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순석 ETRI 커뮤니케이션전략부장

이번 149차 새통사 모임은 임현균 박사님(한국표준과학연구원)과 '안다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를 주제로 폭넓은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임현균 박사님은 매일 아침 대덕 사람들에게 보내는 '무시기(무작정 시작한 그림이야기) SNS'로 유명한 분이다. 무시기 이야기를 보내기 하루전 밤 10시부터 꼬박 2시간 30분에 걸쳐 내일 아침에 보낼 글을 작성한다. 그리곤 아침에 6시 30분에 일어나 다시한번 글을 다듬고 출근 전에 600여명의 독자들에게 카톡으로 화가와 그 화가의 그림이야기를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50여분의 화가를 발굴, 무시기 이야기를 만들고 2년째 다듬어 가고 있다. 책의 분량으로 따져보면 벌써 5권 정도의 분량이 축적 돼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나는대로 과학강연 재능기부도 한다.

연구소에서 전문분야는 의과학 표준기술 개발로 생물학, 화학, 공학, 물리학, 심리학, 통계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와의 접목이 필수다. 최근에는 과학이 사람을 위해 어떻게 사용되는지 이해를 돕는 '의과학산책'이라는 책도 발표하고, 국가적으로 방치상태에 있는 이른둥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새롭게 전개하는 실천 과학자다.

◆고맥락 언어 vs 저맥락 언어

강연은 선진국과 후발국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맥락적 관점 차이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됐다. 고맥락 언어와 저맥락 언어는 구체성의 차이를 가르는 용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거시기'가 대표적인 단어가 아닌가 싶다. 황산벌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신라의 스파이가 계백장군이 이야기하는 '거시기'를 해독하지 못해 쩔쩔매는 장면에서 웃음을 멈추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거시기'는 대상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광범위한 용도의 대명사다.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거시기'는 대명사뿐만이 아니라 동사, 형용사, 관형사, 부사, 감탄사로도 쓰인다. 이런 단어는 우리나라 사투리에 참 많다. 왜 이런 단어들이 많은지에 다음 기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여하튼, 이렇듯, '거시기', 경상도의 '가', 충청도의 '됐슈'와 같은 언어를 우리는 고맥락적 언어라고 이야기 한다.

고맥락적이라는 말은 수많은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행동에 하나의 사건에 따라 똑같은 단어이지만 뜻이 다르다. 이런 고맥락적 언어는 상황과 관련된 숨어있는 수많은 관계성에 대해서 수많은 시간동안 경험적으로 익혀온 언어이다. 이런 이유로 고맥락적 언어의 사용은 사용의 범위가 한정될 수밖에 없다. 언어적으로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언어를 이야기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런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사람들끼리의 대화는 어떠해야 할까.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고민할 필요도 없이 구체적이라야 한다. 뇌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람과 사람이 어떤 한 단어를 똑같은 뜻으로 알고 있을 확률은 지극히 낮을 수밖에 없다. 기억의 시냅싱을 가능하게 하는 생화학 반응에 관여하는 입자들의 낱개를 정확하게 제어할 수 있는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언어가 아니라면, 끊임없이 서로가 그 뜻에 대한 이해를 좁혀갈 뿐이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같이 있는 시간과 서로 대화하는 양이 결정해준다.

이런 언어가 가지는 한계성 때문에 언어를 '구체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미세한 변화 하나 하나를 구분해 표현해야 하고 또 상대방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어야만 비로소 구체화된 단어 하나가 탄생한다. 여기서도 역시 언어에는 상대방이 존재하다. 언어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집단의 것이다. 집단에서 보편적으로 뜻을 이해할 수 있을 때 그 언어는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언어가 집단적 학습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뜻을 추구하는 인간에 있어서 '언어 교육'의 필요성은 여기로부터 나온다.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언어, 즉 저맥락적 언어를 구사하는 나라는 집단 교육 정도가 높은 것이다. 물론, 저맥락적 언어는 집단 활동의 심화로 자연스럽게 고맥락적 언어로 진화해 나간다. 그러나 구체성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 고맥락 언어는 위험성과 허술함이 존재한다. 

◆아는 것은 새로운 앎을 찾아 나서게 하는 힘

언어적 유희 같지만, 여기서의 안다는 것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의 줄임말이다. 아는 것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거나 재현할 수 있는 앎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임 박사님은 쾨테의 유명한 말 "You only treat what you see. You only see what you look for, and you only look for what you know"을 통해서 아는 것을 설명하셨다. 이 말이 사람의 한계성을 말해주는 가장 적절한 문장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자신의 주관성에 얼마나 매몰되어 살아가는지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아는 것을 찾고, 찾은 것을 보고, 본 것만 시도 한다'라는 뜻 이외에도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바로 'what you know'라는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 핵심적인 내용이다. 바꿔서 말해도 마찬가지다.

