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박용기/한국표준과학연구원 초빙연구원

2월말과 3월초는 겨울과 봄의 엇갈린 만남이 이루어 지는 시간이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긴 추위를 벗어나 하루 빨리 꽃이 피는 봄이 오기를 기다리지만 날씨는 그렇게 쉽사리 겨울의 자리를 내어놓지 않는다.

3월이 되어 이제 봄이 오는가 싶어 두꺼운 외투를 벗고 나서면 겨울의 찬바람이 가슴 속을 파고 들면서 아직 자신이 떠나지 않았음을 인식시키며 매운 맛을 보여주기도 한다.

학기가 끝나고 새 학기를 준비하는 기간인 2월 말에는 학생들에게 '봄 방학'이라고 불리는 짧은 방학이 있다. 이름은 봄 방학이지만 이 기간은 겨울과 봄의 경계가 되는 중간 계절이다.

외손녀의 봄 방학을 맞아 봄을 느껴보려고 2월 말 변산반도의 바닷가를 찾았다. 하지만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출발하는 날엔 겨울비인지 봄비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비가 주룩주룩 내려 숙소에 발을 묶어 두더니, 달이 바뀌어 3월이 된 둘째 날에도 강풍 주의보가 내려 바다는 온통 높은 파도로 일렁이고 있었다.

채석강-1_PENTAX K-1, 115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11, 1/800 s, ISO100
채석강-1_PENTAX K-1, 115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11, 1/800 s, ISO100
비는 그쳤지만 때마침 정월 대보름 바로 전 날 사리 때여서 채석강 깊숙이 밀물이 들어오고, 거센  파도가 물보라를 만들어 채석강 꼭대기까지 날려보내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채석강의 검은 돌 틈 사이사이로 스며들던 초봄이 파도에 모두 씻겨갈까 걱정이 되었다.

김윤자 시인은 채석강을 '어느 선비가 변산반도에 와서 학문을 닦다 들고 가지도 못할 만큼 수많은 책들을 격포항 닭이봉 해변 언덕에 수북이 쌓아 놓고 떠나간 뒤, 해풍과 세월이 켜켜이 다져 놓은 초자연의 걸작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만은 책들이 모두 물 속에 잠겨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채석강-2-석양빛_PENTAX K-1, 7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11, 1/250 s, ISO100
채석강-2-석양빛_PENTAX K-1, 7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11, 1/250 s, ISO100
봄맞이를 하려고 찾아간 3월 초의 바닷가는 아직 찬 바람이 가득한 겨울이었다. 하지만 저 바다 건너 섬 어딘가에서 봄이 피어나고 있을 것 같아 사람들은 해가 지는 서쪽을 바라보며 한결 같이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꽃샘 추위가 손을 얼게 했지만 지는 해는 눈부신 황금빛 봄볕을 축복처럼 뿌려주었다. 변산반도 채석강의 검은 바위 위에도 이제 봄이 피어날 것만 같았다.

남녘의 초봄-1, 변산바람꽃_PENTAX K-1, 15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640 s, ISO100
남녘의 초봄-1, 변산바람꽃_PENTAX K-1, 15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640 s, ISO100
날씨는 겨울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지만 변산까지 갔으니 꼭 만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둘째 날 내소사 뒷산에 들러 만나보려 했지만 바람이 너무 강해 포기해야만 했다. 다행히 마지막 날 오후엔 꽃샘 추위가 조금 누그러져 돌아오는 길에 부안군 상서면에 있는 한 마을에 들러 봄 아가씨를 만나기로 하였다.

파릇하게 싹이 돋은 보리밭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니 거짓말처럼 산기슭에 옹기 종기 모여 앉아 오는 봄을 맞이하고 있는 청초한 모습의 작은 변산바람꽃들이 있었다. 주변은 아직 온통 겨울인데 가녀린 꽃송이들은 겨울을 녹여내어 봄을 빚고 있었다.

어린 외손녀의 첫 눈에는 '딸기꽃처럼 생긴' 꽃이다. 생각보다는 개체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이 꽃을 처음 본 아내와 외손녀도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이 꽃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었다.

남녘의 초봄-2, 변산바람꽃-2_PENTAX K-1,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1250 s, ISO100
남녘의 초봄-2, 변산바람꽃-2_PENTAX K-1,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1250 s, ISO100
김덕남 시인의 시처럼 무릎을 꿇어야만 제대로 얼굴을 볼 수 있는 작고 연약한 꽃이지만 어떤 꽃보다도 먼저 추위와 바람을 이기고 피어 있었다.

