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박용기/한국표준과학연구원 초빙연구원
3월이 되어 이제 봄이 오는가 싶어 두꺼운 외투를 벗고 나서면 겨울의 찬바람이 가슴 속을 파고 들면서 아직 자신이 떠나지 않았음을 인식시키며 매운 맛을 보여주기도 한다.
학기가 끝나고 새 학기를 준비하는 기간인 2월 말에는 학생들에게 '봄 방학'이라고 불리는 짧은 방학이 있다. 이름은 봄 방학이지만 이 기간은 겨울과 봄의 경계가 되는 중간 계절이다.
외손녀의 봄 방학을 맞아 봄을 느껴보려고 2월 말 변산반도의 바닷가를 찾았다. 하지만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출발하는 날엔 겨울비인지 봄비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비가 주룩주룩 내려 숙소에 발을 묶어 두더니, 달이 바뀌어 3월이 된 둘째 날에도 강풍 주의보가 내려 바다는 온통 높은 파도로 일렁이고 있었다.
김윤자 시인은 채석강을 '어느 선비가 변산반도에 와서 학문을 닦다 들고 가지도 못할 만큼 수많은 책들을 격포항 닭이봉 해변 언덕에 수북이 쌓아 놓고 떠나간 뒤, 해풍과 세월이 켜켜이 다져 놓은 초자연의 걸작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만은 책들이 모두 물 속에 잠겨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꽃샘 추위가 손을 얼게 했지만 지는 해는 눈부신 황금빛 봄볕을 축복처럼 뿌려주었다. 변산반도 채석강의 검은 바위 위에도 이제 봄이 피어날 것만 같았다.
파릇하게 싹이 돋은 보리밭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니 거짓말처럼 산기슭에 옹기 종기 모여 앉아 오는 봄을 맞이하고 있는 청초한 모습의 작은 변산바람꽃들이 있었다. 주변은 아직 온통 겨울인데 가녀린 꽃송이들은 겨울을 녹여내어 봄을 빚고 있었다.
어린 외손녀의 첫 눈에는 '딸기꽃처럼 생긴' 꽃이다. 생각보다는 개체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이 꽃을 처음 본 아내와 외손녀도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이 꽃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었다.
변산바람꽃/ 김덕남
웃음을 가득 담은 솜털이 뽀송한 뺨
차마 손댈 수 없어 무릎 꿇고 맞는다
눈두덩 스치는 감성
눈을 감을 수 밖에
꺾일 듯 연한 숨결 지쳐 잠든 아가야
긴긴밤 바라보는 눈물을 보았느냐
한 삼년 널 품을 수 있다면
귀먹어도 좋으련만
바람도 때로는 가슴을 벤다는데
매섭고 차가운 세상 헤집고 올라오다
변산의 어느 골짜기 잔설을 녹이려나
분홍빛 노루귀 옆에는 연분홍빛이 살짝 감도는 흰색 노루귀도 하나 피어있었다. 외손녀는 혹시 낙엽 사이에 또 다른 꽃이 있나 하여 보물찾기를 하듯 찾아보았으나 아직은 철이 이른지 더 이상은 찾을 수 없었다. 깔때기 모양으로 말려 나오는 어린잎의 뒷면에 하얗고 기다란 털이 덮여 있는 모습이 노루의 귀처럼 보인다고 하여 얻은 이름이다.
반짝 찾아왔던 꽃샘추위도 초봄의 오후 햇살에 슬며시 물러나 보리밭 어귀에는 봄이 찾아와 있었다. 보리밭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즐겁게 외손녀와 냉이를 캐던 아내의 손에는 어느새 한가득 냉이가 들려있었다. 향긋한 봄 향기가 가득한 냉잇국은 덤이었다.
하지만 3월에 오는 눈은 겨울 눈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나뭇가지에 하얗게 꽃이 되어 피어나더니 이내 사르르 녹아 내리며 마른 나무 가지를 적시고 나무들의 겨울눈을 두드리고 있었다. 봄은 벌써 저 녹는 눈에 젖은 매자나무 끝에 와 있었다.
오래 전 부르던 동요 중 '봄'이라는 곡이 있다.
엄마엄마 이리와 요것 보셔요
병아리때 뿅뿅뿅뿅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를 데리고 마실 가는 듯 작은 꽃다지 꽃이 줄지어 피기 시작했다. 아무리 지난 겨울이 춥고 길었다 해도 봄은 벌써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래서 칠레의 시인 네루다는 "모든 꽃을 다 꺾는다 해도 봄이 오는 것은 막을 수 없다"고 말했던가? 봄이 오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돋는다. 마른 가지에 봄꽃이 피어나 듯.
이른 봄의 서정/ 김소엽
눈 속에서도
봄의 씨앗은 움트고
얼음장 속에서도
맑은 물은 흐르나니
마른 나무껍질 속에서도
수액은 흐르고
하나님의 역사는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건져 올리느니
시린 겨울밤에도
사랑의 운동은 계속되거늘
인생은
겨울을 참아내어
봄 강물에 배를 다시 띄우는 일
갈 길은 멀고
해는 서산 마루에 걸렸어도
겨울이 지나면
봄은 오게 되어 있나니
서러워 마라
봄은
겨울을 인내한 자의 것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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