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순석 ETRI 커뮤니케이션전략부장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원장 이상훈)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자발적 학습 커뮤니티인 새통사(새로운 통찰을 생각하는 사람들)가 열립니다. ETRI 연구자들이 일반 국민과 선후배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디지털혁명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기술들을 탐색하고 고민해 주제발표하는 자리입니다. 새통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전달드리고자 참가자들이 직접 정리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미래 우리에게 다가올 새로운 기술은 무엇이며, 이를 대비하는 연구원들의 자세와 각오는 어떠한지 글로 만나보세요. [편집자주]

이번 107차 모임은 문화예술과의 만남 세번째 시간으로 한국차인연합회 다도교수로 계신 이정수 선생님을 모시고 차와 차와 함께 하는 명상법을 배우고, 함께 체험해보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최근 일고 있는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로봇 등에 대한 사람들의 막연한 공포를 벗어나는 방법을 이정수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것 같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차와 함께 하는 명상 속에는 나를 깨어있게 하는 훈련과 나를 들여다보는 훈련이 함께 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밤늦게까지 네트워킹 시간을 허락해주신 이정수 선생님의 모습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자유인의 모습을 훔쳐볼 수 있는 행운의 시간이었다. 또 한편으로, 자유인으로 넓은 활동을 하시면서 보고 경험한 우리나라의 더불어 사는 정신의 현주소에 대한 말씀에서는 많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문제도 던져 주셨다.

1. 자유인

새통사를 시작하기 한참 전인 3시경에 교육장에 들어오셨다. 부군의 손에 커다란 가방 2개를 들게 하시고 그렇게 오셨다. 오시자마자, 사람들이 마주보고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하시곤, 가방에서 이것저것을 꺼내놓으신다. 

찻잔이 수십 개, 다관, 숙우, 탕관, 티스푼, 연꽃 모양을 한 큰 사발, 녹차 넣어 삶은 계란, 말린 감, 간식 떡, 상차림을 할 다양한 보들, 크리스탈 촛대, 이름 모를 빨간 열매들이 알알이 맺힌 가지들, 국화꽃 몇송이, 꺽꽂이 틀 등. 깜짝 놀라서 입만 벌리고 있다.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바리바리 싸들고 오셔서 전부는 아니지만 차에 대한 예법과 차와 함께 하는 명상 수련의 가장 기본적인 환경을 갖추어 주시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죄송스럽고 감사한 마음 외엔 다른 마음을 품을 수가 없다. 

연꽃 모양의 큰 사발에 더운 불을 붓고 진짜 말린 연꽃을 띄운다. 왕에게 차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새통사에 참석하신 분들에게 정성과 존경을 표하고 싶으시단다. 마주한 일렬의 책상위에 코발트 색 큰 보를 펼치고 앙증맞은 빨간 열매가 옹기종기 달려있는 나뭇가지를 놓고 그 옆에 노란색 야생화를 살짝 배치하신다. 그 옆에 크리스탈 촛대에 불을 붙이고 그 옆에 또 큰 코발트 색 큰 보에 대칭적으로 수를 놓고 한 가운데 노란색 꽃을 꽂은 꺽꽂이를 배치하신다. 코발트색과 노란색, 빨간색, 흔들리는 황금색 불빛의 은은한 향초를 피우신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차를 마실 사람들을 위하여 코발트색 1인용 차받침보를 놓고 찻잔 나무로 티 스푼 하나 가지런히 놓아 주신다. 코발트색 바탕에 은은한 찻잔 마무색 티스푼의 색의 조화 또한 간결하지만 멋을 더한다.

명상 음악을 틀고, 또 한편의 테이블 위에 차 마실 준비를 해 주신다. 첫 단계인 공복을 피하게 하는 것이란다. 따뜻한 연꽃차와 함께 떡, 찻닢 넣어 삶은 계란, 말린 감 등을 먹고 공복을 면하라 하신다. 어느 멋진 찻집에 들어와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는 느낌이 물신 난다. 얼마 전에 갔던 서울 인사동의 찻집과는 격이 다르다. 죄스럽고 고마운 마음에 고개돌려 바라본 이정수 선생님의 마음은 즐거움 가득한 모습이다. 

