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소재 중 90%이상 의존, 日 내달 15일 '화이트 리스트' 제외 발표
과학산업계 "이번 계기로 과학기술, 산업 취약 부분 보완해야"
"단기 성과 안 나와도 견뎌줄 시스템, 연구자간 융합 필요"

일본의 핵심 소재 수출 규제가 지속되며 한국의 관련 기업들도 위축되고 있다. 삼성, SK 하이닉스 등 반도체 분야 대기업이 투자를 줄이면서 중소기업도 직격탄을 맞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일본 출장으로 긴급물량을 일부 확보하면서 급한 불을 껐지만 반도체 소재·설비의 국산화를 위해 현장에선 정부의 장기 지원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은 자타가 인정하는 반도체 강국이지만 소재·장비·부품은 여전히 일본에 의지하고 있다. 기술격차로 일본이 규제 공세를 펼치면 반도체 강국의 위상도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구조라는 의미다. 실제 중소기업중앙회가 일본 수출제한 조치와 관련해 기업 269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기업 59.0%가 일본 수출 규제가 지속될 경우 6개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답했다.

일본이 단행한 초유의 공세에 과학산업계는 "문제의 본질은 과학기술 패권 전쟁"이라며 "그동안 미뤄온 소재·부품 분야 연구와 산업육성을 위해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1일 예고한대로 4일부터 반도체·디스플레이의 핵심 소재 3종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 레지스트, 불화수소에 대한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경제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지난 12일 열린 한국과 일본의 첫 양자협의에서 일본이 이르면 다음달 15일부터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며 시간표까지 제시했다. '포괄적 수출허가 대상', 이른바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되면 1100여 개 품목에 대해 건별로 일본 정부의 수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로 인해 허가 신청과 심사까지 90일 가량 소요될 수 있고, 해당 품목들에 대한 수출 불허까지 이어질 수 있어 국내 산업의 광범위한 타격이 우려된다.

◆ 국내 산업 자체가 없는 반도체 소재 

한국무역협회에 의하면 반도체 주요 소재의 대일 수입의존도는 2018년 기준 포토 레지스트 91.9%,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43.9%, 플루오린폴리이미드 93.7%에 이른다. 핵심 소재 대부분을 일본에서 조달하는 셈이다.

박인준 한국화학연구원 박사는 "포토 레지스트는 빛에 반응하는 감광물질로 국산화가 전무해 방법이 없고, 폴리이미드도 충격이 클 것으로 보인다"며 "불소화학도 국내 산업 자체가 거의 없어 일본이 다음 달 15일부터 부품 위주로 공격을 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박 박사는 "국제적으로는 미국, 독일, 중국 등과 협력으로 대응해야 하고 국내에선 불산부터 중간체, 최종 소재까지 나오는 공단을 구성해 국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구자현 한국개발연구원(KDI) 박사는 "이번 위기가 그동안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발전시키지 못했던 소재·부품 산업에 발전을 이끄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며 "오랫동안 화학과 관련한 기초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돼왔고, 화학 연구를 하려는 기업들이 있었다. 화학 안전 문제로 기업이 지역에 들어가기 어려웠는데 이번 계기로 안전 관련 인프라는 정부가 지원을 해주고 그런 환경에서 기업이 제품 개발을 할 수 있도록 환경 조성이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단기 성과 안 나와도 견뎌줄 시스템, 연구자간 융합 필요"

한국반도체협회는 소재와 장비의 국산화 비율은 각각 48%, 18%라고 밝혔다. 반도체 산업의 취약한 기술력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중소기업중앙회 의견조사에 참여한 기업 중 23%는 1개월에서 3개월을 버티기 어렵다고 답변한 사실도 국내 산업의 기술력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반도체 장비 전문 기업인 P 기업 관계자는 "1990년대 초 장비 개발에 처음 뛰어 든 것도 일본의 일방적  수출 단절을 대비하기 위해 대기업과 협력해 시작할 수 있었다"면서 "기술을 개발하기까지 7년의 시간이 걸렸다. 민간 기업에서 이렇게 투자하기란 쉽지 않다. 긴 안목의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명호 여시재 선임연구위원은 "필립스가 반도체 제조를 포기했어도 주변의 반도체 장비업체들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며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반도체 노광 장비 업체인 ASML(Advanced Semiconductor Materials International)도 필립스의 한 부서에서 시작해 1984년 독립했다. 반도체 제조는 안 하더라도 반도체 관련 산업은 여전히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우리가 약한 산업이 탄탄해지고 지속되려면 협력 관계를 통해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며 "그동안 단기간 이득이 날 수 있는 부분에 초점을 맞췄는데, 장기간 서로의 이익을 균등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 생태계를 고민해야 한다. 이번 이슈를 통해 산업의 불균형, 생태계 내에서 분절 요소를 점검하고 다시 위기에 닥치지 않도록 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이 선임연구위원은 "우리와 일본의 축적된 역량 차이는 명확하다. 기초과학에 대해 많은 금액이 아니더라도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며 "장기적으로 하다보면 파생되는 분야가 나온다. 눈 앞 이득이 아니고 장기적으로 리스크가 될 수 있는 부분을 대비하고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고민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구자현 박사도 "그동안 단기적인 성과를 요구하면서 기초연구보다 응용연구가 이어졌다"며 "기초과학 필요성이 요구가 되긴 했지만, 동력을 받기 쉽지 않았다. 우리도 성숙 단계가 됐고, 원천 기초연구가 짧은 시간에 성과가 안 나와도 견뎌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구자현 박사는 국가적 미션 아래에서 연구소간 융합하는 미국의 사례도 들었다. 그는 "정부가 특정 소재·부품 개발에 기초연구 미션을 주면, 다수의 연구원이 융합하는 환경이 잘 구축돼 있다. 우리도 그쪽으로 한 발씩 나아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가 오랜 기간 한국 산업의 취약점을 검토·준비해 파고든 만큼 경제 보복 2·3탄이 나올 우려가 크다. 하지만 과학계는 이번 계기를 잘 활용하면 과학기술, 산업 부분에서 취약했던 점을 재점검하고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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