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박용기/한국표준과학연구원 초빙연구원
폭염으로 매일 매일이 힘들고 지치던 7월 중순경, 아내는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기 위해 서툰 인터넷 서핑을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외손녀를 돌보기 시작한 지 6년여 동안 한 번도 시도하지 못했던 해외 여행을 떠나는 거사를 8월 초에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아내가 선택한 목적지는 하와이. 단체 여행과 자유 여행이 적당히 섞여 있는 여행 상품이었다. 조금은 여유와 쉼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손녀를 엄마 아빠에게 맡기고 홀가분하게 떠나는 댓가로 우리는 극성수기의 가장 비싼 여행 경비를 감수하게 되었다.
모처럼 떠나게 된 아내와의 이번 여행에서 나 역시 감수해야할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진 찍기 중독에서 조금은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몇가지 나름의 수칙을 정하였다.
첫째는 DSLR 카메라 세트를 집에 두고 작은 미러리스 카메라만 가져가기, 차 안에서는 차창 밖의 풍경을 촬영하지 않기, 그리고 꽃과 아름다운 풍경도 절제하여 최소한의 촬영만 하기.
하와이는 아내와 나에게 특별한 곳일 수도 있다. 미국에서 공부가 끝나고 대덕연구단지에 직장을 잡아 가족과 함께 귀국하는 중에 잠시 들러 여행을 하였던 곳이었다. 연구자로서 첫발을 내디디기 시작하는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들른 여행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때에는 큰딸이 초등학교 2학년이었고 둘째 딸은 이제 10개월의 애기였다.
이미 32년 전 일이라 다른 것들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느 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둘째 아이가 자꾸 우는 바람에 아내와 나는 교대로 식사를 하면서 아이를 안고 비가 내리는 식당 밖에 나가 처마 밑에서 달래야 했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그런데 그 둘째 딸이 결혼을 하여 딸을 낳고 우리가 그 아이를 키운 지 벌써 5년 반이 지난 지금, 막 은퇴한 연구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또다른 전환점에 같은 장소로 여행을 하게 되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여행을 떠나기 전, 지인 하나가 나에게 보내온 명언이 하나 있었다. "여행은 가슴 떨릴 때 떠나야 지, 다리 떨릴 때는 이미 늦는다." 다행히 아직은 여행을 할 수 있는 때임을 증명하듯 조금은 두근거리는 가슴과 떨리지 않는 다리로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출발부터 순조롭지가 않았다.
공항에서 받은 아내의 보딩 패스에는 이상한 표시가 되어 있었다. 특별 검사 대상으로 선택되어 비행기를 타기 전 까다로운 보안 검사를 받게 된 것이었다. 무작위로 뽑는다고는 하지만 이런 특별대우를 유난히 싫어하는 아내는 몹시 언짢아 하며 불평하였다.
또 갑자기 여행상품을 선택하다 보니 저가 항공 편을 이용하는 상품을 택하게 되었는데, 비행기에 타고 보니 보통 장거리 비행을 할 때 타 보았던 비행기와는 많은 차이가 있어 사전 정보가 없었던 우리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비행 중 영화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모니터나 이어폰 잭 등 일체의 오락 거리가 보이지 않았다. 담요나 쿠션도 물론 제공되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별도로 구매해야만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추가 비용을 들이지 않고 그냥 조금 원시적인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멀리할 수 있는 얼마 동안의 시간을 즐기기로 하였다. 다행히 하와이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할 때에는 큰 문제없이 무사통과하여 그나마 아내의 기분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토요일 저녁때 서울을 출발했는데 하와이에 도착해보니 다시 토요일 아침이라 시간을 거슬러 여행한 느낌이 들고 시간을 벌은 느낌이었다. 곧바로 호놀룰루 시내를 둘러보는 일정으로 이어져 조금 피곤하고 긴 토요일이었지만 저녁을 먹은 후, 아내와 나는 해가 지는 와이키키 해변에 앉아 해 진 하늘빛과 파도소리에 취해 모처럼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둘의 입에서는 동시에 같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참~ 좋다!"
이런 배려를 해 준 그 여직원의 세심함으로 인해 순조롭지 않게 시작된 아내의 6년만의 외출은 이제 행복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현재에도 섬의 총면적 중 3 %만이 상업과 주거지역으로 개발되고, 나머지는 농업 및 자연보호지역으로 묶어두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으로는 그랜드 캐니언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와이메아 캐니언이었다. 그랜드 캐니언보다 젊은 협곡이라 살아있는 계곡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아직 그랜드 캐니언을 못 본 나로서는 와이메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이 협곡도 충분히 가슴 벅찬 멋진 풍광이었다.
하지만 평소에 안개와 구름이 많이 끼는 곳으로 비경을 보기가 어렵다는 가이드의 설명처럼, 도착하여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구름이 발 아래를 가득 채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기다리니 거짓말처럼 운무가 걷히면서 비경이 서서히 그 신비한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이곳은 신의 영역이어서 아무에게나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약간 뻥이 섞인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정말 이렇게 잘 볼 수 있는 날을 만날 확률은 대략 20% 정도라고 하니 우리는 행운의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그룹투어의 장점 중 하나는 가만히 있어도 볼거리를 찾아 대려다 주는 것이다. 하지만 단점은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닌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곳만 바쁘게 다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두 가지를 적절히 조합할 수 있어 좋았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때묻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이 마음을 여유롭게 해주고 탁 트인 태평양 해안을 따라 달리는 해안 도로도 환상적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김없이 팬션이나 횟집이 있을 법한 장소에서 그런 상업적인 건물이 단 한 개도 보이지 않는 점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베란다에 앉아 수평선 너머로 붉게 지는 석양과 석양이 진 서쪽 하늘에 구름이 펼치는 환상의 그림들을 어두워질 때까지 바라보는 일도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오전을 그렇게 아내와 빈둥거리다 점심을 먹으로 밖으로 나섰다. 호텔 바로 옆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에 가서 커다란 빵 속에 야채를 가득 채운 샌드위치 하나와 샐러드를 시켜 코앞에 와이키키 해변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바다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여유 있는 점심 식사를 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질 때까지 서쪽 하늘을 바라보던 아내는 끝나가는 여행의 일정처럼 저물어가는 서쪽 하늘을 보면서 아쉬움의 한 마디를 던졌다. "며칠 더 있다 가면 좋겠다."
하와이에서 '알로하'는 만날 때나 해어질 때 모두 사용하는 인사말인데, '조건없이 사랑하고 서로 화합하는 상호간의 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나에겐 은은한 플루메리아의 향 같이 향긋하고 '알로하'와 같이 좋은 느낌의 추억으로 남을 것 같은 여행이었다.
나에게 여행은 늘 설렘으로 떠나 새로움과 그리움으로 채워진 기억을 가득 담아 돌아오는 일이다. 이번 여행이 아내에게는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삶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여행이 아닌, 더 여유롭고 감사가 넘치는 삶이 우리로부터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한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댓글 정렬