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재조명 통해 한국 현재 성찰···홍이포 등 과학과 관련
미래 만드는 과학자 역사 보는 안목과 다양한 상상력을

영화 남한산성과 과학계 이미지.<사진=남한산성 제작사 제공 및 대덕넷 DB>
영화 남한산성과 과학계 이미지.<사진=남한산성 제작사 제공 및 대덕넷 DB>
380년 만의 '정직한' 재조명과 명예 회복.

추석 연휴 중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에서 보여진 병자호란의 참상과 '고독한' 주화파 최명길 선생의 모습에서 전해진 느낌이다. 그동안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가 드물게 있기는 했지만, 결말은 우리가 이기는 것이었다. 보고 나서 감성적으로는 위로가 됐으나 사실(史實)에서는 아쉬웠다.

'남한산성' 이전에 가장 최근에 개봉된 '최종병기 활'(감독 김한민)의 경우가 그렇다. 아마 결론을 우리한테 유리하게 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관객들이 우리가 지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영화에서 흥미 요소가 빠지고 역사적 팩트만을 강조하면 교과서처럼 돼 흥행이 안 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번 남한산성은 다르다. 팩트 중심이다. 김훈 작가의 원작을 10년 만에 영화로 만들었는데 원작 보다 사실 전달이 잘된다는 평도 있다.

과학자들도 공동체의 일원이고, 더군다나 공동체에서 일반인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는 사람들인 만큼 우리 공동체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어떻게 공동체 발전에 일익을 담당할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 이 영화는 생각 거리를 준다.

영화에서는 과학자 혹은 기술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실은 별로 없다. 대장간을 운영하는 '날쇠'가 조총을 고치니 기술자에 해당된다고 할까? 넓게 나아가서 무관도 포함시킬 수 있을까?

여하튼 영화 전체적으로 보아 과학자들의 역할은 거의 없다. 임금인 인조도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나 관심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런데 사실 이 점이 조선의 패인이었다. 병자호란에 등장한 가장 최신 무기가 '홍이포'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얼굴이 붉어 빨간 오랑캐란 뜻의 홍이(紅夷)로 명나라에서 불렀고, 그들이 만든 포라고 하여 홍이포라고 불렀다.

홍이포가 동양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20년. 마카오를 통해서였다. 명나라는 홍이포를 구입해 청나라와의 전쟁에 사용했다.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활용해 대승을 거두었고 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청태조인 누르하치가 사망한다.

명나라는 홍이포 위력을 알고 국산화에 힘써 1630년 이에 성공한다. 청나라도 가만있지 않고 명나라의 귀순 기술자들을 활용해 1631년 국산화에 성공한다.

홍이포는 전투의 개념을 바꾸었다. 보병 중심의 접전에서 포병 중심의 포격을 통한 기선제압 후 보병 투입으로 획기적 변화를 갖고 왔다. 영화에서도 조선군이 청군 진영으로 다가가나 정작 청군은 없고, 안 보이는 곳에서 포탄이 떨어지며 많은 사상자를 낸다.

홍이포의 사거리가 700m이니 당시로써는 상상이 안 되는 거리이고 새로운 전법 전개가 가능했다. 참고로 조선군의 주 무기인 조총의 사거리는 100m. 우리가 국제정세에 조금만 밝아 신무기 도입과 이를 위해 과학기술에 투자했으면 그토록 처절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을 갖게 만드는 대목이다.

영화에서는 홍이포를 명나라로부터 빼앗은 노획물로 묘사한다. 일부는 그럴 수 있지만 1631년에 청이 국산화에 성공한 만큼 자체 제작한 포도 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과학 관련 사실(史實) 가운데 하나는 먼 나라의 신무기가 이웃 나라에서 국산화되거나 도입되면 우리는 늘 많은 피를 흘렸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조총, 병자호란의 홍이포, 근대 동학농민군 전쟁에서 개틀링 기관포가 그러하다.

우리에게 큰 피를 흘리게 한 이 세무기의 공통점은 발상지는 서양인데 일본이나 중국 등 우리와 국경을 접한 이웃 나라가 국산화하거나 도입하면서 우리가 바로 피해를 받았다는 점이다.

조총은 1543년 일본에 전수돼 10여 년 만에 국산화에 성공하고 이는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의 주요 무기로 조선을 유린하는데 쓰인다. 홍이포도 15세기에 유럽에서 사용된 것이나 17세기 명과 청에 도입되자마자 병자호란에서 보듯이 우리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개틀링 기관포는 1862년 미국에서 남북전쟁 시기 개발됐는데 일본군에 도입되며 1894년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을 궤멸시키는 악역을 담당한다.

역사적으로 주변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우리로서는 주변국 동향에 늘 안테나를 높이 세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북의 핵무기는 더욱 예의주시해야 한다.

'쌍령 전투'란 또 하나의 치욕도 이때 벌어진다. 우리 역사에서 3대 패전으로 이야기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영화에서는 근왕군이 1월 정월 대보름 전후에 올 것으로 기대하지만 그 전에 남한산성 근처 광주의 쌍령이란 곳에서 조선군이 참패한 기록이 있다.