부럽다. 아낌없이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바람이 없이 당신의 즐거움을 행함 자체가 그저 즐거운 모습이 너무 부럽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모습이 멋지고 또 그러한 추구 속에 타인을 위한 아낌없는 헌신의 존경스럽다. 그런 이정수 선생님의 모습에서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홀로 서는 자유인. 자유인 이정수 선생님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떤 즐거움일까, 다도 속에서 어떤 매력을 느끼신 것일까. 궁금함에 여쭈어본다. 왜, 다도를 즐기시냐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다도를 익혀서 함께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다도에 무엇이 있어 사람을 행복해지게 하는 것일까. 이정수 선생님의 모습에서 85세의 나이로 운명하시기 직전 제자들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읊으신 시가 오버랩 된다.

[ 여보게 친구 ] - 西山大師

살아 있는게 무언가 ?
숨 한번 들여마시고 마신 숨 다시 뱉어내고.
가졌다 버렸다 버렸다 가졌다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표 아니던가?
그러다 어느 한 순간 들여마신 숨 내뱉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이지.

어느 누가
그 값을 내라고도 하지않는 공기 한 모금도
가졌던 것 버릴줄 모르면
그게 곧 저승가는 것인줄 뻔히 알면서
어찌 그렇게 이것도 내것 저것도 내것
모두 다 내것인 양 움켜쥐려고만 하시는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저승길 가는데는
티끌 하나도 못가지고 가는 법이리니
쓸만큼 쓰고 남은 것은 버릴 줄도 아시게나

자네보다 더 아쉬운 사람에게 자네 것 좀 나눠주고
그들의 마음 밭에 자네 추억 씨앗 뿌려
사람 사람 마음속에 향기로운 꽃피우면
천국이 따로 없네.
극락이 따로 없다네.
생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 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스러 짐이라
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천가지 계획과 만가지 생각이
불타는 화로위의 한 점 눈(雪)이로다
논갈이 소가 물 위로 걸어가니
대지와 허공이 갈라지는구나.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오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다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2. 깨어 있기

이제 차를 마신다. 팽주께서 따뜻한 물 탕관에 따라 자신의 찻잔에 쪼르르 따르고, 옆자리에 계신 분께 탕관을 넘긴다. 탕관을 받은 사람은 팽주와 같이 자신의 찻잔에 따듯한 물을 따르고 또 옆사람에게 넘긴다. 따듯한 물이 담긴 찻잔을 두손으로 감싸쥐고 온기를 느끼면 찻잔을 굴려 따뜻한 물로 잔을 씻는다. 

이번에는 팽주께서 버릴 물을 담을 그릇, 이것을 아마 다완이라 했던 것 같다. 다완을 돌리며 차례로 다완에 물을 버리고 코발트색 찻잔보에 잔을 내려 놓는다. 이번에는 팽주께서 차호를 열어 나무 스푼으로 차를 자신의 반 숟가락 정도로 찻잔에 들어 놓는다. 그리고 차호를 옆에 있느 사람에게 돌린다. 모두 차호를 받아 자기 찻잔에 차를 들어 놓는다. 이번에는 다시 탕관이 돈다. 처음에는 차가 잠길 정도로만 물을 따른다. 오른 손으로 잔을 들어 왼손에 받치고 차를 이러저리 기울이며 차를 불리며 찻잔의 온기를 느낀다. 이제 차를 마신다.

잔을 들어 단전에 잔을 위치시킨 후, 잔을 명치 앞에 들어 올린다. 이 때 차의 '색'을 음미한다. 다시 잔을 코 끝으로 들어 올려 이번에는 차의 '향'을 탐미한다. 또 다시 잔을 들어 차를 입에 넣으며 이번에는 차의 '맛'을 즐긴다. 1/3모금만 마신다. 이제 두 번째 차의 색과 향과 맛을 놀기를.

또 1/3 모금만 마시고, 또 마지막 1/3모금만 마시고 잔을 단전으로 내렸다. 찻잔보에 잔을 내려 놓는다. 차를 즐기는 과정은 소리가 필요없다. 오로지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차의 색과 향과 맛에 집중한다. 오로지 들리는 소리는 물 따르는 소리요, 차 넘기는 소리만이 존재한다. 고요하다. 그 고요함 가운데 오로지 나의 감각만 작동한다. 나의 지각작용만 작동한다. 내 속의 생각이 작동하고 회상이 작동하려거든 차분하게 끊어내며 오로지 나의 감각과 지각만을 붙잡는다. 나로 빠져들어가려는 나를 붙잡기 위한 방법이 있다. 나 아닌 나를 닮은 타인을 생각하는 혈구지도(絜矩之道)의 자세로 더불어 사는 삶을 염원하는 다짐을 해본다.

