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성기수 전 학술정보원 이사장, 다니엘 리드 유타대 부총장
"전 세계 투자 확대···韓도 경쟁력 갖춰야"

"5호기 개통을 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지난 30여년전 1호기 도입 당시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아흔을 앞둔 나이가 됐네요.(웃음). 당시 슈퍼컴 도입을 위해 언론 기고도 하고, 관계자들을 만나며 설득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약 4년여의 시간이 지나서야 한국에 1호기를 도입할 수 있었습니다."(성기수 전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이사장)

"인공지능, 빅데이터 기술이 발전하면서 슈퍼컴퓨터 활용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습니다. 슈퍼컴은 수학·계산을 위한 도구에서 확장돼 '통찰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역할이 커지고 있습니다."(다니엘 리드 유타대 부총장)

슈퍼컴퓨터 5호기 '누리온'이 지난 7일 KISTI에서 개통식을 갖고 베타서비스에 들어갔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 11위 슈퍼컴퓨터를 보유한 국가가 됐다. 앞으로 산·학·연 연구자들이 이를 활용하면서 초거대문제 해결, 국가·사회 현안 해결에도 나설 수 있게 됐다. 

누리온은 미국 CRAY사가 만든 것으로 구축에 약 900억원이 투입됐다. 누리온(11위)을 제외하면 한국은 세계 100위권 순위에서 누리(75위), 미리(76위) 등 2기를 보유했다. 이를 감안하면 국내 슈퍼컴 투자 확대, 국산화 문제 등 해결할 과제들이 다수다.

유럽, 중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슈퍼컴퓨터를 과학·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필수 자원으로 보고, 국가차원의 활용을 위해 우수한 슈퍼컴퓨터를 경쟁적으로 개발·도입하는 추세다.

KISTI의 슈퍼컴퓨터 5호기 개통식을 찾은 성기수 전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이사장, 데이얼 리드 유타대 부총장을 만나 슈퍼컴 1호기가 도입된 과거부터 현재,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슈퍼컴퓨터 5호기 '누리온'.<사진=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공>
슈퍼컴퓨터 5호기 '누리온'.<사진=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공>
◆80년대 슈퍼컴·국산 전산화 시스템 구축···해외 구애도 거절

성기수 전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이사장은 한국 최초 초고성능컴퓨터를 도입한 주역으로 주요 기관 전산화, 전산전문 인력 양성으로 국가 기초과학과 IT 발전에 기여했다.

지난 1980년대 중반 한국은 기초과학, 산업계 기술력이 선진국 대비 낙후됐다. 성 이사장에 의하면 자동차 엔진 설계도 제대로 할 수 없어 엔진 도면을 사와야 했을 정도였다.

성 이사장은 국제 동향을 살피면서 국가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슈퍼컴퓨터 도입을 추진했다. 단시간에 한국이 선진국을 추격하려면 인터넷 계통을 대중화하고, 슈퍼컴을 전국 과학·기술자가 사용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단기간에 한국이 선진국을 따라 잡으려면 정보획득(Date Access) 능력과 정보 가공(Data Processing) 능력 두가지 측면에서 한국 과학자들이 선진국과 같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슈퍼컴 도입 과정은 쉽지 않았다. 성 이사장은 슈퍼컴 사업이 좌초할 위기도 있었다고 토로했다. 당시 미국, 일본, 대만 등에서는 기종 선정을 잘못해 슈퍼컴 센터가 존폐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같은 무렵 한국도 CRAY-2와 ETA-10 중 선택을 논의 중이었다. 실제 벤치마크 테스트 프로그램으로 이를 써보고 성능을 측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CRAY-2는 계산속도가 느리지만 답을 낸 반면 ETA-10은 우수한 성능을 갖고 답을 도출하지 못했다. 

성 이사장은 "1호기 사업이 잘 돼야 했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했다"면서 "성능이 더 좋은 것을 써야 한다는 주장을 이겨내고, CRAY-2를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이 됐다"고 말했다.

당시 슈퍼컴퓨터 도입과 함께 중점적으로 추진한 것이 88올림픽을 앞두고 전산시스템을 국산화하는 것이었다. 정부기관, 민간기업 전산화를 위한 프로젝트가 본격화됐다. 성 이사장은 "88올림픽 전산시스템 구축과 슈퍼컴 도입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연구개발에 매진했다"면서 "많은 이들의 도움과 노력으로 두가지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 과정 끝에 개발된 것이 올림픽 전자시스템 '자이온스'다. 한국의 우수한 기술 경쟁력을 증명하자 전 세계에서 구애도 잇따랐다. 성 이사장은 "사우디, 이란 등 중동에서 거대 자본을 몰아주고, 한국 기술자를 수백명 데려와도 좋으니까 와달라는 요청이 많았다"면서 "개인적인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것보다 국내 기업과 기관에 전산화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해 거절했다"고 말했다. 