그럼 내가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맥을 같이 한다. 아는 것의 범위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보다 더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정확히 모르는 것을 쫓을 수 있다는 것과 동치적이다. 알고 있다는 것은 정확히 기억되어 있다는 말이다. 정확하게 기억되어 있다는 말의 뇌 속에서 기억되어 있는 다른 것과 정확하게 차이를 구분해낸다는 말이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관점(perspective)을 결합해보면,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이 정확하게 기억하는지 분명해진다. 뭘 하나를 알아도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것과의 차이를 입체적으로 분류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Alan Kay는 가장 확실한 미래 예측은 미래를 직접 만드는 것(The best way to predict the future is to invent it)라는 말로 유명하다. 그는 새로운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IQ가 80정도 올라가는 힘이라고 비유한다. Ana Kay의 TED가 도움이 될 듯하다.(주옥같은 그의 말을 감상해 보시면 좋겠다. https://youtu.be/mnjlLP-Gkps )

잘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은 범주화를 잘 할 수 있다는 것. 범주화는 정보의 소화능력이다. 이는 새로운 것을 받아 들이는데 힘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아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게 하는 힘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는 나태주 시인의 싯구는 로맨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결국 아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게 하는 관찰의 힘을 기르게 한다. 뇌과학적으로 사람은 친숙한 것에 마음에 문을 연다.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은 받아 들인다는 의미이다. 아는 것이 많은 것은 낯선 것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낯선 것을 받아 들이면서 아는 것이 많아지고 그것으로부터 즐거움이 유발된다면 우리는 낯선 곳으로의 도전을 즐기게 된다. 
 
◆아는 것이 소통의 시작이다

사람들이 세상을 알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세상을 지배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물질세계의 생성과 구조와 운동법칙에 대한 앎의 굶주림을 채우기 위하여 사람들은 과학을 한다. 과학적 발견과 과학적 앎이란 구체성과 객관성에 대한 끊임없는 경쟁의 결과이다. 그 경쟁 속에서 새로운 구체성으로 객관화 할 수 있는 새로운 앎이 탄생하면 과학적 앎은 그 앎의 결과를 수용한다. 그것이 과학이요, 과학적 사유다. 때문에 과학적 사유가 사람들 속에 파고든다는 것은 수많은 무의미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증거를 기반으로 판단하는 것이 과학적 사유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은 측정이다. 측정없는 과학은 없다'라는 말이 힘을 가진다. '측정이 세상을 개선하는 첫단계다'라는 말이 힘을 가진다. 측정이 있어야 구체적으로 기억해 알게되고, 그 앎으로부터 대상을 구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만 그것의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해링턴 박사의 말이 공감이 간다.

측정의 첫 단계는 관찰이다. 관찰의 결과를 객관화하기 위해 공통의 척도가 필요하다.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척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측정은 척도의 기술이다. 초연결의 세상은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 가로등이 하나씩 둘씩 켜지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다. 그렇게 발견되는 세상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기준으로 볼 수 없는 '그 무엇'들이 존재한다. 과학의 대상은 무궁무진하다는 이야기다. 그 필요를 찾아내는 노력은 우리 '새통사'가 가지는 지향점 중의 하나다.

임 박사님은 강연의 마지막에 본질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본질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응용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타인의 것에 대한 본질을 꿰뚫어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공부다. 많은 대화와 여행과 경험을 하라고 충언하신다. 그렇지 못한 처지라면 책이라도 읽으라고 조언하신다.

융합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타인들을 만난다고 되지 않는다. 서로 아는 것을 교환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아는 것이 먼저다. 다시 돌아와서, 아는 것은 분류할 수 있는 힘이고 분류할 수 있는 힘은 추상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추상할 수 있는 힘은 비로소 타인과 타자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연결점을 제공한다. 그 속에서 창의는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기 마련이다.

찰나의 틈을 찾아 내기 힘들 정도로 촘촘한 삶을 살아가시는 와 중에 새통사에 또 하나의 통찰을 던져주시고 가신 임현균 박사님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새롭게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른둥이 보호'를 위한 새로운 발걸음에 하루빨리 결실이 맺어져 행복이 폭설처럼 가득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