나 참고는 될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과학기술자가 일본의 과학기술자를 이길 수 있는가?

일본 과학자들의 연구에 대해 대덕단지에서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의 대표적 연구소가 이화학 연구소이다. 100년 넘는 역사를 지녔다. 이곳에서 20년 넘게 연구하고 있는 한국인이 있다. 김유수 박사이다. 그의 연구 능력은 내부에서도 인정받아 3000명 넘는 연구원 가운데 1%에 해당하는 책임연구원에 선정됐다. 외국인임에도 연구원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평의회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가 말한 일본 연구원들의 자세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번째는 왜 과학을 하는가란 질문을 늘 한다는 것이다. 연구를 시작할 때만 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는 과정에서도 이 질문을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샐러리맨 연구원이 아니라 프로 연구원으로서의 자세를 갖추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고.

두번째는 창피함을 안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분야에서 어느 정도 수준인지 늘 가늠하며 뒤쳐지지 않고 앞서기 위해서이다. 뒤떨어졌다고 판단되면, 더 이상 어렵다고 생각되면 다른 테마를 찾거나 다른 인생 행로를 택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 늘 독서하고, 학회지와 신문 등에서 정보를, 사회의 흐름을 파악하고, 동료들과 이야기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는다. 일본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이 이야기하는 것도 비슷하다.

우리 과학기술자들은 이런 일본 과학자들과 겨루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열심히 해왔다. 그러기에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해답이 있는 문제를 풀었다. 앞으로는 정답이 없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 기본을 계속 되묻고, 흐름도 놓치지 말아야 하고, 대중과도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할 일이 훨씬 많아진 셈이다. 남의 것 베끼면 잘해도 국내에서만 인정 받았는데, 새로운 문제를 풀면 세계적으로도 박수 받게된 만큼 해볼만하다고 할 것이다.

이번 문제가 단기간에 끝나지 않으리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장기화될수록 기본에 강해야 한다.

일본이 강하게 된 이유의 하나가 지진과 태풍 등 자연재해이다. 우리도 인프라가 미약한 시절에는 홍수와 태풍 등의 재해를 당하며 긴장했고, 해결책을 찾았고 발전했다. 이번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와 그로 인한 한국 산업 및 경제에 대한 피해는 어떤 의미에서는 또다른 재난이다. 더군다나 상대의 수가 잘 안보이고, 우리의 카드도 마땅한 것이 없이 우왕좌왕하는 현실은 한국 사회에 많은 숙제를 남기고 있다.

서중해 KDI 박사는 이야기한다.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의 강연에서 모든 것이 과학기술로 통하고,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등등을 과학기술로 풀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과학기술은 이제 후방에서 세상 돌아가는 것과 무관한 분야가 아니다. 모든 것을 풀 수는 없겠지만 많은 것을 풀 수 있는 막강한 존재이다.

그러려면 과학기술자들도 보는 안목을 높고 넓게 가져야 한다. 주어진 문제를 푸는 기능인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시대의 문제를 내고 해결책을 찾고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상식 수준에서 외교도 알아야 하고, 사회 흐름도 파악하고, 대중과도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유형의 과학기술자상이기에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다. 일본이 한국을 공격한 것은 어찌보면 해방 이후 처음이다. 발목을 잡은 적은 있어도 도와준 것이 더 많았고 그 덕에 우리가 오늘날의 번영을 이루게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태 전개가 현상황 유지일 수 있고 확전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바뀐 상황에서 과학기술자들도 생각과 행동을 바꿀 필요가 있다. 후방에 머물며 문제의 뒷전에 있을 것이 아니라 갈등의 전면에도 나타나야 한다.

반도체 소재 사태를 악화시킨 요인의 하나로 일부에서는 화학물질 관련 규제 및 입법을 든다. 화평법(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과 화관법(화학물질 관리법)이 그것이다. 이 법률로 기존 화학물 사용도 힘들지만 새로운 화학물질 개발은 엄두도 못낸다는 것이 산업계의 목소리이다.

새로운 규제나 입법이 될 때 전문가들이 전문적 식견을 표해야 한다. 그래야 혼란이 덜해진다. 가습기 살균제와 불산 가스 누출로 인한 사망사고로 당시 여론이 안좋았다. 이후 입법이 될 때 화학연구원을 비롯해 전문가들이 이 두 법에 대해 의견을 표명했다는 기억이 거의 없다. 현상을 보면서도 전문가적 식견으로 앞도 내다봐야 하는 것이 연구현장에 있는 전문가들이 새롭게 닥친 현실이다.

맥락 파악의 연장선상에서 반일순중(反日順中)의 낡은 패턴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세계는 개방됐고,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다. 우리의 실력도 이제는 대국이다. 다른 나라가 한국을 대국으로 대우하는데 우리만 아직도 식민지 희생국이란 소국 패러다임에 갇혀 있기도 하다.

우리가 최고란 소중화 의식의 자아과잉도 곤란하지만, 제국 시대의 희생자 의식도 시대착오이다. 이번 일을 통해 결국 우리 문제는 우리가 풀어가야 하고, 그러려면 객관성을 확보하고, 합리성에 기초해야 한다. 열린 자세로 세계와 교류하고, 인류 보편의 가치에 공감하고, 이를 확산시켜야 한다. 우리를 위협하는 세력에는 단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결국은 실력이다. 

미국이나 일본, 중국 등등은 각각의 패를 갖고 움직일 것이다. 우리도 그들의 시나리오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며 대처해야 한다. 중국에는 약하고, 일본에는 강한 낡은 프레임으로는 안된다. 민족이란 이름으로 북한만 바라보는 자세도 바람직하지 않다.

과학기술자들이 연구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 국방, 외교 등을 생각해야 하는 현 상황이 마뜩찮고 낯설을 수 있다. 하지만 시대가 그렇게 됐고, 이미 선진국의 과학계는 그렇게 움직인다. 우리 과학계가 이번 일을 계기로 의제 형성자로 거듭 나서 전화위복의 결과를 만들기를 많은 사람이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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