또 성 이사장은 "당시 팀을 이끌고 회사를 창업했으면 한국 최고 소프트웨어 회사가 될 수 있었겠지만 일부러 하지 않았다"면서 "자생적으로 벤처기업이 탄생하고 발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전산화와 슈퍼컴 활성화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앞으로 슈퍼컴퓨터 활용과 발전을 위한 조언도 건넸다. 특히 국산화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현실적으로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성 이사장은 "국산화 문제는 활용 문제는 별개"라면서 "국산화 노력을 계속하기는 하되 반드시 성공을 가정하고 투자하기 보다 망할 각오로 투자하며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 이사장은 "단시간에 빠른 성장을 일궈낸 것은 전세계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며, 한국이 운이 좋았다"면서 "젊은 연구자들이 사명감과 인내심을 갖고, 슈퍼컴을 비롯한 IT 발전에 매진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성기수 전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이사장.<사진=김인한 수습기자>
성기수 전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이사장.<사진=김인한 수습기자>
◆美·中 전략적 투자 강화···"슈퍼컴으로 '통찰력' 획득해야

전 세계적으로 보면 슈퍼컴퓨터 1위를 차지하기 위한 미국과 중국의 개발 경쟁이 활발하다. 지난 6월 기준 미국의 서밋(Summit)이 선두를 차지하면서 중국의 선웨위 타이후라이트(Sunway TaihuLight)가 뒤를 이으면서 선두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펼쳐지고 있는 것. 

계산과학자이자 과학정책, 고성능 컴퓨터 전문가인 다니엘 리드(Daniel A. Reed) 유타대 부총장은 그 배경에 경제적 이유를 꼽았다. 슈퍼컴퓨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이끌고, 이에 활용되는 기술이 산업, 학계 등에 파급될 수 있다는 이유가 크다. 

다니엘 리드 부총장은 "미국은 단기적으로 메모리나 프로세서와 같은 지속적인 요소기술 개발을 추구한다"면서 "장기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물리적 특성을 갖춘 양자 컴퓨터 개발에도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슈퍼컴퓨터의 중요한 목적으로 '통찰력' 획득을 꼽았다. 성능보다 이를 통해 얻게 되는 기술개발과 유의미한 결과값 도출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등 미래 기술의 발전도 빠른 계산이 중요했던 과거와 달리 통찰력을 요구하고 있다. 과거 슈퍼컴이 수학적 모델을 통해 질문에 맞는 답을 구했다면 이제는 데이터라는 답에서 질문을 찾는 과정으로 바뀌고 있다. 기존에 분리되었던 GPU, 가속기 등이 인공지능과 같은 신기술과 결합해 활용되고 있다.

그는 슈퍼컴을 '양파'에 비유했다. ​층이 쌓인 양파처럼 각종 기술이 계속 출현한다는 것이다. 가령 사물인터넷이 발전하면서 모든 사물에 지능이 생기고, 미래 사회에 영향을 준다. 슈퍼컴퓨터는 PC, 스마트폰, 사물인터넷 기기처럼 소멸하지 않고 활용된다. 

다니엘 부총장은 "양자컴이 경우도 슈퍼컴을 대체하지 않고 독립된 개념으로 지속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면서 "슈퍼컴이 양자컴에 인풋과 아웃풋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데이터를 입력해서 컴퓨터가 답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질문을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스마트시티, 실시간 의사결정, 실시간 기상예보와 같이 지속적인 데이터를 입력하고 외부와 상호작용하면서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중요해졌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슈퍼컴퓨터 활용과 발전방향에 대한 조언도 이어졌다. 그는 슈퍼컴 5호기를 구축한 한국 연구진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하드웨어 만큼 소프트웨어, 인적 자산 확보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IT 대기업들을 보유한만큼 슈퍼컴퓨터 국산화를 위한 가능기술(Enabling Technology)을 갖췄다고 진단했다. 

다니엘 부총장은 "구매와 국산화 문제에서 하드웨어와 함께 인력, 소프트웨어도 중요하다"면서 "KISTI를 비롯한 한국 연구진이 하드웨어를 활용해 공학적 설계와 시뮬레이션을 지원하도록 하는 역량을 갖췄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전 세계에서 화두는 차세대 슈퍼컴퓨터의 모습"이라면서 "하드웨어 개선이 한계에 다다른 시점에서 양자컴퓨터를 비롯한 신개념 컴퓨팅 시스템이 출현하고, 일반 목적에서 특정 목적으로 패러다임 전환(Shift) 과정에서 한국에게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니엘 리드 부총장은 슈퍼컴퓨터를 활용해 '통찰력'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사진=김인한 수습기자>
다니엘 리드 부총장은 슈퍼컴퓨터를 활용해 '통찰력'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사진=김인한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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