[자애의 명상]

만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잘못을 행했다면,
내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누군가가 나에게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잘못을 행한다면
그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나는 용서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증오가 없기를
악의가 없기를
고통이 없기를
행복하게 살기를

모든 존재들이 증오가 없기를
악의가 없기를
고통이 없기를
행복하게 살기를

모든 존재들이 증오가 없기를
악의가 없기를
고통이 없기를
행복하게 살기를

내가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내가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내가 악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내가 악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악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내가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내가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내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내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내가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내가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내가 악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내가 악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악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내가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내가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내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내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내가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내가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내가 악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내가 악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악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내가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내가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내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내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차를 통한 명상으로 오직 나 홀로 이 공간에 존재함을 느끼면서, 나의 감각을 붙들고 나의 감각이 예리하게 다듬어지는 것을 훈련하는 것이 곧 깨어있음을 시작이다. 예리한 감각이 있기에 예리한 지각이 존재하고 예리한 사유가 존재한다. 예리한 감각과 지각과 사유는 나의 도그마를 깨고 나 밖의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한다. 

지난 시간의 대학에서 나오는 사물의 시작과 끝을 알고 선과 후를 깨우치는 감각과 지각과 사유의 눈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것으로부터 인간이 인의예지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출발선을 서게 되는 지름길이 아닐까 싶다.

3. 멋을 추구하는 자유인

시절이 수상하다. 지금 세상은 인공지능과 로봇 때문에 인간의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둥 인간이 로봇의 지배를 받는 다는 둥 때 아닌 호들갑들이 난무한다. 나라의 부를 일구기 위해 아무 것도 없었던 이 땅에 초음속의 속도로 남의 지식을 재빨리 훔쳐서 남들만큼 따라갈 수 있도록 하라고 내몰렸던 출연연들이 또 다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아니 아직 정의하지 못하는 세상의 도래에 대한 징후로 인하여 내몰리는 방향도 없이 내몰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있는 꼴이다. Top-Down식 출연연 경영방식의 한계점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흔히들 초연결의 세상이 온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이 시공간을 초월해서 연결되고, 인간이 만든 인공공간이 서비스 도메인들이 연결되기 시작했고, 또 이제는 사물들간의 연결이 시작되면서 사람과 사물들과 서비스들이 시공간을 초월하며 빛의 속도로 연결되는 빅뱅이후의 처음 맞이하는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기 직전에 있다. 인간의 격물치지의 능력이 인간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탁월함을 보이며, 인간 스스로 생태계 전체를 조화롭게 만들어 가야 함을 깨닫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들이 갖추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생태계는 너무 방대한 크기의 세계이다. 몇몇 인간의 머리에서 설계되고 통제되고 구현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의 다양한 바람이 집대성되어야만 생태계를 전체를 커버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는 방대함이다. 당연히 인간의 다양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가 도래한다. 어쩌면 인간의 다양성만으로도 부족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만일 인간의 다양성만으로도 모자란다면, 우린 우리와 닮은 그 무엇을 만들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꾸는 꿈의 다양성만으로도 부족한 마당에 노동을 인간이 할 여력이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왜 가져 보지는 않을까하는 안타까움이 들기 시작한다.

2017년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있다면, 알파고가 의지와 지능이 구별된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의 뜻이다. 나의 욕망이다. 나의 꿈이다. 작자의 다양한 꿈이 없다면 이 세상의 방대함을 다룰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가 아닌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붙잡고 살아야 하는 시대의 문턱에 서 있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 최적화된 인간이 되려는 알파고 같은 인간이 아니라, 내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차와 명상으로 나의 감각을 갈고 닦아서, 색과 향과 맛을 즐기며 멋을 부릴 줄 아는 자유인으로 넘쳐나는 것이 우리 인간이 처한 위기 앞에 선 우리 모두의 시대적 소명이 아닐까 싶다. 

자신 만의 삶의 콘텐츠를 다듬으며 멋지고 품위 있게 살아가시는 이정수 선생님이 바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진심으로 응원드리며, 삶의 또다른 모습을 일깨워 주신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항상 멋진 시간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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