임금을 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온 4만여 조선군이 쌍령에 진을 치고 있다가 청군 300명의 척후병에 의해 처참하게 도륙을 당한 것이다. 1637년 1월 2일의 일이었다. 적을 보고 놀란 자중지란에 훈련 미숙으로 인한 화약 폭발로 빚어진 참사이다.

이것이 임진왜란 때의 원균에 의한 수군 대참패인 칠천량 전투와 6·25 때의 중공군 투입에 따른 국군의 적전(敵前)분열이란 현리 전투와 함께 한국사 3대 패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위키백과 쌍령전투를 참고하면 대체적인 것을 알 수 있다.

끝으로 50만 혹은 60만이란 포로에 대한 이야기다. 임진왜란에서도 많은 사람이 왜의 포로가 되거나 노예로 팔려나갔다. 그런데 40년도 안 돼 수십만에 달하는 조선 사람이 청으로 끌려간다.

청은 남한산성을 포위하는 동안에도 조선사람들을 포로(捕虜) 사냥했고, 철군하면서도 각지를 돌며 사람들을 잡아갔다. 포로가 된 사람들은 속환이라고 하여 돈을 내고 가족들이 되찾아올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때 돈과 권력을 가진 벼슬아치들이 자신들의 피붙이를 찾겠다는 이기심으로 고액을 불러 속환가를 일반인들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주돈식 씨가 지은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란 책에 따르면 병자호란 초기의 속환가는 10냥 정도였다. 그런데 좌의정 이성구는 자기 아들의 속환가로 1500냥을 내놓았고 영의정 김류는 첩과 딸의 속환가로 1000냥을 제시하면서 평균가가 몇백 냥으로 다락같이 올랐다.

그러다 보니 애절한 사연도 많이 생겼다. 한 어머니가 딸을 속환하려고 200냥까지는 어찌어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사람은 300냥을 불렀고, 이를 250냥으로 낮춘 다음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소작으로 해서 집안 사정을 아는 딸은 어머니 등 집안이 자신의 속환으로 당할 어려움을 생각하고는 옆에 있던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했다고 심양일기의 기록을 전한다.(심양일기-청나라에 인질로 간 소현세자의 심양에서의 일을 기록한 자료) 조선사람들이 전란에서 노예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최근 기사화되기도 했다. ("조선인 돈된다"···아이-여자까지 새끼줄로 목 묶어 끌고가 동아일보 2017년 9월 9일 토요기획)

과학자와 역사의 관계는 무엇일까? 역사를 통해 배울 것은 무엇인가?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이야기인가?

영화에서 주화파 최명길은 만고의 역적이 될 각오를 한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동시대는 물론 근대 이후의 역사에서도 척화파와 3학사에 대해서는 교과서에 시(詩)도 실리는 등 많은 거론이 됐으나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이번에 충신으로 복권했다. 왜 그는 다른 사람들이 다 척화를 이야기할 때 주화를 이야기했을까? 양명학을 공부하며 성리학과 다른 기준을 가졌고, 새로운 문물의 현장을 보고 실상을 알았기 때문이다.

최명길은 정확한 일처리로 나중에 재상으로도 중용된다. 청과의 갈등으로 지금의 총리인 영의정 신분으로 종주국인 청에 끌려가 옥살이를 하는 고난도 겪었다. 영화 속에 자결을 시도하는 것으로 나온 척화파의 주장 김상헌은 그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목숨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고 오히려 대의명분을 세운 영웅으로 안동 김씨 세도의 튼실한 기반을 닦는다. 병자호란의 참담함을 묘사한 영화 '남한산성'이 지금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원작과 연출이 뛰어난 점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를 보는 관객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전에는 사람들이 우리의 아픈 역사에 대해 정면으로 다룬 작품들을 불편해 했다. 정서적으로나마 위로받기를 바라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삶의 수준이 나아지며 우리를 객관화시킬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듯하다. 그러기에 팩트 중심의 다소 무미하고 무거운 스토리 전개임에도 묵묵히, 때로는 안타까움에 탄식도 하며 끝까지 보는 듯하다.

과학자들은 시대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다. 새로운 시대를 만들려면 '나'에 대해, '우리'에 대해 깊이 알아야 할 것이다.

남한산성을 비롯해 임진왜란과 식민지 시대 그리고 해방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피와 땀에 대해서도 과학자 가운데 누군가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지나온 역사에서 '왜 연구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을 세우기를 일반인들은 바라지 않을까? 참고로 최명길 선생의 묘소는 대덕단지 인근 청주에 있는 것으로 검색된다.
 

병자호란과 관련해 알아두어야 할 팩트 및 생각 거리 몇가지. 인구 면에서 조선과 청은 당시 어디가 많았을까? 병자호란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조선이 당시 동북아의 흐름을 읽고 친청 정책을 펼쳤다면 이후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패전과 그 피해로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수는 없었는가?

영화 '남한산성'과 관련해 한국한의학연구원과 오는 18일 공동 개최하며 함께 보는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병자호란의 강퍅하고 궁핍한 시기를 눈으로 확인하고, 그 시기를 이겨내는데 한의학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참고서적

- 한명기著 병자호란 1,2
- 주돈식著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
- 이삼성著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권
- 최명길 선생 관련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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