변산바람꽃/ 김덕남

웃음을 가득 담은 솜털이 뽀송한 뺨
차마 손댈 수 없어 무릎 꿇고 맞는다
눈두덩 스치는 감성
눈을 감을 수 밖에

꺾일 듯 연한 숨결 지쳐 잠든 아가야
긴긴밤 바라보는 눈물을 보았느냐
한 삼년 널 품을 수 있다면
귀먹어도 좋으련만

바람도 때로는 가슴을 벤다는데
매섭고 차가운 세상 헤집고 올라오다
변산의 어느 골짜기 잔설을 녹이려나

남녘의 초봄-3, 노루귀_PENTAX K-1,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5.6, 1/250 s, ISO100
남녘의 초봄-3, 노루귀_PENTAX K-1,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5.6, 1/250 s, ISO100
변산바람꽃과 이별을 한 후 혹시 더 피어 있는 꽃이 있나 살피며 아쉬운 발걸음으로 작은 계곡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보일 듯 말 듯 수줍게 피어난 분홍빛 노루귀 두 그루가 낙엽과 돌을 헤집고 올라와 반갑게 봄을 보여주고 있었다.

분홍빛 노루귀 옆에는 연분홍빛이 살짝 감도는 흰색 노루귀도 하나 피어있었다. 외손녀는 혹시 낙엽 사이에 또 다른 꽃이 있나 하여 보물찾기를 하듯 찾아보았으나 아직은 철이 이른지 더 이상은 찾을 수 없었다. 깔때기 모양으로 말려 나오는 어린잎의 뒷면에 하얗고 기다란 털이 덮여 있는 모습이 노루의 귀처럼 보인다고 하여 얻은 이름이다.

남녘의 초봄-4, 봄이 오는 길_PENTAX K-1,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640 s, ISO100
남녘의 초봄-4, 봄이 오는 길_PENTAX K-1, smc PENTAX-D FA MACRO 100mm F2.8 WR, f/3.5, 1/640 s, ISO100
산기슭 모퉁이에 피어 있는 변산바람꽃과 노루귀를 만난 후 파릇파릇 싹이 돋은 보리밭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걷던 아내와 외손녀는 어느새 밭 사이에 돋아난 냉이를 찾아내었다.

반짝 찾아왔던 꽃샘추위도 초봄의 오후 햇살에 슬며시 물러나 보리밭 어귀에는 봄이 찾아와 있었다. 보리밭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즐겁게 외손녀와 냉이를 캐던 아내의 손에는 어느새 한가득 냉이가 들려있었다. 향긋한 봄 향기가 가득한 냉잇국은 덤이었다.

3월에 내리는 눈_PENTAX K-1, 18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500 s, ISO200
3월에 내리는 눈_PENTAX K-1, 180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5, 1/500 s, ISO200
겨울과 봄 사이인 3월 초에는 가끔 폭설이 내리기도 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며칠 뒤, 아침에 일어나 봄이 어디까지 왔나 보려고 커튼을 걷어 보니 창밖에는 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3월에 오는 눈은 겨울 눈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나뭇가지에 하얗게 꽃이 되어 피어나더니 이내 사르르 녹아 내리며 마른 나무 가지를 적시고 나무들의 겨울눈을 두드리고 있었다. 봄은 벌써 저 녹는 눈에 젖은 매자나무 끝에 와 있었다.

봄이 오는 모습-꽃다지_PENTAX K-1, 122.5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2, 1/200 s, ISO100
봄이 오는 모습-꽃다지_PENTAX K-1, 122.5 mm with Tamron SP AF 70-200mm F2.8 Di LD [IF] Macro, f/3.2, 1/200 s, ISO100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3월에 들어서면 겨울은 힘을 잃는다. 어느 틈에 찾아오는 봄꽃 소식은 보도블록 틈 사이에도 마술처럼 봄을 불러온다.

오래 전 부르던 동요 중 '봄'이라는 곡이 있다.

엄마엄마 이리와 요것 보셔요
병아리때 뿅뿅뿅뿅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를 데리고 마실 가는 듯 작은 꽃다지 꽃이 줄지어 피기 시작했다. 아무리 지난 겨울이 춥고 길었다 해도 봄은 벌써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래서 칠레의 시인 네루다는 "모든 꽃을 다 꺾는다 해도 봄이 오는 것은 막을 수 없다"고 말했던가? 봄이 오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돋는다. 마른 가지에 봄꽃이 피어나 듯.

이른 봄의 서정/ 김소엽

눈 속에서도
봄의 씨앗은 움트고
얼음장 속에서도
맑은 물은 흐르나니
마른 나무껍질 속에서도
수액은 흐르고
하나님의 역사는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건져 올리느니
시린 겨울밤에도
사랑의 운동은 계속되거늘
인생은
겨울을 참아내어
봄 강물에 배를 다시 띄우는 일
갈 길은 멀고
해는 서산 마루에 걸렸어도
겨울이 지나면
봄은 오게 되어 있나니
서러워 마라
봄은
겨울을 인내한 자의 것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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